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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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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연극이냐 생활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들이 극단보다는 전공이든 아니든 생활을 위해 직장을 선택했던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래가 연극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연극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이가 자기 몸 하나 근근이 건사할 정도였다니. 광래는 마산 출신이면서도 마산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단다. 하지만 딸이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물을 긷다가 빠져 사망하게 되자 마음을 달리 먹는다. 



사실 6·25 전까지 서울국립극장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는데 두 번 다 극단 신협이 맡았음만 보아도 신협의 활동상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레퍼토리인 정비석 원작 이광래 각색인 <청춘의 윤리>와 윤방일이 이끌던 '극협'에서 사르트르 원작인 <더러운 손>, 훗날 <붉은 장갑>으로 개명되어 부산에서 공연된 이 작품을 연습하던 중 6·25 전쟁을 맞게 된다.


어쨌거나 이광래는 자신보다는 단원(배우)을, 단원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요, 극작가요, 연출가였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동가식서가숙은 다반사요, 작품 집필마저도 거의 집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비일비재였다. 실로 처참, 그것이었다. 이 무렵 이광래 스스로 표백한 글을 살펴보면 얼마나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951년 극단 신협이 대구문화극장(4월 16~20일)과 부산극장(4월 26~5월1일)에서 상연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면서 그 팸플릿에 쓴 글에서 <수전노>의 번역자인 김광주 씨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태의 글이다.


"광주형, 오랜만에 지기의 벗을 만났습니다. 그는 대단한 청색 애호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의 캔버스는 황색계열로 변해가고 있더군요. 그래서 기왕이면 새까많게 칠해 버리라고 제의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의 아틀리에에도 검은 장막이 꼭 드리운지 오래입니다. 천장에 뚫어놓은 채광창으로는 곧잘 광선이 스며들던 곳입니다.


훨씬 더 높이 푸른 창공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름도 날고 새도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될라치면 명멸하는 별들이 반짝반짝 깃들었습니다. 한국전쟁 후로는 비행기도 곧잘 날더군요. 그러나 이 채광창은 흑막을 꽁꽁 닫아버리고 말았단 말이에요. 왜냐구요? 배가 부르니까 하늘이 푸르더군요. 배가 고프니까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노란 것이 지나치니까 새까맣게 되더군요. 이런 생리적 현상을 체험하신 분은 내 정신적인 현상도 이해하실 줄 압니다. 진실로 새까맣습니다. 그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고향(마산)을 지척에 두고도 대구와 부산에서 떠돌기(피란) 생활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생계를 걱정해야 하면서도 광래는 끝내 고향을 찾지 않았다. 복혜숙, 김영옥, 김동원 등 수많은 연극인들이 고향 마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도록 고향의 친지들에게 거주지를 알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고향을 찾지 않은 오직 하나의 이유가 고향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손톱만치라도 폐끼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집도 사랑하던 막내딸 순숙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던 중 리허설장에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한 것이다. 배가 고파 대신 물배라도 채우려던 꼬마아이가 우물 물을 긷다가 잘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광래는 9·28 수복과 함께 서울로 간 뒤에는 우선 가족의 생존(결코 생활이 아니다)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방향전환한 것이 연극인 양성을 위한 교육계의 진출이었다. 그것이 곧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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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이북 지방에서 공산주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지방 연극인들도 자연스레 여기에 합류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끼리끼리의 우정과 이해가 합쳐져 분파의식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연극계도 이북과 이남의 두 줄기 흐름이 은근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38 이북 사람들은 서항석을, 이남 사람들은 유치진을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고정급을 주는 국립극장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연극인들에게 고정급은 생활의 안정을 의미하고, 생활의 안정은 곧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다는 등식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연극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술인은 없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내려도,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도 극장은 관객이 끊어지고 관객이 끊어지면 흥행이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고정급을 받는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어느 단체가 되느냐, 그리고 어느 단체가 개관 첫 공연을 갖게 되느냐에 전 연극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던 광래는 일찌감치 '신협'의 대표자리를 대선배인 유치진에게 넘겨 놓고 국립극장 창설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립극장이 창설되려 할 즈음 유치진이 극장장 자리를 한사코 마다는 것이었다.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잡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극장장은 서항석이 맡을 것이요, 서항석이 맡으면 극단 '신청년'이 전속극단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에 이광래의 용산 갈월동 유치진 선생 방문이 시작된 것이다. 요즈음처럼 택시가 흔할 때도 아니요, 버스라야 몇십분만에 한 대씩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 누상동 집에서 새벽부터 걷게 되었다. 그래야 동랑(유치진) 선생이 집을 나서기 전에 가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두어시간씩 걷자니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야 했다.


이러기를 열 엿새만에 "나라에서 극장장하라면 하지"하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말하자면 온재의 '신협'을 위한 그 정성에 동랑 선생도 감격한 것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이광래라는 연극인은 작품에 대한 열정도 어지간하겠지만 문화계의 흐름을 읽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산도 아주 뛰어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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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국 연극학회의 참여 인사는 기라성같은 대 연극인들이 거의 다 모였다. 회장에 유치진, 간사장 이광래, 간사에 홍해창, 김진수·이종일·박동근 등 다섯 사람이었다.


이들은 당면과제로 첫째, 같은 해 8월부터 방학을 이용하여 하기 연극강좌를 시행하고 둘째, 10월에는 무대예술원 산하 각 단체로 하여금 민족의식 양양 전국 연극 계몽대를 파견하기로 하고 셋째, 10월에는 6일간 시공간에서 제1회 전국 남녀대학 연극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여 그 모든 행사를 성공리에 끝마친 것이다.


극평가들도 "한국 연극 발전상 최소 30년의 시간을 단축시켰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다.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와 연극예술의 질적 향상을 위하여 한국 연극학회의 이러한 노력은 한국 연극사상 찬연한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특히 그중에서도 간사장으로서 실무총책을 지고 동분서주한 이광래의 공로는 실로 눈부신 바 있다고 하겠다.


대체로 작가는 자기 작품을 발표하고 싶은 본능적 욕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모 대학에서 이광래 작품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책 읽기(연습의 첫 단계)에 들어간다는 소문을 들은 광래는 그 대학으로 쏜살같이 달려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추천하면서 자기 작품 공연을 말린 것이다.


대회의 공정한 운영을 꾀하고 다른 모든 사람을 하나로 묶어 두기 위하여 자기의 욕심을 버린 것이다. 이러한 자기 희생정신은 국립극장 공연 때에도 우감없이 발휘된다.


1948년 7월 국무회의를 통과한 국립극장 공연법에서는 '무질서한 흥행극과 사상적인 반동분자 및 악질적인 흥행 브로커를 방지하기 위하여'라고 그 창설 목적을 밝히고 있다.그리하여 1949년 가을 국회에서 정식으로 창설령이 제정되자 그 극장 전속으로 '신협'과 '극협'의 두 극단이 지정되었다.


신협과 극협은 전술한 바와 같이 이광래가 주재한 '극예술협회'가 모태가 되어 새로이 탄생한 극단으로, 창설령이 제정되기 직전에 '신극협의회'로 바뀌고 그 구성 멤버도 거의 대부분 극예술협회 진용 그대로였다. 다만 대표자만 이광래에서 유치진으로 바뀌고 스스로 간사장이 되어 있었다.


이는 오로지 자기 자신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한 용단이었다. 왜나하면 유치진은 그때 벌써 국립극장장으로 거의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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