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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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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기억할만한 내용이 담긴 19화다. 국내 소극장운동의 씨앗이랄 수 있는 원방각운동이 이광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광래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 아쉬운 점은 소극장운동의 첨병이었던 원방각이 6회 공연을 끝으로 화재로 문을 닫고 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원방각이 제대로 소극장 운동에 성공을 이루었다면 지금 연극판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롱공연 무대나 카페연극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진 않았을까 싶은... 



이광래와 서라벌 예술학원과의 인연은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래는 1948년 한국 초창기 연극계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윤백남 선생의 권유로 예술학원에 발을 들인다. 서라벌예술학원의 설립자가 윤백남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물론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서라벌예술 학원시절에 거의 무보수로 선배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그저 강사로 출강하였지마는 이제는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2년제 초급대학) 교수로 정식 취임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초대학과장이 됨과 동시에 그 지긋지긋한 살림의 궁색함에서 약간 해방되었다.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내딸년(순숙)을 죽인 놈!" 하던 죄의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순숙을 잊기 위하여 더 무서운 집념으로 책을 읽기로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애란의 국민연극운동(민족연극운동)에 대하여 일본 와세다대학시절부터 가졌던 관심을 한충 심화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선구자 예이츠에서부터 그레고리부인의 역할, 그리고 싱그의 희곡에 이르기까지 아비극장을 중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통문화를 되찾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을 거울삼으려 한 것이다.


거기에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이른바 소극장운동이 모스크바 예술좌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소극장 원방각 운동이다. 장소는 1958년 을지로 입구에 한국 연극의 초창기 이인직이 활동하던 시절 최초의 민간극장인 원각사(1908)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원각사란 소극장을 개관한 바 있는데 이 극장에서 이광래가 뒤에서 떠빧쳐주고 그의 제자들이 앞장서 활동하게 된다.


여기 '원방각'(극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출신들이거나 학교 강사였다. 장한기(당시 서라벌 예대 강사.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주임교수 및 문화대학장, 예술대학원장 역임) 박사를 비롯하여 극작가 오학영, 일찍이 요절했지만 신예 연출가로 주목받았던 김상민, 주로 라디오 드라마에서 성우와 극작가로 활약했던 심영식(마산 3·15 1주년 기념예술제 때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에서 정도 역을 맡아 마산 관객의 열렬한 박수를 받은 바 있다), 특이한 마스크와 목소리로 성격배우의 구실을 멋지게 해낸 여배우 천선녀, 그리고 주현이란 예명으로 지금도 TV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 주상현 등이 그 핵심 멤버였다.


창립공연으로 입센의 <유령>을 이광래 연출로 상연하게 되어 한국 연극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은 전술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연출수법'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연극이란 연기를 창조하는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창조하려면 배우의 수업과 역의 완성이 필요하다.


이러자면 심리적 사실주의를 바탕한 이른바 '신체적 행동법'이 필수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출이론을 구체적으로 무대에 옮겨 새로이 이식한 사람이 이광래다. 따라서 한국연극사상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극단 '원방각'은 겨우 5회의 공연과 지방공연 1회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극장 '원각사'에 불이 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불꽃같이 타올랐던 소극장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극단 '원방각'의 공로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엔 오랜 만에 다시 이야기의 무대를 마산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 3·15의거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하여 전 시민이 자연발생적으로 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나선 데모는 끝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마산시민, 아니 지각있는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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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연극이냐 생활이냐 이것이 문제로다. 대학에서 연극 동아리활동을 했던 수많은 이들이 극단보다는 전공이든 아니든 생활을 위해 직장을 선택했던 것이 다반사였다. 나 역시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광래가 연극을 하면서 어렵게 살았다고 한다. 한국의 연극계를 이끌다시피 했던 이가 자기 몸 하나 근근이 건사할 정도였다니. 광래는 마산 출신이면서도 마산을 찾지 않았다고 한다. 가족에게 짐이 되기 싫었단다. 하지만 딸이 허기를 달래려고 우물물을 긷다가 빠져 사망하게 되자 마음을 달리 먹는다. 



사실 6·25 전까지 서울국립극장에서 두 번 공연을 가졌는데 두 번 다 극단 신협이 맡았음만 보아도 신협의 활동상을 알 것이다. 그러다가 세 번째 레퍼토리인 정비석 원작 이광래 각색인 <청춘의 윤리>와 윤방일이 이끌던 '극협'에서 사르트르 원작인 <더러운 손>, 훗날 <붉은 장갑>으로 개명되어 부산에서 공연된 이 작품을 연습하던 중 6·25 전쟁을 맞게 된다.


어쨌거나 이광래는 자신보다는 단원(배우)을, 단원보다는 극단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요, 극작가요, 연출가였다. 그러기에 그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동가식서가숙은 다반사요, 작품 집필마저도 거의 집 한 귀퉁이에서 이루어진 것이 비일비재였다. 실로 처참, 그것이었다. 이 무렵 이광래 스스로 표백한 글을 살펴보면 얼마나 생활이 아니라 생존에 허덕이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1951년 극단 신협이 대구문화극장(4월 16~20일)과 부산극장(4월 26~5월1일)에서 상연한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면서 그 팸플릿에 쓴 글에서 <수전노>의 번역자인 김광주 씨에게 보내는 서간문 형태의 글이다.


