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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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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할 때 아무리 신속히 받아 적는다 해도 빠트리는 것이 많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어 작업하면서 강의 내용을 수록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한국화 강좌 경남대 미술교육과 민병권 교수는 강의 자료를 아주 알차게 준비해주어 어쩌면 강의는 그냥 듣고 자료를 한 번 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을 내가 알기에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한 없이 미뤄버리는 결과를 막기 위해선 강의 때 놓치는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즉각 받아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고 이렇게 복습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일 기록한 원본을 고쳐쓸까 하다 뒤죽박죽될 가능성이 높아 아예 깔끔하게 새로 쓰기로 한다.


이날 공부한 건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미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다. 


◆ 선사시대의 원시미술

암각화가 대표적이다. "암각화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주술과 의례행위에서 나온 결과이겠지만 농경문 청동기나 청동 잔무늬거울, 동물문 견갑 등과 함께 청동기인들의 재현력과 추상화 능력을 보여준다."(클릭, 한국미술사)


이 시대 미술 역사를 더듬어보면, 기원전 6000~4000년에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토기를 제작했고 남해안에 원시 민무늬토기와 덧띠무늬토기, 아가리무늬토기 등이 발견됐다. 기원전 4000~1000년에는 두만강과 한강, 낙동강 유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됐다.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세워졌고 또 이 시기에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기원전 300년 때에는 청동기 시대로 민무늬토기가 제작됐다. 이후 원삼국시대가 시작된다.


◆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암벽이나 청동기에서 동물과 사람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토기나 골각기의 표면에서도 빗살무늬와 격자무늬 등 기하학적 문양의 선각화가 발견된다. 회화의 원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실적인 형상을 재현했던 것에 반해 천진리 암각화는 동물의 교미를 연상시키는 장면, 기하학적 무늬가 석각되어 있는데 상징적이고 기하학적인 동심원이나 방형, 잎 모양은 주술과 의례 같은 복잡한 의미 표현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한다. 고령의 개진면 양전동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생존과 제례의식에 관련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는 최초의 추상미술이 나타난다. 원시민무늬, 덧띠무늬, 빗살무늬, 돌림무늬... 민무늬는 청동기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신석기 전에도 민무늬가 있었군. 원시 민무늬와 청동기 민무늬는 구분돼야 하겠다. 청동기 민무늬는 신석기 유문토기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쓰이는 용어다.




◆ 농경문 청동기는 판 형태의 청동기다. 외형은 집 모양 같기도 하고 방패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풍요를 비는 주술적 기물로 추정한다고. 윗 부분에는 여섯개의 구멍이 있고 여기에 끈을 묶어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아래쪽에 둥은 고리가 달려있다. 앞면에는 나뭇가지에 마주앉은 두 마리의 새를 새겨놓았고 뒷면에는 밭 주위로 따비를 들고 있는 농부와 괭이로 땅을 파고 있는 농부, 키같은 들고 있는 사람 등을 새겼다.


◆ 삼국시대 미술 역사를 쭉 훑어보면, 기원후 357년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 제작, 369년 백제 칠지도 일본에 보냄, 393년 고구려 광개토왕 평양에 아홉 개의 절 건립, 408년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제작, 414년 광개토대왕비 세움, 498년 고구려 금강사 건립, 525년 백제 무령왕를 건립, 539년 고구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 제작, 544년 신라 흥륜사 건립, 553년 신라 황룡사 건립, 588년 일본 최초의 절 건립(백제 화공과 목수 파견), 610(?)년 고구려 담징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632년 신라 경주 첨성대 건립, 634년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 건립, 639년 백제 미륵사지 석탑 건립, 645년 백제 아비지 신라 경주에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646년 자장 통도사 건립, 660년 백제 멸망, 661년 신라 무열왕릉비 세움. 668년 고구려 멸망.




