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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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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신분을 속이고 영화관에서 내레이터 아르바이트를 한 월초 정진업의 성숙함이 오늘 이야기의 초점인 것 같다. 이 이야기만 봐도 월초가 얼마나 정열적인 인간형인가 가늠하게 된다.



월초는 또한 왕성한 탐구욕의 소유자였다. 그 탐구욕의 소산이었다고나 할까? 그 당시 마산상고에는 전술한 아즈카 데카라 선생 이외에도 고다마, 시카사마 등 두 분 선생이 더 계셨다.


고마마 선생은 <관원도진>이라는 희곡 작품을 발표할 정도의 문인이었고, 시카사마 선생은 영어선생이었지만 수업시간에 가끔 세계 명작을 소개해 주셨는데 그중에서도 아일랜드 작가인 싱그와 오케이시 등의 작품을 통하여 영국 지해하의 아일랜드 사람들의 독립의식을 밝힘으로써 은근히 한국인에게도 독립심을 강조하기도 했던, 일본인으로서는 이단자구실을 서슴지 않았던 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마음껏 섭취한 영양소(?)를 바탕으로 월초 선생은 마산성고 교지에 <가지>라는 첫 작품을 발표했다. 이 작품은 경남도문예전시회에 입선되어 지사의 표창을 받았다. 학우들은 물론 선생님들까지 찬사를 아끼지 않자 문학에만 매달려 있을 월초가 아니었다.


극장에까지 진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당시(1930년대 초)는 일반인의 의식수준이 낮았기 때문인지 몰라도 외국영화를 상영하려면 영화 상영에 앞서 해설자가 먼저 관객 앞에 나서서 그 영화의 핵심 줄거리와 함께 주연 배우의 연기까지도 미리 간략하게 해서래 주기로 되어 있었다.


이 내레이터를 용돈 몇 푼 받고 맡기로 한 것이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극장, 창동에 있던 '시민극장'의 옛이름이 공락관이요, 그 공락관의 앞선 이름이 고도부키좌였다. 이 고도부키좌의 내레이터로 월초 선생이 채용된 것이다. 시쳇말로 아르바이트라고나 할까. 물론 텍스트는 당시 발행되던 <에이가노 토모>라는 영화전문지였지만 거기ㅏ 월초 자신의 느낌도 덧붙여 말하게 되어 있었다.


그날의 상영 프로는 마르세르 카르네 감독의 <안개 낀 부두>인데 주연인 장가벵의 표정을 해설하는 대목은 참으로 천하일품이었다. 


"그 조용한 박력, 완만하지만 단순한 움직임, 엷은 입술에서 번져나는 빙와 공포의 그림자, 멀리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한 그 눈망을에 감겨드는 서글픔, 그리고 철학서적이 한 권씩 깔리는 듯한 둔중한 걸음걸이를 관객 여러분은 특히 눈여겨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하자 우레같은박수가 쏟아졌으믄 두말할 나위도 없다. 이 박수에 굿쟁이(연극인)는 언제나 신이 나는 것이다.


월초 선생이 한참 으쓱해진 기분으로 무대 뒤 분장실로 돌아와 보니 거기에는 호랑이가 버티고 있었다. 마산상고 훈육담당(오늘날의 학생부) 아라다 교사였다. 학생 신분이 탄로난 월초는 그날로 즉시 극장주로부터 해고당하였고 학교에서는 4주간 유기 정학이라는 중벌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학생은 영화관 출입이 금지되어 있었던 무렵이라 어쩔 수 없이 학교에 나가 날마다 벌 청소와 근로봉사하는 홍역을 치러야 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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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성장하면서 아무래도 학창시절에 선생님의 영향을 많이 받는 듯하다. 나 역시 초등학교 시절 5, 6학년 담임이었던 선생님의 영향으로 지금의 직업을 선택하게 되기도 했지만. 월초 정진업 역시 마산상고 시절 만난 일본인 선생 마즈마데카라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학생이 선생님을 좋아하고 존경하게 되면 그의 전공을 따라가게 마련이다. 어쩌면 성향도 닮는 듯하고. 아즈마데카라가 아나키적 성향이 있었다고 하니 앞으로 월초의 행보에 그런 모습이 드러나는지도 유심히 읽어봐야겠다.




