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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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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놓았으니 자신의 작푸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공연하자는 것이요, 화인은 시간만 넉넉하다면 전폭적으로 창선하겠지만 문제는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마산이 낳은 극작가요 연출가인 이광래 선생에게 일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초는 폐업(?)하고 집에 칩거하여 일을 거들지 않으니 화인이 나를 부른 것이다.


두 분 다 나에게는 대 선배라 어느 편을 들기도 거북하여 실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것이다. 백고천난 끝에 두 분을 화해시키고 화안과 나는 일약 서울로 가기에 이르렀다. 마산시장 전용차로 부산 수영 공항(당시는 부산공항이 수영이었다)으로 직행한 우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할 때 수튜어디스가 우리를 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만 하더라도 비행기 승객은 말쑥한 옷차림에다 무슨 선민의식으로 도색한 표정을 가다듬고 있어야 할 텐데 머리카락은 갯바람을 맏아 춤추듯 너울거리고, 까만 세루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까만 색깔이 아니라 차라리 하얀 빛깔이라 해야할 만큼 막걸리가 온 두루마기에 묻어 있었으니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에 내린 화인과 나는 종로 5가에 있는 '현대문학사'로 먼저 찾아갔다. 이광래 선생댁의 주소를 알기 위해서였다. 누상동 이광래 선생댁은 물론 서라벌예대로, 국립극장(당시는 명동에 있었다)으로, 그 옆 골목에 있는 은성(최불암 씨의 선비가 경영하던 술집)으로 마구 서울 장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돈암동에 있는 방공호집(시인 구상·조지훈·박목월, 화가 김환기·이중섭 씨 등이 자주 모이시던 술집)에서 온재 선생을 뵈옵게 된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셨던 온재 선생께서도 고향 마산의 3·15 1주년 기념공연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단박에 눈에 형형한 안광이 빛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공연 날짜를 손꼽아 보시더니 "어쩔 수 없네. 리바이벌이야"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작품을 상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서라벌 예대에서 리허설용으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원용하여 고영ㄴ한 바 있는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을 레퍼토리로 선정하고 마지막 손질을 더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강남극장에서 개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마산의 관객은 대배우 중심의 화려하고 박력있는 연극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이 아닌 잔잔한 감동에는 그다지 큰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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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극단 상상창꼬 <매직가게>

715일 오후 7시 함안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공연

 

마술가게라는 간판이 걸렸지만 판매하기 위한 옷들이 진열된 평범한 옷가게다. 조명이 밝아지면 점원이 마네킹을 들고 나온다. 쇼윈도 앞에 세우고 옷을 입힌다. 팔등신의 늘씬한 마네킹만 있는 게 아니다. 임신부 의상을 위한 배가 볼록한 마네킹도 있다. 점원이 나가자 마네킹들이 불만을 털어놓는다. 쉬지도 못하게 한다며. 그런데 옆 가게 알바 녀석들이 쇼윈도 앞으로 다가와 담배를 피운다. 이 녀석들 여기서 그치는 게 아니다 마네킹 치마 밑을 들여다 보려고 낑낑대고 킬킬댄다. 마네킹들은 혼이라도 내주고 싶은데 아직은 인간의 시간이라 움직일 순 없고 불평을 늘어놓는 가운데 밤이 된다.


드디어 가게 이름처럼 판타스틱한 일들이 펼쳐진다. 마네킹들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들은 매장 안을 돌아다니며 인간들의 나쁜 습성에 대해 흉을 본다. 그런데 갑자기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재빨리 제자리로 돌아간 마네킹들. 불도 켜지 않고 실내로 들어온 것을 보면 필시 도둑이 든 것이다. 그런데 이 도둑, 뭔가 이상하다. 마네킹과 춤을 주지 않나, 진열장의 옷을 고르기도 하고 하물며 술병까지 꺼내서 들이키기도 한다. 도둑이 아닌가?


그런데 그 순간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일순 긴장감이 객석을 메운다. 아무리 여유를 부려보지만 도둑인 이상 이런 순간에는 진땀을 흘리게 마련이다. 고양이 발걸음으로 살며시 들어오는 남자. 손전등을 들고 더듬거리며 들어오는 모양새가 한눈에 척 봐도 초보 도둑이다.


선배 도둑과 초보 도둑은 이렇게 상견례(?)를 하게 되는데 서로 정체를 파악하고는 마음이 놓였나 보다. 때론 형님, 동생 했다가 때론 배신자로 여겼다가 옥신각신하며 날을 샌다. 이들이 이야기하는 도둑이 되어야 했던 이유, 도둑으로서 가져야 할 철학은 그대로 부조리한 인간세상을 향한 일침이 되고 만다.


