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301)
돌이끼의 작은생각 (110)
돌이끼의 문화읽기 (478)
다문화·건강가족 얘기 (20)
경남민속·전통 (15)
경남전설텔링 (74)
미디어 웜홀 (142)
돌이끼의 영화관람 (21)
눈에 띄는 한마디 (8)
이책 읽어보세요 (76)
여기저기 다녀보니 (92)
직사각형 속 세상 (92)
지게차 도전기 (24)
지게차 취업 후기 (13)
헤르테 몽골 (35)
돌이끼의 육아일기 (57)
몽골줌마 한국생활 (15)
국궁(활쏘기)수련기 (16)
Total
Today
Yesterday
04-26 00:02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올해 경남연극제 슬로건은 '연극만찬'이다. 만찬, 먹을 게 많은 저녁인데, 연극이니까 볼 게 많다는 얘기겠지. 좀 전에 <한국연극>에는 기사를 보냈지만 기사 내용 공개는 차후 하도록 하고... 우선 거창 입체가 아직 작품을 정하지 못했지만 현재까지 나온 대로 일정을 공개한다. 많은 언론, 많은 연극팬, 많은 도민이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 이 글을 쓰던 중 거창에서 연락이 왔다. 참가작을 일단 <사의 찬미>(윤대성 작 이종일 연출)로 정했다고.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거창 입체는 수난의 연속이다. 매년 연극제 참가 지원금을 받아왔지만 거창군과 갈등을 빚으면서 제작 지원금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빚을 떠안고 작품을 올려야 하는 형편이라 참가작 결정도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고.



올해 연극제는 최근 불거진 연극계 거장으로 일컬어지던 이윤택의 추문과 경남연극협회 소속의 김해 극단 번작이 대표의 사건, 연예인 조민기 등등 추잡한 사건들이 연극계를 중심으로 불거지다 보니 자칫 경남연극제에 엉뚱한 불똥이 튀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분위기다.




이번 연극제는 부대행사를 많이 준비했단다. 지역가수들의 공연도 있고 재즈 공연, 플라멩고 춤 공연, 클래식, 아코디언 공연 등 볼거리가 제법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 긴 기간 휴가 내고 공연장에 틀어박혀 있으면 좋으련만... 직장인이라는 게... 참. 뭐 어쨌든 금요일과 토요일 공연은 기본적으로 볼 수 있겠고. 본 작품들은 또 나름대로 감상문을 써볼 작정이다.


수준 높은 작품이 대거 나와서 풍성한 잔치가 되었으면 좋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고려불화에 대해서 따로 다른 자료를 참고할 필요는 없겠다. 민 교수의 강의 교재만 복습해도 고려불화에 대한 미술적 개념을 잡을 수 있겠다. 지난 주 강의 때엔 시간이 촉박해 자세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까지 교재에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랴.


<시대적 배경>


◆ 시대 상황


고려시대에 있어 가장 중요한 회화적 관점과 표현은 불화를 통해 나타났다. 고려 때에는 개국 초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왕건이 숭불정책을 펼쳤고 후손에게 <훈요십조>를 남겨 불법을 숭상하고 사찰을 보호할 것을 강조하는 등 국정에 불교가 핵심사상임을 드러냈다.


◆ 불교문화의 성행


왕건이 자손에게 훈계하려고 942년(태조 25년)에 몸소 지은 <훈요십조> 중에서 6조, ‘나의 소원은 연등과 팔관에 있는 바, 연등은 부처를 제사하고 팔관은 하늘과 5악, 명산, 대천, 용신 등을 봉사하는 것이니 후세 간신이 신위와 의식절차의 가감을 건의하지 못하게 하라. 나도 마음속에 행여 회일(會日)이 국기(황실의 제일)와 서로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고 있으니 군신이 동락하면서 제사를 경건히 행하라’ 라고 한 점을 보아 얼마나 불교 의식을 중요시했는지 알 수 있다.


◆ 고려불화의 제작 배경


고려 때에는 불교 회화가 성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배경을 이루었으며 고려불화는 국가 정책뿐 아니라 왕실과 관료의 신앙으로부터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수월관음도, 서구방, 고려 1323년, 비단에 채색, 165.5X101.5cm, 일본 센오쿠하쿠코간 소장.


