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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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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연극의 선구자들이랄 수 있는 이광래, 김수돈, 정진업 이런 사람들이 극단 민예 활동 중 일어난 일화.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번씩 거짓말로 상대를 골려주고 했을 것 같다.




이광래·김수돈·정진업에 얽힌 일화다. 8·15광복의 기쁨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 1945년 세모가 가까운 어느날 충남 강경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강경은 유동인구가 정주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상품거래가 많았던 곳이어서 권번(기생이 대기하면서 요리점에서 부르면 주변에 나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절과 춤과 노래를 교습받던 곳)도 있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강경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초만원을 이운 가운데 무사히 끝났다. 막이 내린 뒤 분장실로 돌아가 보니, 월초 정진업에게는 그곳의 권번에서 정중히 초대한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사실 크레이그가 말한 대로 '연극은 연출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극에서의 연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존대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연출 따위야 아랑곳없고 주연 남우나 주연 여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월초에게만 초대가 있었던 것이다.


월초는 연출가 이전에 고향의 선배요, 친구인 온재와 화인에게는 살며시 행방을 알리고 초대에 응했다. 월초를 홀로(?) 보내놓고 온재 선생을 모시고 대폿집에서 쓸쓸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화인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찮았다. 그래서 화인은 온재 선생을 모시고 월초가 초대받은 요정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진업, 진업(화인은 언제나 월초를 그렇게 불렀다) 어디 있는가?" 몇 번을 불렀다고 한다. 월초는 꽃으로 둘러싸인 이 화원에 잡인(?)이 섞이는 것을 꺼려 못들은 첫하다가 하도 다급한 부름에 방문을 열고 내다 보니 "큰일 났네. 자네 부인이 위중하다는 기별이 왔네. 어서 가 볼 차비를 하게"라고 근심어린 표정으로 화인이 말하지 않는가.


그렇잖아도 병약한 신부를 고향에 두고 온 월초로서는 남모르게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우직하리만큼 고지식하고 순수한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에다 헌칠한 키의 미남 배우인 월초의 눈망울에 눈물이 핑 번지는 것을 본 기녀들도 덩달아 입이 삐죽삐죽해지자 미리 화인과 약속이 되어 있던 온재도 한마디 거드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 고향에 다녀오게. 자네가 맡은 역은 내가 대신 함세..." 라고 말하자 월초는 황송해 하면서 굽신굽신하는 것이었다. 기녀들이 보아하니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 있다더니 그렇게 선망하고 존경하고 사모하던(?) 주연 배우를 명령하고 타이르는 연출 선생(두 사람 다 체구는 작았지만)의 존재에 새삼스레 경탄과 존경의 뜻을 나타내면서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새벽녘이 이슥해서야 숙소(여관)로 돌아온 뒤 그간의 경위를 알게 된 월초가 화인을 때려죽인다고 또 한번의 희극(?)이 연출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쨌거나 곡절 많은 해방 직후에 극단 '민예'는 제 목소리를 꾸준히 외치다가 전술한 바와 같이 프락치 사건 때문에 1947년 11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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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전엔 지금보다 전국 순회공연 다니는 것이 훨씬 더했다. 악극단이 순회공연을 펼쳤듯이. 지금이야 서커스란 게 거의 형태를 감췄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서커스가 열리는 지역에는 동네가 시끌벅적했단다. 1960년대에 태어난 나도 그런 서커스 공연을 들어가서 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얼쩡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만 한 번도 연극을 그렇게 순회공연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해도 연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2 때 교회에서 친구들이 연극을 해보자며 내게 어쩌면 일방적으로 맡겨버리는 바람에 대본 쓰고 연출을 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숫기가 없고 연기력이 딸리니까 배우 하지말고 연출을 맡겼을 수도 있겠다.


또 샜다. 지금에야 보고싶은 연극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지역의 문화 수요자를 위해 많은 극단이 지역 또는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게 한때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드러나긴 했는데.. 이젠 지역의 극단들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광복 즈음, 이광래가 이끌던 '민예'는 어떻게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을까. 오늘 이야기는 한하균 오동동야화 12번째 이야기를 베껴 써본다.



