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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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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의 마지막 이야기일 듯하다. 1968년 사망 때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니. 이광래에 대한 인상적이 이야기가 나왔다. 개천예술제 심사위원으로 오랫동안 참여했는데, 한 번은 심사 노트를 변기에 빠트렸는데, 그 노트를 건지기 위해 똥을 다 퍼낼 정도였다고 한다. 그래서 건진 노트를 물로 헹궈내고 다른 노트에 옮겨 적기를 꼬박 하루동안 작업을 했다고 하니 성격이 독특하달 수도 있겠다. 그런데 사실 나도 좀 그런 류의 인간형이긴 하다. 언젠가 한 번 한 시간여를 열심히 썼던 일기가 갑작스런 정전으로 날아가버렸는데.... 다른 건 몰라도 내가 기록했던 것이 사라지는 것에는 어찌 그리 애통하던지.



그런데 광래는 <기류의 음계>를 발표하면서 '작의'를 먼저 덧붙인 것이다. 약간 장황하지만 그의 실험정신을 탐색한다는 뜻에서 여기 소개하고자 한다.


"의식의 흐름이 오늘같이 혼잡한 때가 있었던가? 또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잡다한 불협화음계가 소연한 가운데 현대의식은 갈피를 차리지 못하고 광망한다. 작자는 이러한 상황을 상징하여 '기류의 음계'라 정하였다. 그리고 '기류의 음계' 아래 이율배반적으로 분열하고 갈등하는 현대의식의 생태를 분석하여 의지적·정열적 변화의 경과를 내험하는 현대의식의 비장미를 시각적으로, 공간적으로 구상화해 보려고 한다.(중략) 그러므로 의식작용을 화술에만 의존하지 않고 의식의 요소를 구체적으로 직관케 하기 위하여 작중 박환기의 인물을 3인으로 등장시켜 각각 지·정·의를 분탐케 하였다. … 실제인물로서 의식의 요소를 분탐케 하는 작의를 연출자와 연기자들이 잘 이해해주기 바란다."


8·15광복 전 현진건의 <무영탑>을 각색하면서 등장인물의 심상의 세계를 직관하게 하기 위하여 이미 시험해 본 바를 다시금 가다듬고 정리하면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려한 것이다. 1958년 11월 18일부터 3일간 진주극장에서 공연된 이 작품은, 물론 이광래 자신의 작품을 스스로 연출하면서도 한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마치 신에게 기도하는 자세로 온 정성을 다 쏟아부었으며, 특히 60년대 혜성처럼 나타났다 아깝게 요절한 탤런트 이우평 씨의 연기는 참으로 압권이었다."고 조연출을 맡았던 정인화 씨는 회고하고 있다. 


사실 광래는 일상생활, 특히 술자리에서의 생활태도는 거의 상궤를 벗어나고 있었다. 따라서 웬만한 약속 따위는 하지 않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상식(?)이었다. 왜냐하면 약속을 해 보아야 아무 쓸모가 없으니까…. 그런데 연극과 관계되는 약속은 아무리 취중이라도 한치의 오차도 없었다. 약속을 어기는 사람이 도리어 혼이 나곤 했다.