◆ 고려불화 제작 기법


고려불화는 고려청자와 함께 한국미술사에 있어 가장 큰 예술적 기량을 보여준 장르다. 중국뿐 아니라 일본에까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일본의 사찰은 고려의 높은 불교문화를 부러워하여 고려의 범종, 대장경과 함께 고려불화를 봉안하고 싶어 했다. 이는 당시 일보의 문화적 욕구로서 고려말 조선초에 고려불화가 왜구들의 노략질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우선 제작기법으로 본다면, 첫째 고려불화는 광물질인 석채가 나타내는 깊고도 화려할 뿐만 아니라 금니(金泥)의 화려함이 결합되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편 완성도 높은 치밀한 형태묘사에 활달한 필선, 짜임새 있는 구성 등으로 회화미를 나타내고 있다.


둘째 비단 위에 붉은색, 녹색, 청색을 중심으로 희색과 황색이 주로 사용되었고,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석채의 귀한 안료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단청의 단순화된 색감과는 다르게 그 깊이를 더해주고 있다. 그래서 선명도 높은 원색임에도 전체적으로 절제된 느낌을 주고 있는데, 이는 화면 앞면뿐만 아니라 뒷면에서도 색을 칠하여 나타난 복채법(伏彩法)과 더불어 원색 사이에 중간색을 효과적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이다.


◆ 각종 문양과 어우러진 섬세한 표현기법


보상화문과 연화문.


밑그림은 먹선으로 형태의 윤곽을 잡은 뒤 가느다란 붉은 선을 사용해 신체 등의 테두리선을 그렸고 이 테두리 선의 주변은 붉은 색으로 엷게 선염처리하여 입체감을 주었다. 붉은색 불의(佛衣)의 옷주름선 역시 더욱 짙은 자주색의 선으로 굵게 처리해 효과를 배가시키고 있다.


목은 짧아 삼도가 가슴에 나타나고 통견(通絹)의 불의 안에는 띠매듭을 한 군의(치마)를 입었는데 외쪽 어깨에 걸쳐 입은 불의자락 안에는 내의인 승각기를 묶었던 것이라고 생각되어 장식이 비스듬히 보인다. 이는 14세기 불화에서뿐만 아니라 당시 불상들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적인 옷장식이다.


불의의 무늬로는 연화당초원문, 구름과 학이 어우러진 운봉문, 둥근 꽃문양이 시문되었다.


구름 위에 묘사된 삼단의 팔각연화대좌에는 보상화문, 국화문, 연화문 등이 들어차 있고 그 위를 오색의 영락(瓔珞 구슬목걸이)이 장엄하였는데 고려불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려한 장식대좌이다.


셋째 섬세한 표현기법. 채색과 조화를 이루는 금니는 질감에 따라 굵거나 얇게 사용되었는데 채색을 제거하면 멋진 금선묘(金線描)의 그림이 될 만큼 윤곽선에 금을 다량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이 풍부한 금니의 사용은 중국이나 일본 불화에서 발견할 수 없는 고려불화만의 주요한 특징이다.


◆ 보상화문


보상화는 연꽃의 변형으로 이루어진 상상의 꽃이다. 장수와 다남을 상징한다. 보상화문의 기본이 되는 팔메트는 이집트에서 기원전 16게기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여 알렉산더왕의 동방원정으로 인도와 중국에까지 퍼지게 된다. 양식적으로 하나의 무늬로 성립된 것은 사산조 페르시아에서였고, 우리나라에선 통일신라시대에 성행했으며 주로 단순한 장식무의나 종교적 건축 장식에 사용되었다.


◆ 연화문


연꽃을 도안화한 문양. 연꽃은 인도와 이집트 등지에서 재배되었고 불교 성립 이전부터 여러 미술품에 장식문양으로 사용되었다. 서양에서는 로터스(lotus: 로터스가 연꽃이라고? 로터스 123, 엑셀 프로그램이 나오기 전 사용되던 스프레드시트. 그게 연꽃이란 뜻이었구만. ㅎㅎ)라고 불렀고 내세에 무한한 생명을 부여하는 재생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이집트에선 해가 뜰 때 꽃이 피고 해가 지면 꽃이 진다고 하여 태양숭배사상과 관련지어 신성시했다. 인도의 가장 오래된 문헌인 <리그베다>에서도 우주만물 창조의 상징으로 비유되어 광명의 꽃, 생명의 꽃으로 상징되었다. 불교 성립 후에는 더러운 물에서 자라지만 더렵혀지지 않아 세속에 물들지 않는 청정의 상징으로 부처의 세계를 공양하는 꽃으로 비유되었다.


◆ 연화당초원문


연꽃과 당초를 결합한 무늬로 테두리 또는 바탕 문양으로 쓰인다. 당초는 줄기, 덩굴, 잎이 얽히고설킨 식물 문양을 이른다.