극단 '민예'는 민족정기를 바타응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반탁운동의 기치를 높이 흔들면서 1945년 10월에 조직되었다.


신재현, 맹만식, 송재로, 박상익, 남궁연, 김득순(김감순은 오류), 유해초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단장은 물론 이광래였다. 사무실은 종로 베카리 음식점 2층에 두고 1947년 늦가을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의 각 지역을 순회 공연하다가 조선 연극 동맹(좌익)의 프락치 사건으로 분열이 생겨 해산하기에 이른다. 프락치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KAPF파의 효장 임화(시인 소설가)의 처가가 마산이다. 마산 이상조의 여동생 숙희가 그의 처다. 그녀는 훗날 지하련이란 예명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하는데, 폐병으로 가포 결핵요양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임화와 알게 되어 둘이 연애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임화가 해방이 되자 좌익 예술인의 핵심 멤버로 설치고 다녔는데 극단 '민예'만이 그들의 노선과 달리하고 있어 눈엣가시처럼 고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민예의 대표인 이광래가 처가의 먼 친척뻘이 되는 것을 알고, 처가를 매개로 하여 협박도 해보고 달래기도 해 보았으나 이광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극단 '민예'에 프락치(그 사람은 지금도 생존해 있으므로 성명을 밝히지 않겠다, 2000년 기준)를 넣어 정보를 빼냈을 뿐 아니라 와해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그 당시 돈으로 쌀 한가마 12원 할 때 공작금이 400원 가까이 소요되었다니 얼마나 공작이 치열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예가 창단되던 무렵에는 마산과는 여러 가지로 겹친 인연이 있었다. 일제 말기의 황금자 시절에 월초 정진업이 중견배우로 활약하였다 함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그는 영양실조 끝에 조막염에 걸려 오래도록 병상에서 치료하다가 해방의 감격과 함께 서울로 가서 민예에 입단, 주연 배우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게 된다.


곧 뒤따라 서울로 간 화인 김수돈은 연출부에 배속되어 이광래의 훈도 아래 조연출로 맹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산 사람 셋이 중심이 된 극단 '민예'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상연된 대표적인 작품은 김동인 작 이광래 연출의 <젊은 그들>을 비롯해 김형활 각색 이광래 연출의 <카츄샤>, 이광래 작 연출 <청춘의 애정>, 이광래 작 연출 <박쥐의 집> <독립군> <백일홍 피는 집> <최후의 밤> <어머니의 모습> <청춘의 정열> <청춘산맥> 등으로 수많은 작품을 밤마다 바꿔가며 공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합포성을 대표할 만한(?) 이 세 분의 예술인들이 한솥밥을 먹기는 필자가 알기로, 극단 '민예' 생활이 최초요, 최후가 아니었나 싶다.


연극과 문학과 술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은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가지가지 이야기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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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지하련의 이름이 '숙희'로만 나오는데 숙희는 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이다. 그의 셋째 오빠 이상조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단지 임화와 일찍 알고 지냈고 전향 문제로 투옥되었다는 사실 정도. 지하련이 살던 산호리 집은 지금도 용마고 뒤편에 있는데...지난해 말인가 불이 났다고... 헐리기 전에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찾아가보지 않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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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을 비롯한 경남이야 워낙 구석구석 많이 돌아다녀 봤기 때문에 어딜 가도 거기서 거기란 생각이 드는 반면 생애 처음으로 갔던 광주는, 광주사람에게야 익숙해서 존재감마저 없을 수 있겠지만 난 타지 사람이다 보니 발길 닿는 곳, 눈에 비친 곳 모두가 새롭고 호기심을 자극한다.