◆ 고구려 고분미술(강의 자료 내용 옮김)


고구려 고분미술의 꽃은 벽화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수는 집안에 30여 기, 평양과 안악 지방에 60여 기, 모두 90여 기에 이른다. 그중에 왕릉도 있으리라 추정되지만 이 기간에 왕은 10명 뿐이기 때문에 귀족의 무덤이 대종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약 350년 간 계속 만들어지면서 무덤의 형식과 벽화의 내용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양식사적 자기 발전을 보인다. 


초기(350~450) 안악3호 무덤과 덕흥리 무덤이 대표적이다. 앞칸, 안칸, 복도, 곁칸이 있는 여러칸 무덤이며 점차 곁칸이 앞칸에 흡수되면서 앞칸이 안칸보다 옆으로 긴 두칸 무덤으로 변해간다.


중기(450~550) 중기로 넘어가면서 초상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있는 생전의 모습을 작게 그렸고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무덤의 구조는 음률 여(呂)자 모양을 한 두 칸 무덤으로 변하여 행렬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활풍속도가 들어선다. 초기의 공적인 행렬도는 사적인 행렬도로 변모했으며 집안 지역의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완전히 생활풍속도로 그려진다.


후기(550~668) 중기와 후기를 가르는 큰 특징은 무덤 공간이 입구 구(口)자 형의 한칸 무덤으로 변하고 생활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천장의 구조도 정연하게 정리되는데 벽화의 내용은 영혼의 세계를 추상적, 개념적으로 장식했다. 제일 큰 변화는 사신도다. 강서큰무덤, 통구사신무덤, 호남리사신무덤은 영혼을 수호하는 사신도로 장식되면서 벽화무덤의 완벽한 변형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무덤은 점차 무덤의 구조가 단순해졌으며, 내용상에 있어 개인의 사적인 무덤임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중에는 영혼이 안주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 안악3보분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원


황해도 안악3호무덤(357년 조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조성 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묵서가 쓰여 있어 고구려 벽화의 편년을 세우는데 중요한 고분이 되었다.


피장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곁칸의 입구 양쪽에는 수문장이 있는데, 행적과 69세에 죽었음을 적어놓았다. 안악3호 무덤은 피장자에 대해 세 가지 설로 나뉘는데, 첫째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 둘째 묵서명이 명문 아래에 있는 신하의 것으로 보고 왕릉임을 주장하는 점, 셋째 고국원왕이 전사해 묻혔다는 점이다.


묵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동수(冬壽), 연의 장수다. 336년 고구려로 귀화했다. 관직을 알 수 있는 문구도 있다.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都鄕侯)" 고구려에 귀화했음에도 관직은 전연의 관직이 적혀있다.


이 무덤은 처음에 동수라는 이름 때문에 동수의 묘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왕릉으로 보고 있단다. 이유는 묘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초상화에 보면 당시 왕만이 쓸 수 있는 모자인 백라관과 왕을 상징하는 정절(왕을 상징하는 우산처럼 생긴 깃대)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미술사>(두리미디어)에 이 무덤의 주인공과 부인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참고한다.


"무덤의 준인공과 부인은 연꽃과 드리개가 장식된 보개(대궐의 용상이나 불전에 보석 등으로 아름답게 꾸민 집 모양의 장식) 안에 있습니다. 주인공과 부인의 모습은 주변이 시종들의 모습에 비해 훨씬 크고 위엄있게 그렸는데 이것은 계급의 서열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식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무덤 주인공 양옆으로 시종들을 그려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부인은 주인공을 향해 몸을 약간 튼 자세로 그렸으나 주인공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시종을 작게 하여 삼각형 구도 안에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얼굴이나 옷 주름의 묘사가 주인공에 비해 자연스럽고 세련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볼 때 고분벽화는 여려 명의 화가가 각자 영역을 분담해 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강서큰무덤의 현무.



◆ 사신도 벽화(후기) 550년 무렵 고구려 고분벽화는 앞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다. 사회 전반의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벽화 제작 경험이 많아지면서 대상 묘사에 능숙해졌다. 벽면에 물감을 칠하는 방법도 회벽에 칠하는 프레스코기법에서 고아물성 안료를 돌 벽면에 바로 그려넣는 기법으로 발전했다.


