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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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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에 지어주신 아호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부친 동래 정씨 세룡과 모친 김해 김씨 정해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진영면(당시는 면이었다)의 정식 공무원도 아닌 촉탁의 자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고지식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러기에 월초는 끼니때마다 초라한 밥반찬에 죄없이 미안하고 죄송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하여 도랑에서 천렵을 하기로 마음 다진 것이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계방학 중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로 됨) 4학년이던 월초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쇠돌이답게 또래들 가운데서는 체격이 우람하고 의협심도 강해 자연스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푸짐한 생선 반찬을 미리 연상하면서 개울가에 진을 치고 작업을 개시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그물이 준비 불충분이었다. 사연인즉 그물 대신 방충망을 가져왔는데 그 방충망에 대꼬챙이를끼워야 어로작업을 할텐데 대꼬챙이가 없는 방충망뿐이었다.


이에 골목대장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꼬챙이를 끼워 완전한 그물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소년 월초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상처 윗부분에 헝겊을 찢어 힘껏 동여매고 서슴없이 독을 입으로 빨아내고는 업고 달렸다.


"10리가 훨씬 넘는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뛰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가 없지만 그 아이를 병원 베드에 눕혀 놓고는 나 자신이 기절을 하고 만 거야." 안경 알을 닦으시면서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간이 콩알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가난한 아버지의 부담만 짊어지게 만든 이 사건은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상처를 남겼던 모양이다.


때마침 학계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스스리카타(작문)' 장르에 출품하여 월초가 김해군에서 수석으로 입선하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효심을 바탕으로 한 개울가의 천렵 이야기, 다시 말해서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엮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의 문재(文才)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되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환한 기쁨을 드리게 디어 흐뭇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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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로써 이광래 이야기는 끝이 난다. 물론 앞으로 다른 연극인 이야기에 엑스트라로 출연할 것이다. 연극동맹에 대항한 전력 때문에 인민국이 서울을 장악했을 때 피신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는 민족주의적 성향을 끝내 유지했던 것 같다.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그의 작품 몇 개를 읽어보겠지만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한 대로 작품에서도 그 성향이 드러난다고 하였으니. 또 민족주의가 세월을 타고 흐르면서 보수세력으로 정착화되는 과정도 확인할 수 있겠다 싶다. 


이광래가 '연극동맹'에 대항한 이유 중의 하나가 일제강점기에 일본제국의 주구노릇을 하던 인간들이 갑자기 붉은 기를 들고 공산주의 운동을 벌였다는 점을 들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조선연극운동본부 결성 후 한 달만에 친일극 전력자 문제로 내분이 일어나 1945년 9월 28일 나옹, 신고송 등이 탈퇴해 다시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을 결성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게 다시 12월 연극본부하고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하고 통합해 조선연극동맹으로 재편됐다.(한국현대문학대사전) 


이유는 조선문학건설본부와 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 통합하면서 조선문학가동맹으로 재편했는데 이에 따른 것이었다. 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이 건설본부쪽 애들과 그렇게 대립각을 세웠어도 더 큰 카테고리가 통합하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는 평생동안 염원하던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부단히 노력한 교육자요, 지도자였다. 1948년 서라벌 예대가 정식인가를 받기 전 강의를 시작할 때부터 1968년 타계하기 두 달 전까지 서라벌예대의 연극영화과 지킴이 교수와 동국대학, 서울연극학교(드라마센터) 등 시간이 허락하는 한 강단에서 강의를 마다하지 않았던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연출하고 연기하던 구습을 타파하기 위하여 심리락, 민속학, 인류학, 정신분석학, 미학 등 남들이 모두 싫어하는 비인기 과목인 보조과학에 더 무게를 두고 강의했던 것이니, 이는 모두 연극인의 질적 향상을 염두에 둔 까닭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가식이라든지 허세라든지 조작된 포즈라든지, 온갖 부수적인 사치를 배제하고 바닥에서 우러나오는 이해로써 사람을 대해주기 때문'(1971년의 <현대연극> 내 김상민의 '인간 이광래' 중)에 제자들의 존경을 받은 지도자였다.


또한 광래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습작기의 작품인 <어막의 일야>를 비롯해 <지는 해>(34년) <촌선생>(35년) <석류나무집>(37년) <해질무렵>(37년) 등 초기 작품은물론 그의 40편에 달하는 거의 모든 작품 밑바닥에는 겨레사랑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8·15 직후 우리나라에 "쏘련 놈에 속지 말라. 미국 놈 믿지 말라. 일본 놈 일어난다. 조선사람 조심하라"는 참요가 한때 유행했었는데 광래는 술이 거나해지면 "이 참요 속에 진리가 있단 말야?"하고 몇 번이고 되뇌이곤 했다고 한다.


어쨌든 광래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적색테러는 물론 백색테러와 철저하게 대항했던 사람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온 나라의 연극계가 아니 어제까지 친일하던 연극인들이 '연극동맹'을 중심으로 하여 붉은 깃발을 휘두르고 있을 때 1945년 10월 오직 광래만이 민족예술무대(약칭 민예)를 조직하여 그들과 대항하여 싸웠다. 이때 북에서 피란 내려온 서북청년단(우익 행동부대)이 좌익의 테러를 막아주겠다고 나섰지만 이광래가 단연코 거절한 일화는 너무나 유명하다. 


그런데도 6·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이 서울에 진주하자마자 '연극동맹'에서는 유치진, 서항석 선생들을 색출하려 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지만, 거기다가 이광래를 꼭 찾아내겠다고 눈에 핏발을 세우고 날뛰는 판국이었다. 한강이 끊어져 도강할 수 없게 된 광래는 부득이 처가가 있는 경기도 여주 땅으로 피신하여 구사일생으로 악몽같은 90일을 견딘 것이다.


