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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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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동야화 28화. 원본엔 26화 라고 표기되어 있는데 번호를 잘 못 매겼다. 월초가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연극계로 진출한 이야기. 그런데 마산의 첫 신극 단체라 할 수 있는 '극예사'가 처음엔 김여찬, 이훈산 등의 아나키 성향의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나중에 혁신단 신파극 출신의 천전막이 맡으면서 친일로 흘렀다는 얘기에 가슴 아프다. 또 학교 졸업하고 그저 연기만 하고 싶은 마음에 천전막의 극예사에 들어간 정진업의 운명도 안타깝고. 결국 극예사는 돈이 없어 문을 닫고 마는데... 글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간교한 모습이 읽힌다. 반 일제 성향의 극단을 친일 인사가 인수하게끔 해놓고 결국 그마저 활용가치가 떨어지면 가차없이 내쳐버리는... 이런 일본 제국에 속아넘어간 어리석은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겠냐만.... 오늘날에 와서도 그런 바보같은 짓거리를 반복하는 정치인들이 있으니 뭐... 할말이 없다.




1934년 3월(당시는 학년말이 3월이었다) 마산상업학교를 졸업한 월초는 처음으로 사회의 냉엄함을 체험하게 된다.


"졸업을 하자 금융조합의 서기 시험을 치러 갔지만 멋지게(?) 낙방을 하고 돌아왔다. 부모님의 압력에 못이겨 갔었지 나의 본의는 아니었다. 나는 어떻게 하면 문학이나 예술을 전공하는 학업을 지속하느냐 하는 그 일념뿐이었다"('나의 문단 올챙이 시절')고 말한 바 있듯이 꿈과 현실과의 괴리를 메우지 못하고 갈등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른바 '고등룸펜' 생활을 반년쯤 했을 때의 일이다.


그러다가 1934년 10월에 '극예사'에 입단하게 된다. 극예사는 전술한 바 있듯이 1932년 7월에 창당된 마산 신극 최초의 극단인 셈이다. 창단 당시는 주동자가 김여찬, 이훈산 등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매료된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그 공연 작품들은 자연스레 일본 제국에 대하여 저항적이고 비판적인 것들이었을 것이다.


(이 부분 추측할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기록으로는 구체적인 레퍼토리가 남아 있지 않지만 서너 차례의 공연 중 공연 중지가 두 번이 있었다니 말이다. 그런데 월초가 입단했을 때는 전기 김여찬, 이훈산(훗날 옥사했다고 함) 등은 떠나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신파연극을 하던 천전막이 대표가 되어 극단의 색깔이 친일로 변색되어 있었던 무렵이었다.


옛날 뜻을 같이 했던 단원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남아 있는 몇 사람과 이리저리 급하게 모은 사람들로 연기진을 구성하는데 월초에게 주어진 역은 '일인이역'의 단역(연기진을 3대별 하면 주연, 조연, 단역으로 나뉨)이었다. 하나는 개막과 함께 등장하는 전보배달원 역이었고 또 하나는 후반부에 등장하는 상점점원 역이었다. 그런데 (월초는) 그 작품 제목이 생각나지 않아 여간 안타까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처럼 리허설에 들어가기 전에 작품(대본)을 연기자에게 미리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역의 대사만 적은 쪽지를 나누어 줬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요즘의 한 작품 공연 과정을 간략히 설명해 보면 '스태프 및 연기진에게 대본 나눠주기→연출회의(작품의 주제와 성격과 분위기와 색깔을 토론하고 각 스태프에게 지시한다)→액션(대사에 따른 동작연습)→총연습(공연과 꼭 같이 무대 위에서 조명·효과장치 등을 마련해 놓고 연습함)→공연' 대체로 이런 순서가 되겠는데 옛날 신파 연극 시대에는 경비를 절감한다는 이유 아래 액션 연습 몇 번 하고 바로 공연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러니까 대사 연습 따위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각자 연기자가 알아서 해야 하는 것이었다. 월초도 작품 제목과 주제도 모르면서 액션 연습 두어 번 하다가 극단이 경비난으로 해체되고 마는 비운을 겪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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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관원도진>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섭취한 영양소(?)를 바탕으로 월초 선생은 마산성고 교지에 <가지>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경남도문예전시회에 입선되어 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학우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자 문학에만 매달려 있을 월초가 아니었다.


