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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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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중 홍해성이 등장하는 장면에서 왜 방송에도 종종 나왔던 유명인사가 떠올랐다. 이름이 김벌레든가... 아, 김벌래. 인터넷이 가까이 있어서 이렇게 편하다니까. ㅋㅋ. 이 양반은 여러가지 도구로 음향효과를 내는데 참 기발하기도 하단 생각을 했더랬다. 정진업이 유치진 홍해성 이런 분들한테서 연극을 공부하던 중 '극예술연구회'가 강제해산이 되었단다. 정진업으로선 얼마나 아쉬운 일이랴. 게다가 홍해성은 신파극을 하는 동양극장으로 옮겨갔다. 정진업이 좀 알아주는 연극인이었다면 같이 가잔 제의도 들었겠지. 그럼에도 다행히 한달만에 '극연좌'란 이름으로 극단이 재구성된다. 당시 일제가 아무리 밟아도 일어서던 민중처럼 극단도 그랬나 보다. 여튼 연구생 시절에 문단에 데뷔한 실력이 부럽기도 하지만... 내 글이야 기자라는 신분 때문에 세상에 많이 퍼져되어 있지만 그래, 문단 데뷔... 이런 것도 하고 싶네. 갑자기, 문득, 각중에, 백줴....ㅎㅎ



그런데 이 홍해성은 고매한 이론보다는 실제로 축지 소극장에서 배운 그대로 시범을 보여주는 형태로 강의하였기 때문에 수강생들에게는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가령 효과의 실제를 말하면서 요즘은 녹음기에다 실제로 진짜 소리를 녹음하여 쓰기도 하지만 그 당시는 거의 대부분 의음으로 효과음을 냈다.


"바람 소리는 '윈드머신'이라고 하는 도구의 손잡이를 돌리면 천과 톱니바퀴가 마찰 바람 소리가 나는데, 도리는 방법과 천의 질에 따라 바람의 강약을 낼 수 있다. 또 빗소리는 부채에다 콩이나 팥 같은 것을 20개쯤 실로 꿰어 매단다. 그것을 콩을 위로 하고 좌우로 흔들어 움직이면 빗소리가 난다. 부채 두 개를 동시에 흔들면 더욱 세찬 빗소리가 난다. 그리고 천둥소리는 철판을 매어 달고 두드리되 주먹으로 가볍게 치면 먼 거리의 원뢰 소리가 되고 북채로 힘차게 두드리면 벼락 치는 소리가 난다…."


이렇게 연극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때가 오면 무대 위에서 발휘할 날만 고대하던 중 19383'극예술연구회'가 강제 해산되는 비운을 맞은 것이다. 일본 경찰은 1937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극예술연구회'를 일종의 사상단체로 보고 또한 그 동인들을 민족주의자로 간주하여 해산시키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이 총칼로 꺾으면 꺾을수록 한겨울에도 그 생명력을 과시하는 소나무처럼 우리의 순수 연극인들은 다시금 힘을 합친 것이다. 비록 홍해성이 동양극장(신파연극을 상연하던 극장)으로 옮겨 가고 일부는 연극계를 떠나버렸지만 19384, 그러니까 '극연'이 해체된 한 달쯤 뒤에 '극연좌'란 이름으로 다시 무대를 찾게 된 것이다. 물론 월초도 극연좌 연구생으로 자리를 옮겼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해가 바뀌어 1939"<카츄샤에게 보내는 편지>가 이 무렵 상허(이태후를 일컫는 말)의 추천으로 비로소 관문을 통과는 했지만 제2, 3작을 통과하기 전에 일제의 문화말살정책으로 폐간이 되고 말았다. 당시 상허는 서간문형식으로 된 필자의 단편을 주제의식이 희미한 감상문이라고 비판하면서 200자 약 50매분을 얼마나 퇴고했던지 30매 정도로 깎아 발표하여" ('나의 무단 올챙이 시절' ) 이른바 문단 데뷔를 하게 되자 개선장군(?)처럼 금의환향하게 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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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라 작품을 조선총독부 산하의 관청에서 공연 허가를 얻으려면 일본말로 된 대본을 제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일본 관헌이 읽고 판단할 수 있을 테니까.


광래는 이 일을 주선해 진업에게 맡기면서 그의 호구지책을 우선 해결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 하나는 작품(희곡)을 접함으로써 연극의 세계에 입문시키려 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연극계 인사들과 얼굴을 익혀 안면을 넓히기 위한 것이었다.


다행히 월초에게는 문재(文才)가 있어 광래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문장력을 발휘하여 각 극단에서는 웬만하면 월초에게 번역 일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나 이제나 '문필 업'은 생활과는 먼거리에 있었다.