"광주형, 오랜만에 지기의 벗을 만났습니다. 그는 대단한 청색 애호가입니다. 그런데 요즈음 그의 캔버스는 황색계열로 변해가고 있더군요. 그래서 기왕이면 새까많게 칠해 버리라고 제의했습니다. 아닌게 아니라 나의 아틀리에에도 검은 장막이 꼭 드리운지 오래입니다. 천장에 뚫어놓은 채광창으로는 곧잘 광선이 스며들던 곳입니다.


훨씬 더 높이 푸른 창공이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구름도 날고 새도 날아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밤이 될라치면 명멸하는 별들이 반짝반짝 깃들었습니다. 한국전쟁 후로는 비행기도 곧잘 날더군요. 그러나 이 채광창은 흑막을 꽁꽁 닫아버리고 말았단 말이에요. 왜냐구요? 배가 부르니까 하늘이 푸르더군요. 배가 고프니까 하늘이 노래지더군요. 노란 것이 지나치니까 새까맣게 되더군요. 이런 생리적 현상을 체험하신 분은 내 정신적인 현상도 이해하실 줄 압니다. 진실로 새까맣습니다. 그것이 나의 현실입니다."


고향(마산)을 지척에 두고도 대구와 부산에서 떠돌기(피란) 생활을 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생계를 걱정해야 하면서도 광래는 끝내 고향을 찾지 않았다. 복혜숙, 김영옥, 김동원 등 수많은 연극인들이 고향 마산에서 피란생활을 하도록 고향의 친지들에게 거주지를 알선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고향을 찾지 않은 오직 하나의 이유가 고향의 친척과 친지들에게 손톱만치라도 폐끼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이었다.


이러한 고집도 사랑하던 막내딸 순숙의 죽음에 이르러서는 커다란 충격을 받는다. 전술한 바와 같이 몰리에르의 <수전노>를 연출하던 중 리허설장에서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서 졸도한 것이다. 배가 고파 대신 물배라도 채우려던 꼬마아이가 우물 물을 긷다가 잘못하여 우물에 빠져 죽은 것이다. 그리하여 광래는 9·28 수복과 함께 서울로 간 뒤에는 우선 가족의 생존(결코 생활이 아니다)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방향전환한 것이 연극인 양성을 위한 교육계의 진출이었다. 그것이 곧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교수로 부임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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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이북 지방에서 공산주의 탄압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남하한 이북지방 연극인들도 자연스레 여기에 합류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지면 끼리끼리의 우정과 이해가 합쳐져 분파의식이 싹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인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은 아니지만 한국 연극계도 이북과 이남의 두 줄기 흐름이 은근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38 이북 사람들은 서항석을, 이남 사람들은 유치진을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다. 여기에 나라에서 고정급을 주는 국립극장이 탄생한 것이다.


사실 연극인들에게 고정급은 생활의 안정을 의미하고, 생활의 안정은 곧 좋은 연극을 할 수 있다는 등식은 지금과 다를 바 없다. 더욱이 연극인만큼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예술인은 없을 것이다. 비가 많이 와도, 눈이 많이 내려도, 폭풍우가 거세게 불어도 극장은 관객이 끊어지고 관객이 끊어지면 흥행이 안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고정급을 받는 국립극장의 전속 극단이 어느 단체가 되느냐, 그리고 어느 단체가 개관 첫 공연을 갖게 되느냐에 전 연극계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예견하고 있던 광래는 일찌감치 '신협'의 대표자리를 대선배인 유치진에게 넘겨 놓고 국립극장 창설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국립극장이 창설되려 할 즈음 유치진이 극장장 자리를 한사코 마다는 것이었다.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잡무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만약 그렇게 되면 극장장은 서항석이 맡을 것이요, 서항석이 맡으면 극단 '신청년'이 전속극단이 될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었다.


이에 이광래의 용산 갈월동 유치진 선생 방문이 시작된 것이다. 요즈음처럼 택시가 흔할 때도 아니요, 버스라야 몇십분만에 한 대씩 오는 것을 기다릴 수 없어 누상동 집에서 새벽부터 걷게 되었다. 그래야 동랑(유치진) 선생이 집을 나서기 전에 가서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새벽부터 두어시간씩 걷자니 그 좋아하던 술도 끊어야 했다.


이러기를 열 엿새만에 "나라에서 극장장하라면 하지"하는 대답을 들은 것이다. 말하자면 온재의 '신협'을 위한 그 정성에 동랑 선생도 감격한 것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을 읽다 보면 이광래라는 연극인은 작품에 대한 열정도 어지간하겠지만 문화계의 흐름을 읽고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는 계산도 아주 뛰어난 것 같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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