◆ 섬세하고 화려한 필치


고려불화가 회화에서 가장 높게 평가받는 것은 섬세하고 화려한 필치 때문이다. 이러한 이선조형(以線造形), 즉 선으로 현태를 나타내는 조형방법은 동양회화의 오랜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에 앞서 살펴보았듯이 국화, 연꽃, 구름모양, 봉황 등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문양이 한데 어우러져 회화의 섬세하고 화려한 장식적 미를 보여준다.


이공린 작 산장도(북송 후기)는 11세기 후반 작품이다. 담묵의 필선으로 담담하게 자연을 그렸다. 이처럼 동양의 회화는 필선으로 작품을 완성하는 선묘를 회화의 형식 측면에서 매우 중요시했다.


수월관음도의 불의는 짙은 브라운 계열의 바탕과 다르게 명도와 채도가 높은 선홍색의 붉은 옷으로 그려졌으며 그 위에 금니로 된 망사(시스루)의 얇은 비단천이 드리워져 있다. 여기에도 국화, 모란, 구름, 봉황무늬가 있는데, 동시대인 고려의 상감청자와 나전칠기에서도 볼 수 있다. S자 형의 원권무늬와 연꽃무늬 등은 이러한 전체적인 고려불화의 아름다움을 더해주고 있다.


<불화의 종류(도상)>


고려불화에 나타나는 도상은 매우 제한적이다 아미타여래도, 수월관음도, 지장보살도 등이 압도적으로 많고 경전을 도해한 경우에도 <관수무량경>과 <미륵하생경>으로 국한되어 있다. 그 외에 호국 기원의 의미를 담은 <나한도>와 <마리지천도>가 있지만 한두 점이 있을 뿐이다.


이것은 고려불화가 복을 비는 구복신앙과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정토신앙에 기반을 두었음을 의미한다. 정토란 부처가 사는 세계로, 오직 깨달음에 의한 거룩한 청정광명각(淸淨光明覺)의 세계다.


◆ 미륵하생경도




미륵하생경도는 석가불이 미처 구제하지 못한 중생들을 미륵이 남김없이 구제한다는 메시아 사상과 같은 내용을 그림에 담은 것이다.


화면의 상부는 미륵불이 용화수 아래서 중생을 성불시키기 위해 설법하는 장면으로 화면 전체의 3분의 2를 차지한다. 상부 중앙에 미륵불이 큼직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불상 무릎 좌우로 두 협시 보살이 삼각형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미륵불 주변에 보살 중 10대 제자들이 좌우 협시보살보다 작게 그려져 있으며 이 주위에 제석, 범천, 사천왕, 팔부중 등이 둘러싸고 있다.


화면의 하무에는 미륵불이 마지막 생에 나셔서 출가하고 성불하는 모습을 담은 내용이다. 성안의 궁궐이 장엄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오른쪽은 밭갈이의 춘경과 왼쪽에는 추수하는 추경이 그려져 당시 농경사회의 구조와 사회상, 불교사상을 엿볼 수 있다.


◆ 아미타불


고려불화에서 가장 많고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는 도상은 아미타여래도이다. 아미타여래도는 크게 독존, 삼존, 팔대보살도로 나뉘며 이들은 다시 좌상, 입상으로 나뉜다. 이렇게 변화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인기가 많다는 얘기다.


우선 아미타불의 의미를 알아본다면, 극락정토에서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佛)로 정의할 수 있다. <무량수경>에 의하면 과거 세상에 법장 비구가 ‘세자재왕여래’ 밑에서 48가지의 서약을 하고 장기간 수행을 해서 현재의 아미타불이 되었고,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어 그 정토에 왕생을 기원하는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48가지의 서약 중 제18원은 아미타불을 외우면 극락왕생할 수 있다는 것으로 후세의 중국 일본에서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의 근거가 되었다.


또한 오리엔트(이란 포함)의 메시아 사상도 무시할 수 없다. 아미타불은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로 종래의 자력불교의 전통 중에 타력불교라는 새로운 요소를 가져왔다. 자력불교에서 아미타불은 관상의 대상으로서 의미를 가지며 수행자의 성불 의지를 격려했다.


◆ 아미타여래 독존입상도


아미타여래 독존입상도. 자회, 고려 1286년. 203.5X105.1cm, 일본은행 소장.