한 작품 번역해보아야 한 달치 하숙비가 될똥말똥하는 그런 싸구려 수입뿐이었다. 이러한 번역하는 일로 극단 주변에서 약 1년쯤 지냈을 때인 1937년 11월 '극예술연구회'의 실천부(극예술연구회는 크게 연구부와 실천부로 나뉘어 있었고, 전자는 실험무대를 두고 또 후자는 강습회 등을 통하여 새로운 연기자 양성과 연극의 중요성과 함께 스태프의 각 분야별 전문 강의를 맡아 하고 있었다) 산하 강습회 회원으로 수강하게 된다.


이 강습회에서 몇 달 동안 강의를 받던 중 가장 인상적인 과목은 동랑 유치진의 <연기론>과 홍해성의 <무대론>이었다. 유치진은 너무나 유명한 극작가요 연출가니까 새삼스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홍해성에 대하여 잠시 언급해 두고자 한다.


홍해성은 극예술연구회 동인(해외문학파)들보다는 약 10년 선배로 소년시절부터 일본 신극의 요람인 축지 소극장에서 일본 신극의 개척자 오사나이 카오루에게서 신극의 무대 기술과 연기를 배우고 익혀 귀국하여 한국에 이식한 신극계 공로자의 한 사람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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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극이 유행하고부터는 신파극은 신극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겐,말하자면 경멸의 대상이 되었나 보다. 무용을 하는 김해랑마저도 정진업이 혁신단을 따라다니자 나무라며 하는 말이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풍작쟁이가 될 텐가" 했다 하니 말이다.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 관객의 박수를 이끌어내던 신파극의 독특한 플롯 구조가 당시 관객에게 먹혀들어갔을 터이다. 암튼 김해랑의 소개로 정진업은 이광래를 만나게 되나 보다.



극단이 해체되는 비운을 겪은 뒤 이듬해인 1935년 이른 봄에 전기 천적막이 다시 불러 갔더니 역시 '극예사'란 간판을 걸고 소인극단체를 만들어 영남 일대를 순회공연하는 것이었다.


공연 작품은 월초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다. "창피하게도 옛날 임성구의 혁신단에서 공연했던 <육혈포강도> <사나이답게 싸워라> 등이었다."


여기에서 연극인 정진업으로서는 치명적인 나쁜 버릇이 생겨 아무리 뿌리치려 해도 무대 위에 서기만 하면 무의식 중에 발작해버리는 참으로 안 좋은 버릇이다. 그것은 바로 '쿠세'라는 일본 말로 표현되는 것으로 연기자마다 거의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월초에게는 '신파근성'이라는 못된 버릇을 지니게된 것이다.


대체로 좋은 연기를 하려면 언제나 주제의식을 머리 속에 머금고 상대 역과 호흠을 맞춰야 하는 법인데 리허설할 때는 앙상블을 잘 맞추다가도 무대에 서면 자기 혼자만 관객(물론 저질관객이다)에게 박수세례를 받는 신파 연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바 있듯이 대본을 미리 받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맡은 역의 대사만 받아서 연습했기 때문에 생기는 숙명적인(?) 부담이다. 이런 버릇은 '사랑하는' 제자와 공연할 때도 어김없이 발작(?)했다. 


1962년 12월 하유상이 쓰고 필자가 연출한 <고래>를 공연할 때도(이 대목은 후술할 기회가 있을 것이기에 자세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주인공 고래 역은 월초가, 상대역인 화산댁 역은 조두이 여사가 맡았는데 평소 사생활에서나 리허설 중일 때는 제자인 조두이 여사를 남이 보면 부러워할 만큼 존중하고 아끼시던 분이 무대에만 서면 전혀 상대방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화가 머리 끝까지 치민 필자가 막이 내린 뒤 대선배이신 월초에게 대들라치면 "한군, 다시는 오버 액션 안 할게. 한번만 잘 봐 다우"하고 사정을 할 정도였다.


이러한 나쁜 버릇도 처음 연극을 배운 데가 신파극단이었기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거의 일년 쯤 김삿갓처럼 방랑생활을 하던 중 마산으로 돌아와보니 경남 무용계의 개척자 김해랑 선생이 기다리고 계셨다.


"자네 예술을 할 셈인가? 아니면 풍각쟁이가 될 텐가?"

"어디 좋아서 유랑 극단에 따라 다니겠습니까?"


그제서야 김해랑 선생은 "내 친구 홍근(광래)이를 소개해 줄테니 서울로 가보게"하고 간곡히 타이르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36년 9월에 드디어 서울(경성)로 가게 되는 것이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까지 도하 각 신문에 '무작정 상경'이란 말이 거의 날마다 기사화되었듯이 월초도 그야말로 무용가 김해랑의 소개장 하나만 달랑 들고 이광래를 찾아 '무작정 상경'한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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