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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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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육혈포강도> <사나이답게 싸워라>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으로서는 치명적인 나쁜 버릇이 생겨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무대 위에 서기만 하면 무의식 중에 발작해버리는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그것은 바로 '쿠세'라는 일본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연기자마다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월초에게는 '신파근성'이라는 못된 버릇을 지니게된 것이다.


대체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언제나 주제의식을 머리 속에 머금고 상대 역과 호흠을 맞춰야 하는 법인데 리허설할 때는 앙상블을 잘 맞추다가도 무대에 서면 자기 혼자만 관객(물론 저질관객이다)에게 박수세례를 받는 신파 연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대본을 미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만 받아서 연습했기 때문에 생기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이런 버릇은 '사랑하는' 제자와 공연할 때도 어김없이 발작(?)했다. 


1962년 12월 하유상이 쓰고 필자가 연출한 <고래>를 공연할 때도(이 대목은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주인공 고래 역은 월초가, 상대역인 화산댁 역은 조두이 여사가 맡았는데 평소 사생활에서나 리허설 중일 때는 제자인 조두이 여사를 남이 보면 부러워할 만큼 존중하고 아끼시던 분이 무대에만 서면 전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필자가 막이 내린 뒤 대선배이신 월초에게 대들라치면 "한군, 다시는 오버 액션 안 할게. 한번만 잘 봐 다우"하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나쁜 버릇도 처음 연극을 배운 데가 신파극단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일년 쯤 김삿갓처럼 방랑생활을 하던 중 마산으로 돌아와보니 경남 무용계의 개척자 김해랑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아니면 풍각쟁이가 될 텐가?"

"어디 좋아서 유랑 극단에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김해랑 선생은 "내 친구 홍근(광래)이를 소개해 줄테니 서울로 가보게"하고 간곡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9월에 드디어 서울(경성)로 가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도하 각 신문에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거의 날마다 기사화되었듯이 월초도 그야말로 무용가 김해랑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이광래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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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오늘날에 와서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니 뭐... 할말이 없다.




1934년 3월(당시는 학년말이 3월이었다)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월초는 처음으로 사회의 냉엄함을 체험하게 된다.


"졸업을 하자 금융조합의 서기 시험을 치러 갔지만 멋지게(?) 낙방을 하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압력에 못이겨 갔었지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학이나 예술을 전공하는 학업을 지속하느냐 하는 그 일념뿐이었다"('나의 문단 올챙이 시절')고 말한 바 있듯이 꿈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지 못하고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등룸펜'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1934년 10월에 '극예사'에 입단하게 된다. 극예사는 전술한 바 있듯이 1932년 7월에 창당된 마산 신극 최초의 극단인 셈이다. 창단 당시는 주동자가 김여찬, 이훈산 등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매료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 공연 작품들은 자연스레 일본 제국에 대하여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록으로는 구체적인 레퍼토리가 남아 있지 않지만 서너 차례의 공연 중 공연 중지가 두 번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월초가 입단했을 때는 전기 김여찬, 이훈산(훗날 옥사했다고 함) 등은 떠나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신파연극을 하던 천전막이 대표가 되어 극단의 색깔이 친일로 변색되어 있었던 무렵이었다.


옛날 뜻을 같이 했던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아 있는 몇 사람과 이리저리 급하게 모은 사람들로 연기진을 구성하는데 월초에게 주어진 역은 '일인이역'의 단역(연기진을 3대별 하면 주연, 조연, 단역으로 나뉨)이었다. 하나는 개막과 함께 등장하는 전보배달원 역이었고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상점점원 역이었다. 그런데 (월초는) 그 작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대본)을 연기자에게 미리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역의 대사만 적은 쪽지를 나누어 줬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요즘의 한 작품 공연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보면 '스태프 및 연기진에게 대본 나눠주기→연출회의(작품의 주제와 성격과 분위기와 색깔을 토론하고 각 스태프에게 지시한다)→액션(대사에 따른 동작연습)→총연습(공연과 꼭 같이 무대 위에서 조명·효과장치 등을 마련해 놓고 연습함)→공연' 대체로 이런 순서가 되겠는데 옛날 신파 연극 시대에는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 아래 액션 연습 몇 번 하고 바로 공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사 연습 따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 연기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월초도 작품 제목과 주제도 모르면서 액션 연습 두어 번 하다가 극단이 경비난으로 해체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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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관원도진>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섭취한 영양소(?)를 바탕으로 월초 선생은 마산성고 교지에 <가지>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경남도문예전시회에 입선되어 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학우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자 문학에만 매달려 있을 월초가 아니었다.


극장에까지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1930년대 초)는 일반인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영화를 상영하려면 영화 상영에 앞서 해설자가 먼저 관객 앞에 나서서 그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함께 주연 배우의 연기까지도 미리 간략하게 해서래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내레이터를 용돈 몇 푼 받고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극장,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의 옛이름이 공락관이요, 그 공락관의 앞선 이름이 고도부키좌였다. 이 고도부키좌의 내레이터로 월초 선생이 채용된 것이다.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라고나 할까. 물론 텍스트는 당시 발행되던 <에이가노 토모>라는 영화전문지였지만 거기ㅏ 월초 자신의 느낌도 덧붙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상영 프로는 마르세르 카르네 감독의 <안개 낀 부두>인데 주연인 장가벵의 표정을 해설하는 대목은 참으로 천하일품이었다. 


"그 조용한 박력, 완만하지만 단순한 움직임, 엷은 입술에서 번져나는 빙와 공포의 그림자,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눈망을에 감겨드는 서글픔, 그리고 철학서적이 한 권씩 깔리는 듯한 둔중한 걸음걸이를 관객 여러분은 특히 눈여겨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우레같은박수가 쏟아졌으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박수에 굿쟁이(연극인)는 언제나 신이 나는 것이다.


월초 선생이 한참 으쓱해진 기분으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마산상고 훈육담당(오늘날의 학생부) 아라다 교사였다. 학생 신분이 탄로난 월초는 그날로 즉시 극장주로부터 해고당하였고 학교에서는 4주간 유기 정학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생은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무렵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가 날마다 벌 청소와 근로봉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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