이 작품은 1286년 충렬왕 때 자회 염승익이 그린 그림으로 그림 하단에 ‘충렬왕의 총신 염승익이 국왕과 왕비가 살아서는 종신토록 만수무강하고 죽어서는 일체의 장애를 없애 아미타여래를 만나 안락한 세계에 들어가길 바란다’는 축원의 글이 금물로 두 줄 적혀 있고 ‘1286년 5월 선사 자회 필’이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언제 누가 그렸는지 명확히 나타나고 있다.


아미타여래 독존 그림으로 신체는 왼쪽으로 향하여 움직이고 있는 듯 표현하였으나 얼굴은 오른쪽으로 향하고 있어 마치 뒤를 보는 듯하게 그려 특이한 자세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오른팔을 노출하여 길게 뻗어 보이고 왼팔을 꺾어 올린 자세 역시 부자연스럽지만 오히려 강렬한 느낌을 보여주고 있다. 법의에 새긴 보상넝쿨무늬도 지금이 17센티나 되어 지름 8센티 정도의 다른 탱화의 무늬보다 훨씬 큰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 때문에 중국에서 처음 전해졌을 때의 모습에 가까운 것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갖게 한다. 그러나 초록색 속옷의 새털구름 무늬는 상감청자의 무늬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 고려식으로 변화했음을 보여준다.


전체적 표현에 있어 상반신은 붉은 가사로 덮고 하의는 녹청색 치마를 입은 모습이다. 또한 표현 방법에 있어 묘법, 즉 선묘로 신체를 표현했고 연화 등 각종 문양은 아주 섬세하고 탄력있게 표현했다. 이러한 섬세한 표현은 가사 치마의 두껍고 힘찬 묘선이 공존하며 다양한 필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와 같은 섬세한 표현은 색상에 있어 과감한 적색과 녹색의 조화로 말미암아 전반적으로 역동감이 드러남을 알 수 있다.


일본 정법사에 있는 아미타여래 독존입상도는 전형적인 고려풍을 보여준다. 초상화에 주로 쓰이는 좌안칠푼 자세도 매우 자연스럽고 몸에는 새털구름무늬의 초록빛 속옷에 작은 원권무늬의 붉은색 법의를 걸쳤다. 표현이 사실적이고 부드러우며 섬세하다.


◆ 아미타여래 독존좌상도


아미타여래 독존좌상도, 고려 1306년, 162.5X92.7cm, 일본 네즈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크지 않지만 매우 화려해서 눈에 띈다. 화면 아래쪽 대좌 양옆 긴 화기에 “엎드려 비옵나니 세 전하께서 속히 본국으로 돌아오시길 기원하면서 새로 미타 한 탱을 그린다. 시주자는 권복수이고 1306년제 제작했다”고 적혀 있다. 여기서 세 전하란 당시 원나라에 있던 충선왕과 왕비, 그리고 충렬왕을 가리킨다.


오른손을 가슴 위로 들어 엄지와 장지를 맞댈 듯 구부리고 왼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옆으로 하여 엄지와 무명지를 맞댄 전형적인 아미타불의 설법인 손모양이다. 두 손과 드러난 발바닥에는 금니의 법륜이 그려져 있으며 넓은 가슴에도 금니의 만(卍)자가 뚜렷이 새겨져 있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뛰어난 점은 화대가 매우 화사한 점이다. 팔각의 화대 위에 연화꽃이 있고 그 위로 옷단이 내려오게 하여 일부러 앞을 가리게 하는 독특하고 아름다운 좌상의 그림이라 하겠다.


◆ 아미타여래 삼존좌상도




이 작품은 아미타여래가 높은 대좌 위에 올라 앉아 설법인을 하고 있으며 대좌 양옆으로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비스듬히 마주보고 있다. 여래의 법의에는 원권무늬가 또렷하고 두 보살은 투명한 흰 사라를 걸치고 있는데 관음보살의 모자에는 화불이, 세지보살의 모자에는 정병이 그려져 있다.


세지보살은 정확하게는 대세지보살로 불교에서 지혜로 중생을 이끄는 보살을 말한다. 보관에 수병을 다는 것이 특징으로 관음과 함께 아미타불의 협시로 아미타삼존을 형성하는데 단독 형상은 없다.


보살상은 대좌 양옆, 여래의 무릎 아래쪽에 위치하며 신체의 크기도 아주 작게 표현되었다. 이걸 주대종소법이라지. 엄격하고 권위적인 구도를 통해 화면의 통일성을 돋보이게 한 작품.


