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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3분 지각. 벌써 강의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조선 말기 회화를 중심으로 공부를 한다.
조선 말기 회화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선수는 추사 김정희다. 그게 고증학과 직결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 글이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 그 전엔 그림 옆에 발문이라든지 그렇게 글이 섰지만 이제 그림과 함께 한폭을 이루게 된다는 얘기다.
사실적 그림에서 감흥으로. 김명국의 달마도. 술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인물. 오원 장승업도 마찬가지.
꼼꼼하게 잘 그리는 것보다 그림에 감흥이 들어간 그림이 좋은 그림으로 평가.
후기엔 고증학이 유행하면서 준법이든 묘법이든 문자향과 서권기(많은 독서와 학문을 통해서 형성되는 지성과 인품이 예술적 통찰로 승화되는 것)가 들어간다.
추사 김정희, 금석학, 중국 연행, 주자학, 이기철학. 너무 형이상학적인 것만 새악한 조선 초중기. 일반 백성 생활과 거리가 먼 가치만 추구. 오랑캐라고 생각한 청나라의 문명을 보고 깜짝 놀라. 조선보다 훨씬 우위에 선 문화를 발견.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를 보임. 실학파. 박제가와 함께 중국 연행.
동영상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tnJi__9iOc)
추사체는 예서를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김정희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고 청대의 학예일치사상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떴다.
서화일치론. 누구, 당대의 장언원. 원대의 조맹부는 서화용필동법.-> 서화동원.
조선말기 서권기를 중시한 예술사조로 후기의 독자적 예술이 빛을 잃게됐다.
서양에서 사진기 등장으로 초상화 그려 먹고 살던 사람, 살길 사라져. 그래서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 형상 중심의 미술이 심상을 중요시하는 추상미술로 흐름. 한국에선 서체를 중요시하는 남종문인화로의 예술적 전환 이루어짐.
현대미술, 모스트모더니즘. 작가의 생각, 감상자의 생각 일치될 필요 없어. 감상자에게 몫을 남겨주는 것. 그게 현대미술의 경향. 하나의 충격요법이다.
한국화를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을 노래하는 본연의 미술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
사람들이 손잡고 강강수월래하는 그림. 미니멀한 그림. 최소의 단위. 반복적으로 형상됨.
추사는 형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증적인 것을 강조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신라 때 555년. 만들어졌다. 김정희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유물이다. 글자는 전서. 상형문자. 잘못해석한 것을 이끼를 걷어내고 실증 고증해보니 신라의 순수비라는 것. 하나의 비석도 예술이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혔고 누가 무슨 관직을 가졌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림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공부가 필요하다.
불이선란도. 너무 자화자찬에게 빠진 내용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농담을 말한 것. 시서화일치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다.
중국 양주에 8명의 괴이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돈이 있는 곳에 예술가들이 몰린다. 문인들이야 기본 재산이 있으니 괜찮은데.... 후기에는 도 그렇지만은 아니었다고.
추사 귀향을 많이 갔다. 세한도, 이상적이라는 제자가 우정을 지킴. 당대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 뭐 요새라고 다를 바 없지만.
추사 그림, 추상성이 강하다.
불교에서 선종, 스스로 깨닫는 것.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깨달으면 선종화를 그릴 수 있다. 앞서 달마도 역시 선종화다. 부지불식간에 깨닫는 것.
불이선란도. 추사체의 특성은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필획이 매우 굳건하고 거칠다. 또 마치 선화를 보는 듯 유희미가 돋보이고 필획이 제각기 개성있게 배열된 독특한 구성미를 보인다. 해서체처럼 반듯하게 꼼꼼하게 쓰지 않았다. 안평의 송설체 비교.
위 동영상(28분 지점) 참고. (계산무진) 추사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 명작.
전서를 도장에 넣는 것. 전각. 추사 학문적 경향이 예술에 담겼다. "난을 치는 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것과 똑같다."
<불이선란도> 내용.
난은 치지 않은지 이십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려냈구나.
묻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 경지가 바로 유마 불어선일세.
불립문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어떤 사람이 강요하면 구실을 삼아 마땅히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사절하겠다. 만향,
난은 미인의 향? 자신을 늙었다고 했는데 이건 현명하다는 얘기.
한번에 그려냈는데 두 번다시 못그릴 마음에 드는 그림이다. 자화자찬이라기보다는 문인화가의 숙명적인 것. 창피한 것을 안 남기려고 맘에 안드는 것은 다 찢어버리는데...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만 그릴 수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로노인.
초서와 예서,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고연재
소산 오규일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
문자향, 서권기에 대해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
내 눈에 대나무 내 마음이 대나무. 사실적 대상, 마음 속에는 사실적이지 않은 대상. 생각이 담긴 것. 이게 예술이다.
동양의 예술관 서양보다 일찍 깨쳤다. 회화의 원리를 일찍 깨달았다.