극장에까지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1930년대 초)는 일반인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영화를 상영하려면 영화 상영에 앞서 해설자가 먼저 관객 앞에 나서서 그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함께 주연 배우의 연기까지도 미리 간략하게 해서래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내레이터를 용돈 몇 푼 받고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극장,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의 옛이름이 공락관이요, 그 공락관의 앞선 이름이 고도부키좌였다. 이 고도부키좌의 내레이터로 월초 선생이 채용된 것이다.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라고나 할까. 물론 텍스트는 당시 발행되던 <에이가노 토모>라는 영화전문지였지만 거기ㅏ 월초 자신의 느낌도 덧붙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상영 프로는 마르세르 카르네 감독의 <안개 낀 부두>인데 주연인 장가벵의 표정을 해설하는 대목은 참으로 천하일품이었다. 


"그 조용한 박력, 완만하지만 단순한 움직임, 엷은 입술에서 번져나는 빙와 공포의 그림자,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눈망을에 감겨드는 서글픔, 그리고 철학서적이 한 권씩 깔리는 듯한 둔중한 걸음걸이를 관객 여러분은 특히 눈여겨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우레같은박수가 쏟아졌으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박수에 굿쟁이(연극인)는 언제나 신이 나는 것이다.


월초 선생이 한참 으쓱해진 기분으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마산상고 훈육담당(오늘날의 학생부) 아라다 교사였다. 학생 신분이 탄로난 월초는 그날로 즉시 극장주로부터 해고당하였고 학교에서는 4주간 유기 정학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생은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무렵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가 날마다 벌 청소와 근로봉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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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의 지망하지 않고 있어서 중부 경남을 대표하던 마산상고가 옛 영화(?)를 못 찾고 있지만 월초가 입학하던 1930년대 초반기에는 수재들이 운집하던 때였다.


더욱이 가능하면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 온갖 잔꾀를 부리던 일제강점기였기에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있던 서민층의 한국인에게는 부산의 부산상고와 함께 마산상고가 유일한 등불이었다


따라서 지금 6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에 있는 마산상고 동문들의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우선 정계부터 살펴보면 황낙주(전국회의장), 우병규(전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김우석(전 건설부장관), 백찬기(전 국회의원), 김정수(국회의원) 씨가 이 상고 출신이다.


경제계에도 많다. 벽산그룹의 창시자 김인득, 이해규(삼성중 대표이사), 이철수(전 제일은행장), 이춘영(전 경남은행장), 배종열(한양그룹 회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도 주선회(광주 고검장), 김성찬(부장검사)과 학계의 김윤식(서울대 교수 평론가), 정노팔(연세대 교수)임철규(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예술계에는 이광석(시인), 최원두(시인), 조병무(평론), 황원철(창원대 교수 화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언론계의 이순항(경남도민일보 대표), 이문행(경남신문대표), 그리고 씨름하면 누구나 떠오르게 마련인 이만기, 강호동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제제명사를 배출한 명문학교가 마산상고인 것이다.


월초도 마산상고 출신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인생의 방향타를 결정하게 한 사람이 마산상고를 입학하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아즈마데카라(東功)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스승이다.


대개의 경우 일본인 이름은 4자 내지 5자로 되어 있고 한국인 이름은 3자로 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분은 한자로 2자였기 때문이다. 월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특이한 이름의 동공이라는 스승은 문예 담당선생이었다.


히로시마 고등 사범법학교(이 학교는 일본 유수의 사범대학 중의 하나였다) 출신답게 명석한 머리와 정확한 판단력을 겸비했으면서도 결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였다. 수업시간에도 신국 일본(신이 일본을 세웠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의 허구성과 허망함을 설파하는가 하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사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1920년대 일본 열도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대하여 일가견을 말하기도 하는 괴짜 선생이었다.


이 괴짜선생을 흠모하고 따랐기 때문에 월초의 학생시절의 닉네임도 '괴짜'라는 뜻의 변태성이었다. 이유는 연극 음악 영화 등 다방면에 취미가 많아 장르가 바뀔 때마다 그 장르에 몰입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으로 잘 변한다하여 악우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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