벽화의 내용 역시 더욱 개념화되어 사신도로 귀착되었다. 이 개념은 음양오행사상으로 금수목화토와 방위, 별자리, 계절, 색채, 인간의 도덕률, 신체 구조를 요약해 나타내기도 한다.


◆ 평양 호남리 사신무덤은 한칸 무덤이다. 벽화는 대리석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다른 그림은 없다.


◆ 강서큰무덤


강서큰무덤은고구려 고분병화 중 최고 명작이다. 평양 삼묘리에 있으며 이 무덤의 사신도는 고구려 사신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청룡과 백호는 가는 허리의 늘씬한 몸매로 유연사고 주작은 날개를 펴고 장쾌히 날아갈 기세이며 현무는 뱀과 거북이 뜨겁게 포홍하는 순간을 담았다. 각 도상은 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해 그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 보인다. 현무의 경우 통구사신무덤 것이 거북과 뱀이 복잡하게 뒤엉킨 반면 강서의 것은 거북 몸체를 휘감은 뱀의 목과 꼬리가 고리처럼 마주 걸려 팽팽한 긴장과 탄력을 느끼게 한다.



◆ 진파리7호분 금동판. 금동판? 머리에 쓰는 것인 줄 알았더니 머리를 베는 베개 장식품이었군.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한문화재 특별전이 열렸었는데, 북한 문화재인 이 금동판이 전시됐다. 당시 소개된 내용을 옮겨 본다. 


"5-6세기 고구려시대 작품이며, 출토지는 평양시 역포구역 소재 진파리 7호분이다. 현존 길이는 22.0㎝이며 북한 국보로 지정돼 있다. 고구려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복숭아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약간 눕힌 형태를 한다. 


외곽 테와 내부 문양 사이에는 뒷면에서 두드려 볼록하게 만든 원형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중앙에 마련한 두 겹 둥근 테두리 안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삼족오. 三足烏)를 표현했고,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 옆으로는 용을 각각 표현했다. 

금동판 뒷면에는 나무판을 댔다. 금동판과 이 나무판 사이에는 비단벌레(옥충. 玉蟲)라는 곤충의 날개를 깔아 바탕을 금녹색으로 만듦으로써 금동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끔 했다. 

애초에는 이 장식품이 피장자(묻힌 사람) 머리 부분에서 1쌍이 출토됨으로써 금동관을 구성하던 일부로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두침) 마구리 장식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맞뚫음된 금동제품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하는 예는 신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고구려와의 영향관계를 짐작게 한다."


고려 불화에 대해선 좀 쉬었다가 다시. 복습... 시간이 제법 걸리는군.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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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강이 시작됐다. 2강의 제목은 한국화 명작 감상과 이해 두 번째 시간 한국화 속에 담겨 있는 민족이 역사다. 전 시간에 배웠던 내용 잠깐 짚었다. 동양화와 서양화의 차이. 동양은 자연, 서양은 신이 되고자 했던 인식. 한국과 감상 방법. 서양은 주관적 경향이 강하지만(비형상의 예술) 한국화는 객관성이 강하다. 역사성이 강조됐다. 펠드먼 감상법 언급. (지난 시간 수강록 참고)


원삼국시대부터 이야기할 수 있을 듯. 구석기~고려의 미술사. 우리 민족의 그림에 대한 설명. 양이 너무 많아 쾌속 진행.





중국 고대. 공자. 악귀 형상을 통해 도덕심 강조. 노자. 자연 속으로 강조.


고고학. 인류가 생활하면서 남긴 유적, 유물을 발굴 수집 관찰하여 유물의 원래 모습과 존재형태를 밝히고 이를 바탕으로 전체적인 모습을 복원하려는 학문


농경문 청동기. 

충청도 어디 고물상에서 발견.  따비가 보이고.. 농경생활을 하고 있는 모습 담겨. 미적으로 아름답다기보다는 생활상 알수 있는 유물.


반구대 암각화.

최근 30점이 더 발견됐다고. 당시 내륙까지 물이 들어와 고래가 살았다. 신석기 초기. 당시 사람들이 도구를 활용해 수렵생활했다는 것을 확인.