이번 공연은 우수예술단체 찾아가는 문화활동사업으로 진행되며 이상범 원작의 <마술가게>를 김소정 연출이 각색했다.(문의: 070-8832-8801)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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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기억할만한 내용이 담긴 19화다. 국내 소극장운동의 씨앗이랄 수 있는 원방각운동이 이광래에 의해 진행되었다는 점, 그리고 이광래가 스타니슬라브스키 연기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점. 아쉬운 점은 소극장운동의 첨병이었던 원방각이 6회 공연을 끝으로 화재로 문을 닫고 재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당시 원방각이 제대로 소극장 운동에 성공을 이루었다면 지금 연극판의 지형도 많이 바뀌었을 거란 생각이 든다. 살롱공연 무대나 카페연극이 사람들에게 소소한 재미를 주진 않았을까 싶은... 



이광래와 서라벌 예술학원과의 인연은 훨씬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광래는 1948년 한국 초창기 연극계의 개척자 중의 한 사람인 윤백남 선생의 권유로 예술학원에 발을 들인다. 서라벌예술학원의 설립자가 윤백남 선생이셨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물론 문교부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서라벌예술 학원시절에 거의 무보수로 선배의 일을 돕는다는 차원에서 그저 강사로 출강하였지마는 이제는 (1953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2년제 초급대학) 교수로 정식 취임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초대학과장이 됨과 동시에 그 지긋지긋한 살림의 궁색함에서 약간 해방되었다. 술만 취하면 입버릇처럼 되뇌이던 "내딸년(순숙)을 죽인 놈!" 하던 죄의식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탈피하지는 못하였다. 그래서 순숙을 잊기 위하여 더 무서운 집념으로 책을 읽기로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애란의 국민연극운동(민족연극운동)에 대하여 일본 와세다대학시절부터 가졌던 관심을 한충 심화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였다. 선구자 예이츠에서부터 그레고리부인의 역할, 그리고 싱그의 희곡에 이르기까지 아비극장을 중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전통문화를 되찾는 아일랜드 사람들의 정신을 거울삼으려 한 것이다.


거기에다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이른바 소극장운동이 모스크바 예술좌 연구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소극장 원방각 운동이다. 장소는 1958년 을지로 입구에 한국 연극의 초창기 이인직이 활동하던 시절 최초의 민간극장인 원각사(1908)의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원각사란 소극장을 개관한 바 있는데 이 극장에서 이광래가 뒤에서 떠빧쳐주고 그의 제자들이 앞장서 활동하게 된다.


여기 '원방각'(극단)에 참여한 사람들은 서라벌 예술대학 연극영화과 출신들이거나 학교 강사였다. 장한기(당시 서라벌 예대 강사.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주임교수 및 문화대학장, 예술대학원장 역임) 박사를 비롯하여 극작가 오학영, 일찍이 요절했지만 신예 연출가로 주목받았던 김상민, 주로 라디오 드라마에서 성우와 극작가로 활약했던 심영식(마산 3·15 1주년 기념예술제 때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에서 정도 역을 맡아 마산 관객의 열렬한 박수를 받은 바 있다), 특이한 마스크와 목소리로 성격배우의 구실을 멋지게 해낸 여배우 천선녀, 그리고 주현이란 예명으로 지금도 TV에서 활약하고 있는 중견 탤런트 주상현 등이 그 핵심 멤버였다.


창립공연으로 입센의 <유령>을 이광래 연출로 상연하게 되어 한국 연극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그것은 전술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에 의한 '새로운 무대와 새로운 연출수법'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새삼스럽지만 연극이란 연기를 창조하는 배우의 예술이기 때문에 배우의 연기를 창조하려면 배우의 수업과 역의 완성이 필요하다.


이러자면 심리적 사실주의를 바탕한 이른바 '신체적 행동법'이 필수적 요건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스타니슬라브스키의 연출이론을 구체적으로 무대에 옮겨 새로이 이식한 사람이 이광래다. 따라서 한국연극사상 하나의 큰 획을 그었다고 일컬어지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극단 '원방각'은 겨우 5회의 공연과 지방공연 1회로서 그 막을 내리게 된다.


왜냐하면 극장 '원각사'에 불이 나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불꽃같이 타올랐던 소극장 운동의 씨앗을 뿌렸다는 점에서 극단 '원방각'의 공로는 결코 가벼이 할 수 없을 것이다.


다음 주엔 오랜 만에 다시 이야기의 무대를 마산으로 옮겨야 할 것 같다. 3·15의거 부정선거에 항의하기 위하여 전 시민이 자연발생적으로 독재정권을 규탄하고 나선 데모는 끝내 4·19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음은 마산시민, 아니 지각있는 국민이면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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