1929년 4월  (당시는 신학기가 4월이었다) 월초는 5년제인 마산상업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요즘에야 거의 대부분 학부모들이 자식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아 잘 기르겠다는 생각이 팽배해 있기 때문에 실업계 고등학교를 별로, 아니 거의 지망하지 않고 있어서 중부 경남을 대표하던 마산상고가 옛 영화(?)를 못 찾고 있지만 월초가 입학하던 1930년대 초반기에는 수재들이 운집하던 때였다.


더욱이 가능하면 한국인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주지 않으려 온갖 잔꾀를 부리던 일제강점기였기에 대학을 진학할 수 있는 기회가 막혀있던 서민층의 한국인에게는 부산의 부산상고와 함께 마산상고가 유일한 등불이었다


따라서 지금 60대 중반 이상의 연령층에 있는 마산상고 동문들의 자긍심은 대단한 것이었다. 사실 그럴만도 했다. 우선 정계부터 살펴보면 황낙주(전국회의장), 우병규(전 국회의원 국회사무총장), 김우석(전 건설부장관), 백찬기(전 국회의원), 김정수(국회의원) 씨가 이 상고 출신이다.


경제계에도 많다. 벽산그룹의 창시자 김인득, 이해규(삼성중 대표이사), 이철수(전 제일은행장), 이춘영(전 경남은행장), 배종열(한양그룹 회장) 등이 있고, 법조계에도 주선회(광주 고검장), 김성찬(부장검사)과 학계의 김윤식(서울대 교수 평론가), 정노팔(연세대 교수)임철규(연세대 교수) 등이 있다.


예술계에는 이광석(시인), 최원두(시인), 조병무(평론), 황원철(창원대 교수 화가)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언론계의 이순항(경남도민일보 대표), 이문행(경남신문대표), 그리고 씨름하면 누구나 떠오르게 마련인 이만기, 강호동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제제명사를 배출한 명문학교가 마산상고인 것이다.


월초도 마산상고 출신으로서의 프라이드가 대단했다. 그의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영향을 끼치고 인생의 방향타를 결정하게 한 사람이 마산상고를 입학하면서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한 아즈마데카라(東功) 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스승이다.


대개의 경우 일본인 이름은 4자 내지 5자로 되어 있고 한국인 이름은 3자로 되어 있게 마련인데 이분은 한자로 2자였기 때문이다. 월초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알맞은 특이한 이름의 동공이라는 스승은 문예 담당선생이었다.


히로시마 고등 사범법학교(이 학교는 일본 유수의 사범대학 중의 하나였다) 출신답게 명석한 머리와 정확한 판단력을 겸비했으면서도 결코 어떤 틀에 얽매이는 것을 아주 싫어하는 자유주의자였다. 수업시간에도 신국 일본(신이 일본을 세웠다는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이론)의 허구성과 허망함을 설파하는가 하면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의 사상을 거침없이 말하는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1920년대 일본 열도를 폭풍처럼 휩쓸고 지나간 아나키즘(무정부주의)에 대하여 일가견을 말하기도 하는 괴짜 선생이었다.