표현의 차이. 음각과 양각. 초기엔 음각. 점차 선으로 새기기 시작. 면에서 선으로 갔다는 것은 굉장한 발전.

고구려 고분벽화. 초기 정교한 선으로 그림.


청동기 시대 들면서 태양이라든지 상징적인 그림이 나타남. 고구려 전기엔 사실적 그림, 후기엔 좌청룡 우백호 등 상징적 그림이 나타남.

마름모꼴. 제사장으로 해석. 학자들이 그렇게 해석. 제사를 관장하는 정치가. 고대인들, 특히 권력자는 죽을 때 되면 두려워 해 종교화. "지금 종교는 문화로 보면 될듯"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암각화로 나타났다. 시베리아 등지에도 암각화가 많이 나온다. 암각화를 보면서 알 수 있는 당시는 제정일치시대였다.


고구려의 고분미술.


고분. 돌을 움직이려면 노동이 필요했다. 권력이 강제노역을 시켰다는 얘기. 피장자의 권력을 엿볼 수 있는 유물이 고분이다. 


의식주 생활상이 드러난 그림이 이 시대에 나온다. 죽음을 앞두고 권력자는 가지고 있는 것을 죽어서도 가져가고 싶어 발현된 것이 벽화다. 한국화 아닌 것 같은 그림... 현대 한국인들의 생활과 의식이 담겨 있다는 점.


장군총.

집채만한 돌을 세워놓은 모습. 지렛대 이용 등 고학적 원리 알고 있었을 듯.  안에 있는 금동해무늬장식. 얼마나 아름다운가. 굉장히 강렬한 불꽃무늬가 있다. 삼족오, 용, 봉황... 뚫린 무늬로 표현. 앞 신석시 시대와는 전혀 다른 생활상을 미술품을 통해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미술.

초기- 내세관이 안정되어 있지 못해 방의 칸수가 많아. 중기-두칸 형식. 좌청룡 우백호 등 사방위 개념 나타나. 오방색. 민족혼 담겨. 후기-강서대묘. 한칸무덤.


불교 4세기 후반 380년쯤 들어와. 고구려 이어 바로 백제로 불교문화 전파. 신라는 5세기 들어와 국가 공인. 불교는 인도-중국-한반도로 흘러왔지만 신라는 배로 전달되기도.


한칸무덤이 생긴 것은 불교의 영향. 내세관이 확립되었음을 보여줌. 집권할 때 갖고 있던 것 모두 갖고 갈 필요 없이 죽을 때 편안한 안식만 필요하다고 인식이 변했음을 보여줌. 종교의 역할이 컸다는 것.


회화를 크게 나누면. 내용과 형식.





형식에 대해 얘기. 

안악3호무덤(황해도 안악). 피장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국의 고분벽화에 당시 이정도 그림이, 화려하게 그린 예술 없다. 옛날 그림을 요즘 미술가들이 이미테이션으로 그리는 데도 유럽에서 호응을 받고 있다고.


안악의 주인공에 대한 세 가지 설. 1.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 2. 앞서의 묵서명이 명문 아래에 있는 신하의 것. 3. 고국원이 전사하여 묻혔다는 점.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8X7qRBdZx3s). KBS. '안악3호무덤'. 4세기 중반 고구려인 생활상 생생하게 표현. 의장대 입구를 향해 그려져 있다. 긴 장방형. 동서 양측에 곁방. 묵서. 좌측. 동수가 69세 나이로 사망했다는 내용 있어. 


중기. 공적인 부분보다 사적인 생활이 많이 묘사되기 시작. 행렬도 생활도가 겹쳐지다가 더 후기로 넘어가면 생활상이 줄어들면서 방위 개념으로 넘어가.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jv0fi5SJyX8). 덕흥리 3호고분. 정활한 피장자가 밝혀진 무덤. 동영상 참고.