이제 그가 활약했던 이력을 정리해 봄으로써 이 글을 끝맺고자 한다. 한국문학가협회 이사 및 희곡분과 위원장(1965년), 대한민국예술원 회원(1957년), 한국연극협회 이사(1962), 대한민국문화포상 수상(1963), 대한민국예술원상(1967) 등등.


중천에 있던 해가 서녘하늘에 쓰러질 때는 찬란한 낙조를 남기듯 우리 연극계에 많은 일을 하고서도 별달리 야단스럽지 않았던 이광래 선생이 1968년 10월 29일 지병으로 타계하자 갑자기 우리 연극계는 한 기둥이 뽑힌 허전함을 가누지 못했던 것이다. "남녘을 바라보고 묻어달라"는 그의 유언대로 지금 망우리 묘지에 묻혀 있는 이광래 선생. 그가 말한 남녘은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이 고향 마산이리라.


/참고문헌: <온재 이광래 연구>(김홍우), <한국연극사>(장한기), <연극연감>(연극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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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의 업적이 나열된다. 사실주의 낭만주의 물결 속에서 '표현주의' 극을 이끌었다는 점, 극 중간에 또 이루어지는 중간극, 이것은 오페라 쉬는 시간(인터미션)에 공연되던 작은 오페라, 오페레타와 유사하겠다 싶다. 하긴 유럽에서 이 오페레타가 재미있는 극의 구성으로 오히려 오페라보다 더 인기를 구가하기도 했지만. 여튼 그러한 장르의 극도 구상하고 소극장운동까지 펼쳤다고 하니 대단한 인물이다. 한국 연극 계보를 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광래의 이러한 점은 현재 한국 연극계 거장 오태석, 이윤택, 손진책, 윤호진 이런 양반들과 비슷했겠다 싶다. 새로운 극을 실험하는 것만큼 창조적 희열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으리라.



그만큼 이광래는 거듭 말하지만 연극에 관한한 한치의 오차도 용납않는 성격이었다. 그러면서도 불치의 병마(당뇨병)에 시달리면서 소극장운동의 세미나나 공연, 그리고 대학극의 초대에는 빠짐없이 찾아다니며 관극하고 합평회에 참석하여 격려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어떻게 연극에 미친(狂) 까닭을 광래 자신이 쓴 <나와 연극>(연극연감, 연극협회편)에서 찾아보자.


"내 울적한 감정과 격앙된 사상을 펼치고 떨칠 필드로서 연극을 선택한 것이다. 그것은 내가 도쿄 고등학교(지금의 전문대학)를 나와 와세다대학에 재학시 공산주의 사상이 한창 판을 치고 행패를 부리는가 하면, 반면 이것들을 제압하기 위하여 백색테러가 반공인(公認) 아래 백주에 횡행하던 폭력시대였다. 이것을 보다 못해 분기한 것이 다가다노 마바의 학생침입이라는 유혈의 투쟁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때 연좌(連坐)하였던 동지들은 5~15년의 판결 언도를 받았는데, 나는 연소자일 뿐아니라 학생이라는 이유로 빼돌려 주었다. 그러나 일본 관헌들의 눈은 나를 미행하다 못해 기어코 일본 땅에서 추방하고야 말았다. 귀국한 뒤에 축구경기장에서 결승전에 농민종맹(좌익계열)과 맞붙었는데 구기는 고사하고 사상적인 대립으로 집단 난투극의 수라장이 밤중까지 계속되었다. 이것 때문에 소요죄에 걸려 감옥신세가 되고 말았으며, 반면 후에도 요시찰 인물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치장엘 드나들게 되었다. 나의 격앙된 심경은 결코 아폴론적으로 평온할 수는 없었다. (중략)그러다가 연극예술의 진수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동랑 유치진과 같이 (그는 행장극장을 만들어 민중계몽을 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종의 공리적 목적에서 연극에 빠져들었지만 끝내는 연극예술을 꽃피우기 위하여 그 험난한 형극의 길을 택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나와 연극>에서 다음과 같은 글도 보인다.


"니체가 인생은 수난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했듯이 우리나라 연극사가 수난의 기록이 아니고 수난 그것이 바로 연극의 기록인 것 같이 내 인생이 연극인지 연극 바로 그것이 내 인생인지, 어쨌든 연극 가운데 내가 살고 내 가운데 연극이 살고 있는 한 내 인생은 수난 많은 인생일 수밖에 없다."


이렇게 이광래 스스로 말하듯 '수난의 기록'인 연극이었지만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그가 이룩한 업적도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언제나 선구적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모색하는 연출가요 극작가였다. 1930년 중반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의 물결속에서 이땅에 처음으로 표현주의 무대를 형상화시키기에 앞장섰다. 뿐만 아니라 중간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연극을 탄생시키려고 온 정력을 다 기울였다.


또 나아가서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소극장운동을 개척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김흥우(동국대학교 연극영화과 ) 교수에 의하면 "그의 만년에 시도된 심포닉 드라마는 한국 고전음악기를 동원한 것으로, 한국 고전의상의 현대화, 이두 문자의 부활, 언어의 시각화 등을 시도하여 주목을 끌기도 했다."(온재 이광래 연구)고 말하고 있지만 애석하게도 필자는 광래의 심포닉 드라마를 한 편도 관극하지 못해 낙향한 서글픔을 달랠 수밖에 없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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