연수라는 프로그램은 타지를 여행할 수 있는 좋은 핑곗거리기도 하다. 당일 오후 집에 일만 없었다면 1박 더 하면서 광주 곳곳을 돌아다녔을 수도 있겠다 싶다. 다른 구경거리는 다음으로 미루고서라도 연수 마치고 점심식사를 했던 돼지갈비 맛집 나정상회에서 가까운 5.18자유공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남신문의 권태영 기자도 창원으로 되돌아가는 버스 같은 걸 타기 때문에 함께 움직였다. 아, 알고봤더니 권 기자와는 광주로 올 때도 같은 버스를 타고 있었다. 그것도 내 바로 앞좌석에. 그걸 모른채 2시간 반을 타고 있었단 얘기다. 하긴 나도 버스만 타면 고개 처박고 스마트폰에 퐁당 빠지는 스타일이라...



5.18자유공원 입구. 리플릿을 보니, "1980년 5월 18일 민주화운동 당시 정권찬탈 기도하던 일부 정치군인들의 강경진압에 맞서 우리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싸우신 분들이 구금되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으로, 원래의 위치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원형으로 복원, 재현하였다. 드높은 민주화 의지와 젊은 열정으로 불의에 항거했던 투쟁의 자취요, 인권 평화 화합의 상징으로 기억될 역사의 현장이다." 라고 적혀 있다.



5.18자유공원은 자유관(영상, 전시실), 헌병대 중대 내무반, 헌병대 본부ㅏ무실, 헌병대 식당, 영창, 법정, 들불열사 기념비로 구성되어 있다.주소는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평화로 13(치평동)



실물 크기로 당시 모습을 재현한 조형물.



당시로 치면 연병장 쯤 되겠다.



헌병대 본부 사무실. 들어서면 영상이 켜지며 당시의 모습을 설명해준다.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였던 이곳은 시내에서 계엄군에게 끌려온 시민들을 조사했던 곳이다. 수사관들은 조사하기 전부터 무조건 진압봉으로 무자비하게 구타하여 시민들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바로 옆에서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되는 장면을 지켜본 연행당한 사람들은 구타를 당하지 않기 위해 허위자백이라도 해야 했다.


옆방에서 고문당하는 사람들이 지르는 신음과 비명은 끌려온 시민들에게 공포감을 주었다. 책상 위에는 굵은 곡괭이자루, 송곳 등이 높여 있어 수시로 매질을 하고 송곳으로 손톱 밑을 찔러대는 만행을 저질렀다.


아... 타이핑을 하는 중에 왜 이렇게 손톱 밑이 아플까. ㅠㅠ



35년 전 많이 보던 장면.... 음... 많이 당하기도 했던... 갑자기 슬퍼지려하네.ㅠㅠ



헌병대 식당. 원래는 그랬는데 5.18민주화운동 당시엔 시민군 연행자들에 대한 고문, 조사를 하던 취조실로 사용됐다고.



취사실은 물고문 장소로 활용. 수사관들은 잡혀온 시민들에게 매일같이 자술서와 진술서를 쓰게 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틀리면? 내용이 마음에 안들면이겠지... 온몸이 피법벅이 되도록 구타했다고.



이렇게 말이야.



이곳은 영창이다. 당시 상무대 헌병대 영창이라고 불렸던 곳인데 일부 정치군인들의 정권찬달에 맞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분들이 구금된 곳이라고. 이곳으로 강제 연행된 시민들은 폭도라는 누명을 씌워져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의 온갖 고문에 시달려야 했다. 


하루에 16시간을 정좌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단다. 영창의 구조가 반원으로 되어 있어 감시 데스크에 앉으면 모든 영창 내의 움직임이 한눈에 관찰되는 형태다.



방 하나에 몇 명이 들어갈 수 있을까. 안내장을 보니 많게는 150명이 수감되었다고 하는데... 헐. 이 공간에 150명이라니... 그야말로 콩나물시루였겠다. 수감자들은 1980년 10월 27일 광주교도소로 이감될 때까지 이곳에 구금되어 있었단다.



당시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구속자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곳. 1980년 8월 5.18군사재판을 위해 지어졌다고 한다. 당시에 군사재판의 진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으려고 법정에 총으로 무장한 헌병을 배치시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한 가운데 비공개 약식재판을 진행했단다. 그러자 구속자들은 재판 시작 전부터 부당한 군사재판에 대한 항의표시로 소리높여 애국가를 불렀다고. 그래, 애국가는 이런 때에 부르는 거야.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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