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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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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 번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어서 월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으나 종종 영화나 드라마의 소재가 된 터라 무책임한 남자의 못난 모습 정도로 여기는 장면이 바로 열애 중에 이유없이 떠나는 남자의 모습이다. 현주가 그렇게 좋아 자신의 집에까지 드나들게 했다면 부부나 다름없을 터.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이웃에 대한 체면 때문이라고... 핑계가 마뜩찮다. 어머니야 아들이 술집 여성과 장래를 약속한다 하니 눈이 뒤집힐 수 있다. 그 또한 자기가 극복해야 할 부분이고. 헌데 이웃 눈치를 본다 정도면 정진업의 현주에 대한 진정성은 믿을 수 없는 것 아닐까 싶다. 어쨌든 그렇게 진영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통영으로 학원 선생이 되어 간다하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궁금하다. 현주는 다시 만나게 될까.





현주가 무슨 사연으로 남녘 바다가 있는 마산의 유흥가에 등장했는지는 몰라도 현주가 술이 취하면 "이제 지내고 보니 삼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그때는 왜 그렇게도 가슴 저리고 뼈를 깎는 고통이었던지" 하며 술잔을 기울이더라고 했다.


당시로서는 고녀(오늘의 여고) 출신만 돼도 신여성 인텔리로 치부되던 시절에 한국 명문 사학의 하나인 이화여전 출신이고 보니 그녀의 눈은 자연스레 연극을 공부하고 문단 데뷔의 딱지가 붙어 있는 월초에게로 쏠릴 수밖에 없었으리라. 거기다 청년 월초는 누가 봐도 탐낼만한 헌헌장부인데다 우람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반듯했으니 더 이상 말할 나위도 없었을 것이다. 황폐할대로 황폐해진 현주의 가슴에 월초의 출현은 그야말로 '봄비'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 사이 사랑의 '진도'는 초고속으로 발전되어서 "서재라고 꾸며놓은 내방에 현주가 드나들면서부터 금단의 과실은 따먹어버린지 오래가 되었고 어머니의 반대(돌아가신 아버님은 너그러우셔서 못 보신체 해주셨지만)와 이웃에 대한 체면으로 그런지 두 달만에 내 혼자 마산을 떠나버리고 말았다. 물론 현주는 알 까닭이 없었다. 장래를 약속한 바는 있지만 같이 떠날 처지는 안 되어 있었기 때문에 현주의 영업시간을 기다려 궐녀(그녀를 낮춰 이르는 말)를 보내놓고 이내 밤차를 탔던 것이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


도망치듯 마산에서 진영까지 기차를 타고 가는 동안 현주에 대한 '미안함과 그리움으로' 월초는 시달려야 했다. 유년시절을 보냈던 고장 진영은 월초를 반겨주었다. 소꿉친구들과의 재회에서 '현주와의 사랑' 때문에 번민하던 갈등을 잠시라도 잊을 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런데 한 달쯤 뒤 지금의 통영제일고등학교의 전신인 '통영협성상업학원'에서 교사로 취임하라는 통보가 친구 편으로 날아든 것이다. 그리하여 본의아닌 도피생활을 청산하고 부임지인 통영으로 가게 된다. '통영협성상업학원'은 당국의 정식인가를 얻지 못한 채 유림을 비롯한 여러 유지들이 재단을 형성하고 그 재단에서 운영하는 중학교 과정의 두 클래스짜리 사설학원이었다. 직원이래야 교장과 월초 그리고 청지기 한 사람 모두 세 사람뿐이었다. 그런데도 월초에게는 평생동안 잊을 수 없는 가지가지 추억이 서린 곳이 돼버렸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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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가 문단에 데뷔하여 금의환향한 이야기. 무엇보다 월초가 관심을 보였던 한현주라는 여성이 등장하는데 글을 베껴 쓰면서도 그가 경남연극에 어떤 역할을 했기에 한하균 선생이 주목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 궁금하다. 문득, 현재 경남연극인들 중에 이런 이야기로 관심을 끌 수 있는 인물이 누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일정 말기인 1930년대 말, 우리 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학전문지인 <문장>에 그렇게도 간절히 소망하던 문단 데뷔의 일차 관문을 통과하게 되자 월초는 그리운 고장 마산을 찾아와 온 시중을 휩쓸고 다녔다.


그 당시 마산 시중이래야 신마산은 70% 가까이가 일본인이 모여사는 신시가지였고 구마산은 거의 전부가 한국인이 취락하여 사는 보수색이 짙은 마을이었다. 다만 오동동만이 술집이 많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노랫가락과 신판 유행가가 뒤섞인 이른바 '안방술집'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니까 이른바 술깨나 한다는 사람들은 초장술은 북마산에서 마시고 거나해지면 카페 '공작'과 '은하'를 찾아들게 마련이었다. 당시 마산에는 카페라고는 앞에 말한 두 곳뿐이었다.


