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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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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대학교 사범대 음악교육과에 재직 중인 이종훈 교수가 오는 29일 오후 7시 30분 마산 3.15아트센터 소극장에서 독창회를 연다. 그의 여덟 번째 독창 무대다.


나는 공연예술을 많이 좋아함에도 재작년 초 한국의 폴 포츠라 불리던 테너 김승일 씨의 독창회를 3.15아트센터에서 본 것 말고는 클래식 독창회를 별로 본 적이 없다. 한 번 본 것도 취재차. 해서 이번 이 교수의 공연은 은근 기대가 된다. 이 교수는 배움도 많지만 공연 경력도 상당하다.


공연자의 경력을 살짝 살펴보는 것도 감상법의 하나다. 이 교수는 현재 교수로 있는 경남대 음악교육과를 졸업하고 계명대 대학원 성악과를 거쳤다. 이후 이탈리아 파우스토 토레프란카 국립음악원에서 공부했다.이탈리아에 있으면서 다양한 전문 과정을 거치며 음악적 기반을 다졌다.


Rolando Nicolosi(롤란도 니콜로시라고 읽으면 될랑가) 국제 성악콩쿠르에서 2등, G 쿠르치 국제 성악콩쿠르 2등, 마리오 란차 국제 성악콩쿠르 입상 등으로 실력을 인정받았다.



이 교수는 오페라 가수로 많은 무대에 섰다. 이탈리아에선 산파올로극장에서 <라보엠> <라토스카> <라트라비아타> 등에서 주연을 맡았고 국내에선 <바스티앙과 바스티엔> <코지 판 투테> <마술피리> <사랑의 묘약> <라보엠> <투란도트> <팔리아치> <버섯피자> <봄봄> <소나기> <논개> 등의 오페라와 <뮤즈> <사운드 오브 뮤직> 등의 뮤지컬에도 출연했다. 지난해 공연한 <사운드 오브 뮤직>에는 나도 출연하였던 터라 이 교수와 인연이 맺어졌다.


이외에도 이 교수는 마산시립교향악단과 '내 고향 마산의 노래' 음반 제작에 함께 했으며 창원시립교향악단 등 많은 오케스트라와 협연을 했고 또한 다양한 음악회에서 솔리스트로 활동하기도 했다. 현재는 밀양시합창단 지휘자와 함께 밀양오페라단 단장을 맡고 있다.


그가 이번 독창회에서 부를 노래는 프란체스코 파올로 토스티의 곡을 1부 프로그램으로 꾸몄다. '꿈' '입맙춤' '세레나데' '마레키아레' '고뇌' '이젠 너를 사랑하지 않아' '슬픔' '최후의 노래' 등. 2부는 국내 작곡가의 곡들이다. '첫사랑' '사랑의 꿈' '햇살 좋은 숲에서' '연' '마중' '시간에 기대어' 등. 노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보기로 한다.


문의 : 010-2666-2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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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 '몽유도원도'


안평의 남자 '안견'. 딱 하나 남아 있는 그림 '몽유도원도'. 안평의 총애를 받으며 화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음직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딱 이거 하나다. 안견이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그림은 몇 점 있다. 그런데 이게 일본의 국보다. 나참... 보자, 일본의 문화예술품이 한국의 국보인 게 있나? 있을 리가 없지. 일본 쳐들어가 문화약탈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냥 팍 몽골 일본 원정 때 태풍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락해버리는 긴데. 오늘 또 뉴스에 보니 일본군 위안부가 자발적이었다고 일본 고위공직자가 망언을 쏟아냈다더만.


어쨌거나, 이 그림을 보면 왼쪽 현실세계에서 오른쪽 이상세계로 표현했다.기울기도 상승곡선을 이루고 있다. 민병권 교수는 이 그림에 대해 여섯 가지로 분석했다.


1. 침형세수, 치형돌기의 표현방법을 기반으로 한 이곽파 화풍을 계승.

2.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한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관념산수'.

3. 북송시대 임천고치를 지은 곽희가 개발한 평원, 고원, 심원법의 삼원법으로 이루어진 구도법.

4. 횡권산수(가로로 긴 두루마리에 그린 산수화).

5. 무릉도원을 표현한 오른쪽 도원 세계는 조감도법을 사용함.

6. 안평대군의 발문에는 송설체로 쓰여짐.


강희안 '고사관수도'


세종 때 유명한 선비화가 강희안은 절파 화풍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그림은 수묵화로 세로 23.4센티, 가로 15.7센티 크기다. 그다지 크지 않다. 고사관수(高士觀水). 학식 높은 선비가 물을 바라보다. 물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화두를 던진 그림이랄 수 있겠다. 이 그림에 대한 여러 해설 중에 민족문화대백과 것을 일부 옮겨 본다.