잔서완석루. 기본적으로 예서체를 바탕으로 했지만 자형은 윗선에 맞추고 아래로 내리치듯 썼다. 거칠다. 글씨의 의미가 중요한 작품.
세한도 관련 동영상 참고.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갈필. 국보. 그림 안에는 추사의 인생 굴곡과 문인끼리의 우정 담겨. 오군자, 육군자, 소나무와 연꽃 추가.
추사는 명대 동기창의 철학을 숭상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걸은 사람이라야 예술을 할 수가 있다는 것. '독만권서행만리'. 동기창의 화론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으면 가슴 속에서 온갖 더러운 것이 제거되어 절로 구학이 마음 속에서 생기고 산수의 경계가 만들어져 손 가는 대로 그려내니 이 모두가 이루어진 것이 산수의 전신(傳神)이다."
시서합일. 추사의 작품은 글 그림을 따로 놓고 논할 수 없다.
제자 중에 추사 영향 많이 받은 사람, 우봉 조희룡. 매화를 좋아해 <호산외사>를 편찬하기도. 묵란도. 나름 개성적이나 추사보다 자유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묵죽과 묵매는 청대의 양주팔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사군자. 매난국죽. 주변은 어두운데 하얗게 피어있는 꽃, 매화. 이게 매화가 사군자 안에 낀 이유.
깨어져 있는 글씨체. 중국 양주 작가들의 그림체를 많이 본받았다. 독자적인 화풍 드러내. 필법은 추사 닮고.
양주팔괴란? 중국, 청 ∙ 건륭년간(1736~95),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들을 말한다. 금농(金農), 황신(黃愼), 이선,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을 가리키나, 그 외에도 고봉한(高鳳翰), 민정(閔貞)을 더하기도 한다. 화암(華嵒)을 추가하여 양주화파라고도 부른다. 대운하와 소금 거래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상업 도시 양주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왈관(馬曰琯) ∙ 마왈로 등 대부호들과 교우(僑寓)하여 지원을 받기도 했다. 화풍이나 화제의 공통점은 없었으며, 사왕오운(四王吳惲) 이래 이미 정형화되어 있던 문인화의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제작태도를 보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미술대사전에서 발췌)
소치 허유, 허씨 허백련 일가의 첫째. 너무 중국풍이다. 전남의 남종문인화 계보를 만든 주인공.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의재 혀백련을 통해 전통을 이어갔다고. 추사의 고증학적 세계관 전승. 예찬과 황곡망의 그림을 방작하는 태도를 보였다. 문인들의 쓸쓸함을 묘사.
원경과 근경 사이에 물을 놓음으로써 노자 도가에 나오는 상선약수를 표현했다.
고람 전기(30세 요절) 추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인터미션.
근대 한국화.
근대 산수화의 변모
조설말기 대가인 오원 장승업 제자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 세운 서화미술회 강습소를 통해 근대 산수화 시작. 근대 6대가 중 의제 허백련을 제외한 대부분 이곳 출신. 초기 화풍은 산수화풍.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풍경을 실제로 그렸다는 점에서 겸재의 진경산수에 가까워. 하지만 근대의 실경산수는 외물을 중시한 것이고 후기 진경산수는 산수의 내재적 기운의 표출이란 점에서 차이남.
또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더욱 실제적인 실경 위주로 흘렀고, 근대의 산수화는 실사에 가까운 풍경화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 중국의 '몽롱파' 화풍이 들어온 것도 실경산수화의 특징.
미술 등용문, 일제가 담당하게 되면서 채색화 위주로 감. 이때 그림들은 한국의 자연미를 표출하고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의 표현을 과감히 차용, 산수의 정취를 표현함.
오원 장승업 취화선. 지붕 위에서 막걸리 들고 소리치는 모습. 너무 추사 일파의 그림만 중시.. 화원의 그림을 천박하게 취급받는데 분노.
임모. 베껴그린 그림. 보는 앞에선 멸시. 몰래 그려 보여준 것에 감탄하는 장면 기억. 산수와 영모에 두루 재능을 보였고 근대의 대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스승으로 근현대를 잇는 중요한 화가라 할 수 있다고.
장승업의 호취도. 매의 날카로움. 두마리, 둘 다 경계. 긴장감. 한번에 그려낸 그림. 호방한 장승업의 성향을 보이는 작품. 붓에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다. 동서양의 그림 차이. 동양은 창처럼 뽀족하다. 서양은 넓적하지만.
취화선 영화처럼 개성적 인물은 아니다. 중국풍의 그림이 많다. 화원이었기에 꼼꼼한 그림도 잘 그렸다. 여자와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왕이 부르면 끝인데.. 다 때려치우고 도망. 독특한 사람이었긴 맞는데... 중국풍을 많이 그렸다.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작품.