이 괴짜선생을 흠모하고 따랐기 때문에 월초의 학생시절의 닉네임도 '괴짜'라는 뜻의 변태성이었다. 이유는 연극 음악 영화 등 다방면에 취미가 많아 장르가 바뀔 때마다 그 장르에 몰입해 버리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에 마치 카멜레온처럼 시시각각으로 잘 변한다하여 악우들이 붙여 준 별명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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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이야기다. 연재들 모두에 언급한 대로 한하균 선생이 정진업을 만났을 때 장면이 기억난다. 소설가로 등단해 시인이기도 했던 연극인 정진업이 한하균 선생의 시낭송을 듣고는 나 말고 시를 낭송할 줄 하는 이가 있네 하면서 농을 건네고 심한 바이브레이션에 대해 충고를 주는 장면. 혹시 한하균 선생은 당시 너무 유명인들 앞이라 떨려서 자연스레 바이브레이션이 나왔던 것은 아닐까.. ㅎㅎ 추측일뿐. ㅋ~ 소설가이자 시인이자 연극인, 이 타이틀이 마음에 든다.



오늘부터는 월초 정진업 선생 이야기로 접어든다.


월초 선생은 골목대장이었다. 아명은 쇠돌이다. 무쇠처럼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에서 할머니께서 지으신 이름이란다. 진업은 호적상 이름이고 월초는 향파 이주홍 선생께서 부산일보 문화부장 시절에 지어주신 아호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기 3년 전인 1916년 4월 19일 김해시 진영읍 여래리 743번지에서 부친 동래 정씨 세룡과 모친 김해 김씨 정해 사이에서 4남매 중 맏이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진영면(당시는 면이었다)의 정식 공무원도 아닌 촉탁의 자리에서 생계를 이어가기도 빠듯한, 가난하지만 선량하고 고지식한 말단 공무원이었다. 그러기에 월초는 끼니때마다 초라한 밥반찬에 죄없이 미안하고 죄송해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기 위하여 도랑에서 천렵을 하기로 마음 다진 것이다.


한 여름의 뙤약볕이 쨍쨍 내리쬐는 하계방학 중이었다고 한다. 보통학교(국민학교라는 명칭으로 바뀌었다가 지금은 초등학교로 됨) 4학년이던 월초는 할머니의 소원대로 쇠돌이답게 또래들 가운데서는 체격이 우람하고 의협심도 강해 자연스레 골목대장이 되어 있었다.


아이들을 거느리고 푸짐한 생선 반찬을 미리 연상하면서 개울가에 진을 치고 작업을 개시하려고 하는데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할 그물이 준비 불충분이었다. 사연인즉 그물 대신 방충망을 가져왔는데 그 방충망에 대꼬챙이를끼워야 어로작업을 할텐데 대꼬챙이가 없는 방충망뿐이었다.


이에 골목대장의 엄명이 하달된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꼬챙이를 끼워 완전한 그물 구실을 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비오듯 쏟아지는 땀을 훔칠 틈도 없이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비명을 질렀다. 독사에게 물린 것이다. 소년 월초는 학교에서 배운대로 상처 윗부분에 헝겊을 찢어 힘껏 동여매고 서슴없이 독을 입으로 빨아내고는 업고 달렸다.


"10리가 훨씬 넘는 그 머나먼 길을 어떻게 뛰었는지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가 없지만 그 아이를 병원 베드에 눕혀 놓고는 나 자신이 기절을 하고 만 거야." 안경 알을 닦으시면서 유년시절을 회고하며 "간이 콩알만 했다"고 술회하신 적이 있다.


어머니를 도와드리려고 했던 일이 오히려 가난한 아버지의 부담만 짊어지게 만든 이 사건은 어린 마음에도 상당한 상처를 남겼던 모양이다.


때마침 학계경진대회가 있었는데 담임 선생님의 권유로 '스스리카타(작문)' 장르에 출품하여 월초가 김해군에서 수석으로 입선하게 되었다. 글 제목은 오래되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효심을 바탕으로 한 개울가의 천렵 이야기, 다시 말해서 생각만해도 소름끼치는 그때의 이야기를 글로 엮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골목대장의 문재(文才)는 비록 경제적으로는 피해(?)를 입힌 결과가 되었지만, 아버지 어머니께 환한 기쁨을 드리게 디어 흐뭇했었다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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