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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래21

[한하균의 오동동야화]마산의 신극운동 앞 순서의 글에서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 후의 여러 단체들이 순회공연을 했다고 했다.(표참조) 표(동아일보에서 추출하여 뽑은 것)를 참고로 살펴보면, 첫째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공연하였다는 것, 둘째 고학생 돕기 운동이 태반이었다는 것, 셋째 일본제국에 대한 문화적 대항 내지는 민중계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소나기가 갑자기 퍼붓듯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위장된 문화정책의 영향에 따라 1920년대 초반(21~23년) 몇 차례 공연이 있은 뒤 일제의 마각이 드러나면서 다시금 휴면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1년에 접어들어 마산의 휴학생들과 지식청년이 힘을 합하여 극단을 창단하기로 하고 공연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발기인은 목발 사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김형윤(경남신문 전신인 마산일.. 2017. 6. 15.
[한하균의 오동동야화]회원천변의 개구쟁이 이광래 오늘은 다섯 번째 시간. 온재 이광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경남도민일보 2000년 7월 5일에 실린 이야기다. 회원천변의 개구쟁이 이러한 마산의 젖줄인 회원쳔변에서 두 이씨 형제는 남달리 우의가 투터우면서도 잘 싸웠던 모양이다. 동리 아이들과 같이 천렵을 하다가 말다툼 끝에 덩치 큰 동리 아이 하나와 광래 사이에 끝내는 육박전이 벌어지게되었다. 이에 길상(화학자, 노산 이은상의 아우)은 무조건 광래편이 되어 공동으로 적(?)을 물리친 뒤 또 다시 광래와 길상이 싸웠다고 노산은 그의 글에서 밝힌 바 있다. 어쨌거나 유년과 소년 시절의 광래는 잘도 싸우고 또 고집불통의 어린이였다고 한다. 한번은 할머니께서 새 양복(그때는 넉넉한 집이 아니면 양복 입기가 참으로 힘들었다)을 갈아입히면서 광래에게 .. 2017. 6. 14.
[한하균의 오동동야화]연극초창기 시대를 돌아보다 연극을 다시 시작하면서 경남의 초창기 연극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15년 전쯤 월간지 한국연극처럼 경남연극이 발행되기도 했기에 뒤져볼까 하다가 먼저 에 한동안 연재됐던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봐도 선생의 글이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이전의 많은 기사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찾고자 하는 게 없다 보니 더 찾게 되더라고. 전산부에 물어보니 다행히 과거 신문을 PDF판으로 제작해 놓은 게 있다고 했다. 2000년 6월 7일부터 매주 수요일 연재를 했기에 자료는 어렵지 않게 뽑아낼 수 있었다.2001년 2월 28일 건강 악화로 연재를 중단할 때까지 36편이 나왔다. 지금부터 마산의 연극사를 되짚어본다 생각하고 베껴쓰볼까 싶다.. 2017.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