동영상(https://www.youtube.com/watch?v=XbdYPqEsXsM). 북한 수산리무덤. 고분벽화를 통해 고구려 동북아 주인공으로 살 수 있었던 이유 알 수 있음. 평안남도 위치.


널길, 널방으로 구성. 동서남북 벽화를 통해 주인공 알 수 있어. 화려한 문양으로 제 벽을 장식. 목조건물처럼 보이도록 제작.


입구의 장수 창과 칼로 무장. 무덤안에는 심하게 훼손된 북벽. 서쪽에 묘 주인이, 옆에는 남자 시중 세 명. 벽화 속에는 또 서역인으로 보이는 사람 있어 서역과의 교류 보여줌.


초기-중기 고구려 벽화는 피장자 중심. 그 후로는 피장자 중심에서 생활 상으로 시각이 바뀜. 피장자의 모습이 아주 작게 그려짐. 주인부부의 실내생활. 불교가 들어오고 나서 편안한 마음을 갖고 싶어하는 의식 반영. 씨름하는 모습의 그림 역시 이를 반영. 


이러한 생활상도 바로 넘거간 게 아니다. 중기-후기 넘어갈 때도 중복되는 그림 나타남. 불교 영향 연꽃이 많이 나타난다. 후기 사신도 벽화 양식이 나타남.


초기엔 벽회 회칠을 하고 그림을 그렸지만 강서대묘에선 벽을 갈아서(물을 이용해) 통구사진은 거칠지만 강서대묘는 촘촘한 선으로 그려려. 사실적. 영혼을 안식하게 하는 그림이 필요했던 만큼 상징적 그림. 현무. 거북과 뱀의 융합. 앞의 그림보다 섬세하고 부드럽게 표현. 내세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음.


고려(918~1392) 불화의 세계

연등과 팔관회 대표적. 불교, 정치 전면에 나타남. 화공. 몇명이 화사 빼고는 이름이 남지 않아. 그럼에도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졌던 것은 왕과 귀족을 전폭적 지원을 받았다는 것.



불화 치마 부분 녹색으로 표현된 게 많다. 오방색에서 녹색으로 변했다. 비단에 그려서 섬세하다. 고려불화, 웨딩드레스처럼 세밀하게 여러 무늬들이 사용되었다. 굉장히 예술적 가치가 있기 때문에 일본이 약탈해갔다. 참 예술의 운명이란 아이러니 하다.


이런 것들이 모인 것이 고려불화다.


크게 3가지로 나눌 수 있다. 아미타불. 석가모니불을 많이 안 그리는 이유는 실존인물이라. 아미타불은 혼자 많이 그려진다. 6가지 양상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인기가 있었다.


아미타독존도. 굉장히 아름답다. 인터넷을 해상도 높은 것 확인. 목에 있는 세 개의 주름을 삼도라고 한다. 각각 의미가 있네.  불의가 양쪽 어깨에 걸쳐있다. 왜 그런지 알아보자. 당시 불상에서 나타나는 특징적 옷장식이다.


수월관음도. 섬세한 불교무늬.


미륵하생경 변상도 하단 부분. 미륵. 미래불.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 협시보살뿐만 아니라 부처의 8대제자까지 등장. 아주 다양하게 나타나.


조선시대까지 불화 이어져.


아미타여래 독존입상도. 고려 후기. 옷을 보고 어떤 부처인지 알 수 있다고. 


아미타여려 족존좌상도. 일본 소장. 팔각대좌 화대 부분 화려. 예전보다 도상이 변화됐다. 옷이 흘러내려가는 모습. 조각에서도 나타남.


아미타여래 삼존좌상도



아미타여래 구품인. 다양한 도상 참고. 수인.


대세지보살. 지혜의 보살. 관세음보살. 자비의 보살.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보살. 그래서 굉장히 큰 모습으로 표현돼. 멀리 있는 세상의 중생 고통을 보살펴야 하기 때문에 크게 묘사.


아미타여래삼존좌상도에 보면 재미있는 모습이 있다. 두건이 있다. 무량광 무량수를 드러내기 위해 밝게 그렸다.


입상도, 자료 참고.