가령 진주 영남예술제 때(1953년)부터 개천예술제로 이름이 바뀐 1968년 작고하던 그해까지 딱 한차례(54년에는 동랑 유치진 선생이 참석하셨다)만 빼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심사위원으로 참석하신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심지어 돌아가신 그해 1968년에는 서라벌예대에 병가(당뇨병)로 휴직원까지 제출해 놓은 상태에서도 심사위원으로 참석했으며, 또한 10월 29일 유명을 달리하셨는데 돌아가시기 열흘 남짓 전인 12일부터 16일까지 심사석에서 미동도 하지 않고 버티신 이야기는 지금도 후배나 제자들의 귀감으로 전해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심사를 하실 때는 절대로 대충대충 머리로 하지 않고 심사노트를 바탕으로 하여 과학적으로 평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한 작품에 대한 심사 메모는 적어도 국판노트 56쪽을 넘었다고 한다. 이 심사 메모를 모아 놓은 노트를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다가 빠트린 일화는 지금도 연로한 진주예술인들 사이에는 유명한 이야기로 남아 있다. 그 오물을 다 퍼내고 건져서 깨끗한 물에 씻어 새로이 정리하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고 한다. 이 위대한(?) 작업을 진두지휘하였던 당시의 예술제전 사무국장 한동렬 씨는 지금도 혀를 내두르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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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주현이 1958년 당시마산에서 김수돈 정진업 이런 양반들과 함께 공연을 했구나. 이즘 이광래는 드라마센터 상임이사를 맡으면서 동시 동국대 교수까지 맡아 자신의 연극론을 본격적으로 펼쳤단다. 그의 연기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에서 더 한발 나아가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했다는데 그는 이 연출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고 한다. 행간에서 연구하는 연극인의 자세가 엿보인다.




마산에서의 공연 얘기를 덧붙인다.


익살스런 장서방 역을 맡은 주현의 코믹한 연기, 고뇌를 씹어삼키면서도 조용히 결의를 다지는 정도 역을 맡은 심영식의 그 처절한 표정 연기, 그리고 자비로우면서도 보다 큰 일을 위한 용단을 내리는 어머니 역을 맡은 천선녀의 그 중후한 연기. 이렇게 절묘한 앙상블을 이룬 보기 드문 공연이었는데도 마산의 관객은 그걸 몰라주는 것이었다.


공연이 끝나고 쫑파티(공연 자축 겸 합평회) 석상에서 온재 선생의 대갈일성이 터졌다. 


"화인·월초 두 사람은 잘 들어. 관객이 없는 연극이 있을 수 있나? 지금이 홍도야 울지마라 시대인가? 마산 관객을 이렇게 팽개친 것은 물론 고향을 오래도록 떠나 있는 내게도 책임이 없다고는 안 해. 허지만 고향을 지키고 있는 자네들이 때때로 연극을 했다면서 관객을 18세기 시대에 이렇게 팽개쳐두고도 무슨 예술가로 자처하고 있는가? 책임을 느끼게 책임을."


그날 저녁 오랜만에 세 사람의 선후배는 밤새워 술을 마시면서도 마산의 연극 부흥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1958년엔 이광래의 일생에 변화가 온다. ITI(국제극예술협회) 한국지부 이사를 거쳐, 1960년에는 평생을 두고 고락을 같이 해 온 동랑 유치진의 청탁을 흔쾌히 수학하여 드라마센터(한국연극연구소) 상임이사와 같은 해 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의 강사를 맡아 드디어 이광래는 자신의 소신을 펼치게 된다.


우선 동랑이 세계를 돌면서 유명한 극자의 구조를 촬영한 것을 바탕으로 드라마센터의 무대와 객석구조를 설계하려 할 때, 저 유명한 '김치'론을 제기한 것이다.


"우리는 버터 대신 김치를 먹고 살아온 민족이니 극장설계도 여기에 알맞게 해야 한다"는 이른바 문화주체론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형무대, 장방형무대는 물론, 우리 고유의 탈춤·인형극 그리고 마당굿까지도 공연이 가능하도록 무대의 구조를 설계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어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출강하게 된 직접 동기는 서라벌예대(초급대학 2년제)와는 사뭇 다르게 연극미학·현대극론 그리고 새로운 연출론(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을 바탕으로 한 색채와 선과 율을 원용한 새로운 도학의 연출법)을 강의하면서 '그저 느낌과 주먹구구식 종래의 연극'을 배격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연극예술의 진가는 과학에 가까우리만큼 치밀한 계산으로 또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데 있다'는 광래 자신의 생각을 후학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그리하여 그는 결코 학자적 위치에서 이론 탐그에만 머물지 않고 새로운 것을 모색하기 위해, 전술한 소극장 '원방각'을 조직하여 서울은 물론 지방에까지 공연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주 개천예술제(옛날의 영남예술제)에 참가한 <기류의 음계>라는 작품이다. 대체로 작가가 자기 작품에 대하여 '작의'라는 해설을 붙여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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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글을 보면 마산 관객은 아주 대형에다 화려함에 익숙해져 있었나 보다.