◆ 아미타여래 삼존입상도


아미타여래삼존입상도, 고려, 100.9X54.2cm, 일본 모아이미술관 소장.


일본 모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어찌 우리나라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없어. ㅠㅠ 삼존 모두 좌안칠푼의 자세로 서 있다. 중생을 극락세계로 맞이하는 모습이란다. 아미타여래는 래영인(사람이 임종할 때 불보살이 그 사람을 맞아준다는 수인)을 했고 보살들은 각기 지물들을 들고 있다. 이 그림에서도 고려 탱화의 엄격성을 보여주며 관음보살과 세지보살이 작게 그려졌다.


삼성 리움미술관에 보관돼 있는 아미타여래 삼존입상도는 협시보살에 세지 대신 지장이 등장했다. 대중적 인기가 많은 아미타여래와 관음, 지장이 트리오를 이루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중생 구제의 의무를 지고 있는 관음보살은 고개를 숙이고 눈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래서 다른 아미타 탱화는 구도가 다르다. 정제된 화면 속에서 역동성을 느끼게 하고 있다.


◆ 아미타여래 팔대보살도


아미타여래 팔대보살도, 고려 1320년, 177X91.2cm, 일본 마쓰오데라 소장.


팔대보살도의 등장인물은 가운데 아미타를 중심으로 관음, 문수, 보현, 미륵, 지장, 금강장, 제장애, 허공장 보살이다. 그런데 일본 나라현 마쓰오데라(송미사)에 소장된 이 그림에는 허공장 보살 대신 대중과 친숙한 세지보살로 대체됐다. 화대 위에 앉은 아미타의 옷자락 하나가 가운데로 내려와서 회화적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는 평이다. 이 형식의 그림은 고려 불화에 몇 점 전해오지 않는다.


◆ 서구방 필 수월관음도


고려 탱화 수월관음도의 기준작은 센오쿠하쿠코칸(泉屋博古館)에 소장된 서구방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작품 왼쪽 하단에 ‘1323년 6월 내반종사 서구방이 그림’이라고 적혀있다. 내반종사는 고려 충렬왕 때 종9품 벼슬이란다. 이 작품의 매력은 무엇보다 채색과 옷무늬의 아름다움이라고. 폭포수를 이루어 물결치는 금강대좌는 청록산수화에서 보이는 필법이고 이는 조선 때 궁중 장식화에도 나타난다.


붉은 색의 법의는 귀갑무늬에 국화꽃 사방 연속무늬로 장식했다. 한쌍의 연잎과 연꽃으로 구성된 타원형 무늬가 화려함을 더해준다고. 사실 이런 평이 내겐 좀 어려워. 어떤 게 아름다운 것인지 잘 모르겠거든. 법의 위에 흰 사라를 걸쳤고 이는 보살의 팔뚝과 법의의 무늬가 그대로 비쳐 섬세함을 더해준다고. 사라가 투명한 옷을 말하는 것인 모양이다. 깁이라고도 하고 명주실로 짠 비단을 일컫는 말이군.


왼쪽 아래에 있는 선재동자는 매우 공손한 모습인데 관음보살의 얼굴은 미수가 없이 정제된 모습이다.


◆ 용왕을 곁들인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고려, 227X125.8cm, 일본 다이도쿠지 소장.


일본 다이도쿠지(교토 대덕사)에 소장된 이 수월관음도에는 용왕과 권속들이 그려져 어떤 스토리텔링이 스민 명작으로 꼽힌다. 이 불화는 기존의 것보다 2배 정도 큰데 그 이유는 이런 스토리텔링을 담아 면밀히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선재동자가 연잎을 타고 오른쪽으로 밀려나 있는 게 다른 수월관음도와 다른 점이라고. 원래 선재동자가 있던 왼쪽 하단에는 수월관음을 공양하는 용왕과 용녀들이 자리차지했다. 이 그림에 나오는 이야기는 강원도 양양에 있는 낙산사 창건설화와 통하는 바가 있는데, 용왕과 용녀의 표현에는 궁중문화의 분위기가 나며 전반적으로 인물묘사에서 몸동작과 복식 등이 화려하게 표현되었다. 음, 그래서 뛰어난 수작이라고.


◆ 혜허 필 수월관음도


수월관음도, 혜허, 고려. 144X62.6cm, 일본 천조사 소장


승 혜허가 그린 이 그림 역시 일본 천조사(도쿄에서 가장 큰 절, 센소시)에 소장돼 있다. 그림의 크기는 작다. 특이한 점이, 물방울 속에 관음보살이 있다. 오른손에는 버드나무 가지가 왼손에는 정병을 들었다.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동시에 손동작은 아주 유연하다. 관음이 법을 구하러 온 선재동자를 따뜻하게 맞이하는 모습이란다.