그림들, 법칙은 있으되 변주를 보인다. 


관세음보살을 만나려면 바다를 건너야 한다. 만화형식이 나타난다. 팔상도에도 나타난다. 눈에서 레이저를 쏘는 그림.


수월관음. 금강대좌에 앉아 있다. 거대한 산. 물에 비치는 달 풍경. 관세음보살은 여성적으로 그려져. 시스루(투명한 천 소재)에 다양한 무늬. 화려하게. 선재동자까지 있다는 것은 그림에 스토리가 있다는 것. 용왕이 그려진 수월관음도도 있다. 앞선 그림엔 주제 만 있었으나 수월관음도에는 부주제까지 그려져. 


혜허의 수월관음도. 물방울로 나타내. 


지장보살도. 다른 부처와 다른 점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자신은 부처가 되지 않기로 한 보살. 49재를 지내는 이유. 좌우 협시보살 개념. 무득귀왕. 도명존자, 아라한 모습의 그림도. 지장삼존도. 


고려불교는 내용이 중요. 물론 형식도 잘 알아야.


다음 시간엔 조선 시대의 그림. 사군자. 등등. 조선시대의 수묵화.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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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청소년극회 '세우인'이 제12회 워크숍 작품을 오는 24일과 25일 극단 메들리의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공연한다. 작품 제목은 <거기서도 보여?> 뭔 말이여? ^^ 거기가 어딜까? 사실 제목만으로 극의 줄거리를 유추하기란 쉽지 않다.


이 작품은 카롤린 필립스의 작품을 각색했다. 원제는 <커피우유와 소보로빵>. 그래 얼핏 뭔가 구체화된 영상이 떠오른다. 음. 소보로 빵을 먹을 때 커피우유를 마시면 맛있겠어. ㅎㅎ. 음식궁합으로 보면 제법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런데, 작가가 이 두 개의 음식을 대비시킨 것은 음식궁합이 잘맞아서가 아니라 서로 색깔이 다르다는 점을 강조했단 얘기다. 전학온 주인공 샘은 피부가 검다. 샘의 앙숙 보리스는 하얀 피부를 가졌다. 대신에 얼굴이 주근깨 투성이다. 그래서 커피우유라고 놀리는 보리스를 향해 화가 난 샘이 붙여버린 별명이 소보로빵이다.


원작에선 샘이 전학온 이 반이 음악경연대회에 나가야 하는데 커피우유라고 놀림받던 샘이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못하자 반 전체가 경연대회에 나가지 못하는 사태에 이르게 된다. 경연대회 규정이 모든 학급 친구가 참석해야만 출전자격이 주어지기 때문이다.


선생님의 설득으로 보리스는 샘을 찾아가 함께 연주하자고 한다. 그러는 과정에서 보리스는 자신이 샘에 대해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갖고 있음을 깨닫는다. 둘은 경연대회에서 함께 피아노 연주를 한다. 샘은 왼손으로, 보리스는 오른손으로 피아노를 치며 완벽한 화음을 이루어낸다. 책을 읽은 이는 이 장면이 감동적이라고 짚고 있다.


그러면, <거기서도 보여?>는... 큰 스토리라인은 유지되지만 등장인물이 한국의 상황에 맞춰 조금씩 캐릭터를 달리 한다. 대신 샘은 이름과 캐릭터를 크게 다르지 않게 유지했다. 그리고 원작과 달리 음악 경연대회가 아니라 댄스 경연대회다. 아이들의 멋진 춤솜씨를 볼 수 있으려나? ^^


밀양 '세우인'은 청소년 극단치고는 도내에서도 상당한 역사를 지녔다. 하긴 극단 메들리의 역사가 50년이니. 



2008년 창단해 꾸준히 열심히 ㅎㅎ. 잘 활동하고 있다. 작년 여름엔 밀양홈플러스에서 청포도페스티벌을 펼치기도 했다. 연극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지닌 재능과 끼를 다양한 공연 형태로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번 공연 잘 치르고 한뼘 성숙한 청소년으로 변신하길 바란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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