장승업의 회화기법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으로 이어져 하나의 근대적 전형을 이루었는데,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실경을 기반으로 미점과 피마준법으로 표현된다. 심전과 소림이 설립한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배출된 조선 후기 6대가 중 현재 미술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이상범과 변관식은 한국 산야가 가즌 야취의 미학을 잘 나타내고 있단다. 실경산수를 한국적 소재에서 찾아 자주적 미학을 찾고자 했다는 점.
근대 6대가. 변관식, 이상법, 노수현, 박승무, 김은호, 허백련. 이 사람들 중 왜색시비에 휘말린 작가도 있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는데... 안타까운 일.
1950~60년대는 왜색 화풍을 탈피하는 한국화의 경향을 보인다. 1946년 서울대에 최초로 미술과가 생기면서 왜색 탈피 문인화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추상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추상화로 양식이 변모되기도 했다.
대표적 인물이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 1,2차대전 후 기존 가치의 상실에 대한 주목으로 실존의 양태를 철학적으로 파고들었으며 한국에서는 앵포르멜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미술운동 차원에서 도입됐다. 1957~58년 무렵이다. 한국전쟁 후 사회적 상황이 전후 서구와 흡사했다는 점에서 앵포르멜 이념과 표현방법이 쉽게 접목될 수 있었다.
앵포르멜?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들여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의 이지적인 측면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고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나타났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M.타피에는 이러한 경향의 화가들의 그룹전을 기획하고 소책자 <또다른 예술:un art autre>(1952)을 발간, 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앵포르멜(非定形)이라 했다.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공간이나 마티에르에만 전념함으로써 또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것으로 그것은 기성의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무정형 ·무한정한 자유가 오히려 표현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 포트리에, 뒤뷔페, M.마튜, G.마티외 등이 있으며,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어 추상 표현주의뿐만이 아닌 권영우의 초현실주의, 장운상의 큐비즘까지 선보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반대로 현식만 새로운 것을 추구했을 뿐이지 동양 전통적 사상을 현대화한 것은 아니라는 맹점을 지닌다.
새로운 추상화의 집단화된 운동을 추진한 화단은 백양회와 묵림회를 들 수 있다. 백양회의 주 멤버는 김기창, 박래현 등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주로 국전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이었다. 운보처럼 파격적 추상을 표현하는가 하면 종래의 형식주의를 표방하는 작가들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화단은 전통적 화풍에서 벗어나려 한 현대적 조형운동으로 기록되기는 하나 형식에선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묵림회 주 멤버는 서세옥, 민경갑, 정탁영, 전영화 등. 전통 방식의 동양화에서 서구의 사조를 받아들여 새로운 실험을 구사했다. 아방가르드적인 동양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서세옥의 미니멀리즘 경향 그림은 이후 이우환에게 양향을 미친다. 주로 서울대 출신의 화가들로 구성. 수묵화에 정탁영, 신영상, 채색을 강조한 안상철, 안동숙 등이 포진해 있다.
특히 안상철은 전통 동양화에서는 보기 힘든 입체 오브제를 활용하거나 종이를 찟어 새로운 공간감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가다. 안동숙은 영적인 화면을 주로 구축했다. 세밀한 채색, 디테일한 구성이 돋보였다. 묵림회는 앵포르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70~80년대 한국화의 경향은 실경산수의 부흥,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변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근대화단 6대가 중에 소정 변관식과 청전 이상범의 예술관이 재조명되었고 상업화랑이 등장하면서 추상 실험양식에 몰두했던 40대 작가까지도 이러한 열풍에 동조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아파트 열풍이 불면서 실경산수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아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1980년대 수묵화운동이 일었는데, 수묵의 조형성을 극대화하면서 한국 본질적인 미와 정신을 강조했다. 단색조의 수묵화야말로 한국인의 고유 미의식을 드러낼 수 있어 전통과 변혁을 한꺼번에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묵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송수남의 '긴강', 오숙환의 '빛', 김호득의 '폭포', 이종목의 '물처럼' 등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컬러TV가 급속도로 번지면서 한국화단에서도 채묵화가 유행하게 되었다. 덩달아 민화의 현대적 표현을 모색하기도 했다. 박생광의 그림들이 그러하다. 박생광의 그림은 특히 오방색이 많이 구현되었는데, 이게 오히려 왜색풍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박생광은 진주 출신의 화가다.
박생광과 함께 오방색을 즐겨 활용한 화가 중에 전혁림이 있다. 그는 통영 사람이다. 주로 통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은 오행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도시화가 이루어진 지금, 이 상항에서 한국화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현재의 모습이 회화의 주제와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가들은 한국화의 전통성 인식보다는 세계화된 미술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 여기 있음'.
정리하자면, 근대 한국화에서 현대 한국화로 건너오면서 변화된 것은 먼저 준법의 파괴가 일어났으며, 구도의 변화, 현대적 표현 방식 연구, 서양 조형양식 영향, 그리고 재료에서도 전통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매체를 차용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