◆ 지장독존도


지장보살, 현세의 이익과 내세에서 지옥으로 떨러지는 것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그래서 일반 대중에게는 인기만점이다. 명부의 세계를 주재하기에 염라대왕, 평등대왕 등 십왕을 거느리고 저승에 온 자를 49일 동안 심판해 천상의 자리를 배정한다. 


지장보살은 중생이 구제될 때까지 자신은 부처가 되는 것을 포기했기 때문에 삭발한 모습을 하고 있다. 아니면 머리에 두건을 썼거나. 삭발한 지장은 승형지장, 두건 쓴 지장은 피모지장이라 부른다. 손에는 여의주아 주석으로 만든 석장이 있다. 석장은 대체로 고리가 여섯 개여서 육환장이라고 한다.


일본 선도사(후쿠오카 젠도지) 소장의 이 그림은 세로가 111센티, 다로 43.5센티로 그리 크지 않다. 얼굴은 비교적 앳돼 보이고 머리는 각이 졌다. 승형 민머리다. 육환장을 양산으로 위아래로 잡고 있으며 허리는 오른쪽으로 약간 틀었다. 미묘한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데 자태가 온화하다. 


찬란한 금빛 두광은 면적이 넓고 가사는 청록색으로 아주 자연스런 옷맵시를 하고 있다. 선묘 역시 유연하게 표현됐다.


◆ 지장삼존도



일본 엔가쿠지(가마쿠라 원각사)에 소장. 지장보살은 많은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 비서실장 격인 무독귀왕, 도명존자를 좌우 협시로 그린 게 지장삼존도다. 이 작품은 지장삼존도의 전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지장이 대좌에 가부좌를 틀고 한손엔 여의주를 들고 있다. 육환장은 왼쪽의 도명존자가 들고 있다. 지장의 오른쪽 무독귀왕은 경함을 받쳐들고 있다.


무독귀왕은 왕의 풍모로 품위있게 그려졌고 도명존자는 아라한처럼 수도승 표정이다. 역시 주대종소, 삼각구도로 엄격함을 표현했다. 지장삼존도의 다른 그림들은 무독귀왕과 도명존자를 사천왕으로 대체해 그린 것들도 있다.


◆ 지장시왕도


지장에겐 권속이 많아 좋겠다. 일본 세이카도(도쿄 정가당)문고(사립미술관)에 소장된 지장시왕도를 보면 열명의 시왕이 지장 아래에 배석해 있다. 명부의 실무를 맡은 캐릭터다. 여기엔 열 명이지만 지장의 권속은 20명이 넘는단다. 그냥 통틀어 지장시왕이라고 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강의할 때 아무리 신속히 받아 적는다 해도 빠트리는 것이 많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어 작업하면서 강의 내용을 수록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한국화 강좌 경남대 미술교육과 민병권 교수는 강의 자료를 아주 알차게 준비해주어 어쩌면 강의는 그냥 듣고 자료를 한 번 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을 내가 알기에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한 없이 미뤄버리는 결과를 막기 위해선 강의 때 놓치는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즉각 받아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고 이렇게 복습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일 기록한 원본을 고쳐쓸까 하다 뒤죽박죽될 가능성이 높아 아예 깔끔하게 새로 쓰기로 한다.


이날 공부한 건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미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다. 


◆ 선사시대의 원시미술

암각화가 대표적이다. "암각화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주술과 의례행위에서 나온 결과이겠지만 농경문 청동기나 청동 잔무늬거울, 동물문 견갑 등과 함께 청동기인들의 재현력과 추상화 능력을 보여준다."(클릭, 한국미술사)


이 시대 미술 역사를 더듬어보면, 기원전 6000~4000년에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토기를 제작했고 남해안에 원시 민무늬토기와 덧띠무늬토기, 아가리무늬토기 등이 발견됐다. 기원전 4000~1000년에는 두만강과 한강, 낙동강 유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됐다.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세워졌고 또 이 시기에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기원전 300년 때에는 청동기 시대로 민무늬토기가 제작됐다. 이후 원삼국시대가 시작된다.