마산의 거룩한 의거를 기념하기 위하여 1961년에는 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 준비가 거시적으로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61년 2월 중순쯤 나도 화인 김수돈 선생의 급한 부름을 받고 부산에서 마산으로 달려온 것이다.


그런데 와서 보니 생각과는 달리 약간 복잡한 일이 얽혀 있었다. 제전위원회 사무국장을 시인 김춘수 선생이 맡아 전 행사를 총괄하고 있었고 그 아래 예술 분과위원회가 있었는데 위원장에 김수돈, 부위원장에 월초 정진업 선생이 맡아 있어 오순도순 의논만 맞으면 참으로 훌륭한 작업을 할 수 있었을 텐데 두 분이 의견충돌을 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월초는 3·15의거 정신을 고양한 작품을 거의 완성해 놓았으니 자신의 작푸을 레퍼토리로 선정하여 공연하자는 것이요, 화인은 시간만 넉넉하다면 전폭적으로 창선하겠지만 문제는 연습할 시간이 없으니 마산이 낳은 극작가요 연출가인 이광래 선생에게 일임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월초는 폐업(?)하고 집에 칩거하여 일을 거들지 않으니 화인이 나를 부른 것이다.


두 분 다 나에게는 대 선배라 어느 편을 들기도 거북하여 실로 진퇴양난의 어려움에 빠진 것이다. 백고천난 끝에 두 분을 화해시키고 화안과 나는 일약 서울로 가기에 이르렀다. 마산시장 전용차로 부산 수영 공항(당시는 부산공항이 수영이었다)으로 직행한 우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할 때 수튜어디스가 우리를 괴상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무렵만 하더라도 비행기 승객은 말쑥한 옷차림에다 무슨 선민의식으로 도색한 표정을 가다듬고 있어야 할 텐데 머리카락은 갯바람을 맏아 춤추듯 너울거리고, 까만 세루 두루마기를 입었는데 까만 색깔이 아니라 차라리 하얀 빛깔이라 해야할 만큼 막걸리가 온 두루마기에 묻어 있었으니 참으로 가관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서울에 내린 화인과 나는 종로 5가에 있는 '현대문학사'로 먼저 찾아갔다. 이광래 선생댁의 주소를 알기 위해서였다. 누상동 이광래 선생댁은 물론 서라벌예대로, 국립극장(당시는 명동에 있었다)으로, 그 옆 골목에 있는 은성(최불암 씨의 선비가 경영하던 술집)으로 마구 서울 장안을 샅샅이 뒤진 끝에 돈암동에 있는 방공호집(시인 구상·조지훈·박목월, 화가 김환기·이중섭 씨 등이 자주 모이시던 술집)에서 온재 선생을 뵈옵게 된 것이다.


술이 거나하게 취하셨던 온재 선생께서도 고향 마산의 3·15 1주년 기념공연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단박에 눈에 형형한 안광이 빛나면서 진지한 표정으로 바뀌는 것이다. 공연 날짜를 손꼽아 보시더니 "어쩔 수 없네. 리바이벌이야"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작품을 상연할 방도가 없다는 것이다.


부득이 서라벌 예대에서 리허설용으로 스타니슬라브스키 시스템을 원용하여 고영ㄴ한 바 있는 유치진 작 이광래 연출의 <조국>을 레퍼토리로 선정하고 마지막 손질을 더하시겠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마산의 강남극장에서 개막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만 해도 마산의 관객은 대배우 중심의 화려하고 박력있는 연극에 익숙해 있었기 때문에 거센 파도처럼 휘몰아치는 감동이 아닌 잔잔한 감동에는 그다지 큰 박수를 보내지 않는 것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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