지금 남성동 파출소 앞에 제일은행이 있고 그 제일은행 뒤편에 부림시장으로 들어가는 길이 있는데 그 길 왼편에 아주 조그마한 골목이 있었고 그 골목 초입에 '공작'(옛날 미도식당 자리), 그리고 그 건너편에 '은하'가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장래가 촉망되거나 그 미래가 보증된 사람의 주변에는 으레 술 친구가 모여들게 되어 있는데, 월초 자신의 말대로 '보증이 붙은 문학청년입네 하고 선배들이 곧잘하던 데카당 흉내를 내고 있었으니 주변에 술 친구가 없을 리 없다. 그러니 자연스레 마산 최고의 신식 사교장인 공작과 은하에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했고, 그 중에 은하의 요정 현주를 만나게 된 것이다.


한현주. 그녀의 본명은 모른다. 술이 거나해지면 월초는 스스럼없이 옛일을 다 털어놓으시면서도 끝까지 그녀의 본명은 '어딘가에 살아 있을 그녀의 명예를 위해' 밝힐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녀가 황해도 사리원 출신으로 서울의 풍문고녀(요즘의 여고)를 거쳐 이화여전(이화여대의 전신) 문과를 졸업한 아가씨라는 것만 밝혔다.


부산일보에 발표한 <세정무정(世情無情)>에서 이화여전 중퇴라고 쓴 것은 그녀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는 뜻에서였고 재학 당시 '메이퀸(5월의 여왕)'으로 뽑힌 적도 있는 재원이라는 것이다.


"이건 자네만 알아야 해"하고 몇 차례나 당부하신 뒤 "이화여전 연극반이 공연했던 체호프의 <3인자매>에 '아주 중요한 역할'(역시 역명을 밝히면 그녀의 신분이 노출되니까)로 출연했던 연극 광(狂)이었어"라며 처연하게 회상하시곤 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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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중 홍해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왜 방송에도 종종 나왔던 유명인사가 떠올랐다. 이름이 김벌레든가... 아, 김벌래. 인터넷이 가까이 있어서 이렇게 편하다니까. ㅋㅋ. 이 양반은 여러가지 도구로 음향효과를 내는데 참 기발하기도 하단 생각을 했더랬다. 정진업이 유치진 홍해성 이런 분들한테서 연극을 공부하던 중 '극예술연구회'가 강제해산이 되었단다. 정진업으로선 얼마나 아쉬운 일이랴. 게다가 홍해성은 신파극을 하는 동양극장으로 옮겨갔다. 정진업이 좀 알아주는 연극인이었다면 같이 가잔 제의도 들었겠지. 그럼에도 다행히 한달만에 '극연좌'란 이름으로 극단이 재구성된다. 당시 일제가 아무리 밟아도 일어서던 민중처럼 극단도 그랬나 보다. 여튼 연구생 시절에 문단에 데뷔한 실력이 부럽기도 하지만... 내 글이야 기자라는 신분 때문에 세상에 많이 퍼져되어 있지만 그래, 문단 데뷔... 이런 것도 하고 싶네. 갑자기, 문득, 각중에, 백줴....ㅎㅎ



그런데 이 홍해성은 고매한 이론보다는 실제로 축지 소극장에서 배운 그대로 시범을 보여주는 형태로 강의하였기 때문에 수강생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가령 효과의 실제를 말하면서 요즘은 녹음기에다 실제로 진짜 소리를 녹음하여 쓰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 의음으로 효과음을 냈다.


"바람 소리는 '윈드머신'이라고 하는 도구의 손잡이를 돌리면 천과 톱니바퀴가 마찰 바람 소리가 나는데, 도리는 방법과 천의 질에 따라 바람의 강약을 낼 수 있다. 또 빗소리는 부채에다 콩이나 팥 같은 것을 20개쯤 실로 꿰어 매단다. 그것을 콩을 위로 하고 좌우로 흔들어 움직이면 빗소리가 난다. 부채 두 개를 동시에 흔들면 더욱 세찬 빗소리가 난다. 그리고 천둥소리는 철판을 매어 달고 두드리되 주먹으로 가볍게 치면 먼 거리의 원뢰 소리가 되고 북채로 힘차게 두드리면 벼락 치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연극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때가 오면 무대 위에서 발휘할 날만 고대하던 중 19383'극예술연구회'가 강제 해산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일본 경찰은 1937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극예술연구회'를 일종의 사상단체로 보고 또한 그 동인들을 민족주의자로 간주하여 해산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총칼로 꺾으면 꺾을수록 한겨울에도 그 생명력을 과시하는 소나무처럼 우리의 순수 연극인들은 다시금 힘을 합친 것이다. 비록 홍해성이 동양극장(신파연극을 상연하던 극장)으로 옮겨 가고 일부는 연극계를 떠나버렸지만 19384, 그러니까 '극연'이 해체된 한 달쯤 뒤에 '극연좌'란 이름으로 다시 무대를 찾게 된 것이다. 물론 월초도 극연좌 연구생으로 자리를 옮겼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해가 바뀌어 1939"<카츄샤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무렵 상허(이태후를 일컫는 말)의 추천으로 비로소 관문을 통과는 했지만 제2, 3작을 통과하기 전에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폐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상허는 서간문형식으로 된 필자의 단편을 주제의식이 희미한 감상문이라고 비판하면서 200자 약 50매분을 얼마나 퇴고했던지 30매 정도로 깎아 발표하여" ('나의 무단 올챙이 시절' ) 이른바 문단 데뷔를 하게 되자 개선장군(?)처럼 금의환향하게 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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