◆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암벽이나 청동기에서 동물과 사람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토기나 골각기의 표면에서도 빗살무늬와 격자무늬 등 기하학적 문양의 선각화가 발견된다. 회화의 원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실적인 형상을 재현했던 것에 반해 천진리 암각화는 동물의 교미를 연상시키는 장면, 기하학적 무늬가 석각되어 있는데 상징적이고 기하학적인 동심원이나 방형, 잎 모양은 주술과 의례 같은 복잡한 의미 표현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한다. 고령의 개진면 양전동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생존과 제례의식에 관련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는 최초의 추상미술이 나타난다. 원시민무늬, 덧띠무늬, 빗살무늬, 돌림무늬... 민무늬는 청동기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신석기 전에도 민무늬가 있었군. 원시 민무늬와 청동기 민무늬는 구분돼야 하겠다. 청동기 민무늬는 신석기 유문토기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쓰이는 용어다.




◆ 농경문 청동기는 판 형태의 청동기다. 외형은 집 모양 같기도 하고 방패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풍요를 비는 주술적 기물로 추정한다고. 윗 부분에는 여섯개의 구멍이 있고 여기에 끈을 묶어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아래쪽에 둥은 고리가 달려있다. 앞면에는 나뭇가지에 마주앉은 두 마리의 새를 새겨놓았고 뒷면에는 밭 주위로 따비를 들고 있는 농부와 괭이로 땅을 파고 있는 농부, 키같은 들고 있는 사람 등을 새겼다.


◆ 삼국시대 미술 역사를 쭉 훑어보면, 기원후 357년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 제작, 369년 백제 칠지도 일본에 보냄, 393년 고구려 광개토왕 평양에 아홉 개의 절 건립, 408년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제작, 414년 광개토대왕비 세움, 498년 고구려 금강사 건립, 525년 백제 무령왕를 건립, 539년 고구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 제작, 544년 신라 흥륜사 건립, 553년 신라 황룡사 건립, 588년 일본 최초의 절 건립(백제 화공과 목수 파견), 610(?)년 고구려 담징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632년 신라 경주 첨성대 건립, 634년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 건립, 639년 백제 미륵사지 석탑 건립, 645년 백제 아비지 신라 경주에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646년 자장 통도사 건립, 660년 백제 멸망, 661년 신라 무열왕릉비 세움. 668년 고구려 멸망.




◆ 고구려 고분미술(강의 자료 내용 옮김)


고구려 고분미술의 꽃은 벽화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수는 집안에 30여 기, 평양과 안악 지방에 60여 기, 모두 90여 기에 이른다. 그중에 왕릉도 있으리라 추정되지만 이 기간에 왕은 10명 뿐이기 때문에 귀족의 무덤이 대종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약 350년 간 계속 만들어지면서 무덤의 형식과 벽화의 내용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양식사적 자기 발전을 보인다. 


초기(350~450) 안악3호 무덤과 덕흥리 무덤이 대표적이다. 앞칸, 안칸, 복도, 곁칸이 있는 여러칸 무덤이며 점차 곁칸이 앞칸에 흡수되면서 앞칸이 안칸보다 옆으로 긴 두칸 무덤으로 변해간다.


중기(450~550) 중기로 넘어가면서 초상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있는 생전의 모습을 작게 그렸고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무덤의 구조는 음률 여(呂)자 모양을 한 두 칸 무덤으로 변하여 행렬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활풍속도가 들어선다. 초기의 공적인 행렬도는 사적인 행렬도로 변모했으며 집안 지역의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완전히 생활풍속도로 그려진다.


후기(550~668) 중기와 후기를 가르는 큰 특징은 무덤 공간이 입구 구(口)자 형의 한칸 무덤으로 변하고 생활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천장의 구조도 정연하게 정리되는데 벽화의 내용은 영혼의 세계를 추상적, 개념적으로 장식했다. 제일 큰 변화는 사신도다. 강서큰무덤, 통구사신무덤, 호남리사신무덤은 영혼을 수호하는 사신도로 장식되면서 벽화무덤의 완벽한 변형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무덤은 점차 무덤의 구조가 단순해졌으며, 내용상에 있어 개인의 사적인 무덤임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중에는 영혼이 안주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 안악3보분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원


황해도 안악3호무덤(357년 조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조성 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묵서가 쓰여 있어 고구려 벽화의 편년을 세우는데 중요한 고분이 되었다.


피장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곁칸의 입구 양쪽에는 수문장이 있는데, 행적과 69세에 죽었음을 적어놓았다. 안악3호 무덤은 피장자에 대해 세 가지 설로 나뉘는데, 첫째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 둘째 묵서명이 명문 아래에 있는 신하의 것으로 보고 왕릉임을 주장하는 점, 셋째 고국원왕이 전사해 묻혔다는 점이다.


묵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동수(冬壽), 연의 장수다. 336년 고구려로 귀화했다. 관직을 알 수 있는 문구도 있다.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都鄕侯)" 고구려에 귀화했음에도 관직은 전연의 관직이 적혀있다.


이 무덤은 처음에 동수라는 이름 때문에 동수의 묘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왕릉으로 보고 있단다. 이유는 묘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초상화에 보면 당시 왕만이 쓸 수 있는 모자인 백라관과 왕을 상징하는 정절(왕을 상징하는 우산처럼 생긴 깃대)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미술사>(두리미디어)에 이 무덤의 주인공과 부인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참고한다.


"무덤의 준인공과 부인은 연꽃과 드리개가 장식된 보개(대궐의 용상이나 불전에 보석 등으로 아름답게 꾸민 집 모양의 장식) 안에 있습니다. 주인공과 부인의 모습은 주변이 시종들의 모습에 비해 훨씬 크고 위엄있게 그렸는데 이것은 계급의 서열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식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무덤 주인공 양옆으로 시종들을 그려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부인은 주인공을 향해 몸을 약간 튼 자세로 그렸으나 주인공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시종을 작게 하여 삼각형 구도 안에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얼굴이나 옷 주름의 묘사가 주인공에 비해 자연스럽고 세련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볼 때 고분벽화는 여려 명의 화가가 각자 영역을 분담해 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강서큰무덤의 현무.



◆ 사신도 벽화(후기) 550년 무렵 고구려 고분벽화는 앞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다. 사회 전반의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벽화 제작 경험이 많아지면서 대상 묘사에 능숙해졌다. 벽면에 물감을 칠하는 방법도 회벽에 칠하는 프레스코기법에서 고아물성 안료를 돌 벽면에 바로 그려넣는 기법으로 발전했다.


벽화의 내용 역시 더욱 개념화되어 사신도로 귀착되었다. 이 개념은 음양오행사상으로 금수목화토와 방위, 별자리, 계절, 색채, 인간의 도덕률, 신체 구조를 요약해 나타내기도 한다.


◆ 평양 호남리 사신무덤은 한칸 무덤이다. 벽화는 대리석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다른 그림은 없다.


◆ 강서큰무덤


강서큰무덤은고구려 고분병화 중 최고 명작이다. 평양 삼묘리에 있으며 이 무덤의 사신도는 고구려 사신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청룡과 백호는 가는 허리의 늘씬한 몸매로 유연사고 주작은 날개를 펴고 장쾌히 날아갈 기세이며 현무는 뱀과 거북이 뜨겁게 포홍하는 순간을 담았다. 각 도상은 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해 그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 보인다. 현무의 경우 통구사신무덤 것이 거북과 뱀이 복잡하게 뒤엉킨 반면 강서의 것은 거북 몸체를 휘감은 뱀의 목과 꼬리가 고리처럼 마주 걸려 팽팽한 긴장과 탄력을 느끼게 한다.



◆ 진파리7호분 금동판. 금동판? 머리에 쓰는 것인 줄 알았더니 머리를 베는 베개 장식품이었군.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한문화재 특별전이 열렸었는데, 북한 문화재인 이 금동판이 전시됐다. 당시 소개된 내용을 옮겨 본다. 


"5-6세기 고구려시대 작품이며, 출토지는 평양시 역포구역 소재 진파리 7호분이다. 현존 길이는 22.0㎝이며 북한 국보로 지정돼 있다. 고구려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복숭아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약간 눕힌 형태를 한다. 


외곽 테와 내부 문양 사이에는 뒷면에서 두드려 볼록하게 만든 원형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중앙에 마련한 두 겹 둥근 테두리 안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삼족오. 三足烏)를 표현했고,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 옆으로는 용을 각각 표현했다. 

금동판 뒷면에는 나무판을 댔다. 금동판과 이 나무판 사이에는 비단벌레(옥충. 玉蟲)라는 곤충의 날개를 깔아 바탕을 금녹색으로 만듦으로써 금동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끔 했다. 

애초에는 이 장식품이 피장자(묻힌 사람) 머리 부분에서 1쌍이 출토됨으로써 금동관을 구성하던 일부로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두침) 마구리 장식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맞뚫음된 금동제품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하는 예는 신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고구려와의 영향관계를 짐작게 한다."


고려 불화에 대해선 좀 쉬었다가 다시. 복습... 시간이 제법 걸리는군.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