"이 그림은 덩굴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에 두고 바위에 기대어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중국 북송대 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파 화풍이 크게 풍미하고 있던 당시로는 색다른 경향의 화풍을 보인다."


"산수의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배경으로 한 인물 중심의 구성이라든가 근경 위주의 대담한 변각 구도와 공간감의 결여 등은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 소경산수인물 화풍의 선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과 자유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입체감이 있도록 주름을 그리는 일), 날카롭고 간결하게 처리된 옷주름 선과 헝클어진 모습의 덩굴 등도 원대의 선종수묵화풍과 더불어 절파 양식의 경향과 상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활당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필치와 더불어 짙은 문기(文氣)를 풍기고 있다. 그래서 화원이나 직업화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중국 절파풍의 작품과는 격조를 달리하는 화격을 보이고 있다."


김시 '동자견려도' 보물 제873호. 비단에 담채.


동자견려도 당겨서 본 그림.


양송당 김시는 김지라고도 읽힌다. 조선 중기 가장 유행했던 화풍이 절파풍인데 주목받았던 화가가 바로 김시다. 김시란 인물, 조선 중기 대단한 집안 이력이 있네. 아버지가 중종대 좌의정 김안로다. 그런 집안에서 그림을? 의아해하겠지만 조선시대 잘나가던 집안 한방에 훅가는 사례야 비일비재한 터. 김안로가 정유삼흉으로 지목받고 사약을 받으니 김시의 인생도 가시밭길이 펼쳐졌겠지. 집안이 망했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림이나 그려야지.


그런데 김시, 그림에 일가견이 있었나보다. 전혀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다. 이런 그림을 대경산수인물화라고 한다.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코믹한 장면이 있다. 아이가 나귀의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나귀는 못가겠다고 버틴다. 둘의 표정이 재미있다. 


인물 중심의 주제에 기울어진 주산의 형태, 흑백의 대조가 현저한 산 묘사, 굴곡이 심한 소나무, 강한 필묵법. 이러한 것들은 절파풍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덧붙인 해석을 보면, "전체적인 구도면에서 보았을 때 왼편에 무게가 실려 있으며, 해조묘(蟹爪描)의 소나무는 중경의 여백을 메워줄 뿐만 아니라 화면 전체를 대각선으로 이분하여 화면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산수가 주된 표현 요소로 나타나지만 점경인물의 옷을 호분(얼굴에 곱게 화장하기 위해 쓰는 분)으로 칠해 화면의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김시 '한림제설도'


역시 김시의 그림이다. 안견파 계통의 작품이다. 몽유도원도 비슷한 느낌이 나네. 김시가 환갑 때 안사확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렸단다. 근데 안사확이 누군지 알수 없다고. 그림을 보면, 눈이 온 뒤 설경을 담았는데, 동자견려도에서 보여준 절파풍과 안견화풍이 섞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단다. 난 어떤 부분에서 절파와 안견파를 유추해낼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김명국 '달마도'


여느 산수화에서 볼 수 없는 날렵하고 강한 필체를 느낄 수 있다. 꼼꼼한 화원이라면 이렇게 그릴 수 없다. 술한 잔 걸치고 휙휙!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일본에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다녀온 사람이다. 일본에 갔을 때 김명국의 일화가 재미있다. '한국미술산책'이란 인터넷 자료에 보면, "한 왜인이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장식한 뒤 천금의 사례비를 준비해 벽화를 그려달랬다. 그러나 주광 김명국은 술부터 찾았고 취기가 올라 붓을 들었더니 왜인은 그림 그릴 때 쓰는 금가루 즙을 한사발 내놓았다. 김명국은 그것을 한 번에 들이킨 후 새로 단장한 벽에 뿜었다. 왜인이 깜짝 놀라 화가 나서 칼을 뽑아죽이려 하자 김명국, 껄껄 웃으며 벽에 뿌려진 금물가루로 그림을 그렸다. 손놀림이 자연스럽고 붓길이 힘차니 순식간에 어떤 모퉁이는 산수가 되고 인물이 되었다. 그림이 환성된 후 아까 뿜었던 금물가루의 흔적은 간데없고 모든 형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놀란 왜인이 기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함을 표시했고 벽화가 훼손될까봐 기름막으로 덮어 보호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김명국은 술을 좋아해 '취옹'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절파 후기 광태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김명국 '설중귀려도'


사진을 제대로 못찍었다. 전혀 눈쌓인 느낌이 안 난다. 이 그림은 삼베에 수묵으로 그린 것인데 추운 겨울밤 친구를 방문했던 선비가 작별을 고하고 길을 나서는 모습을 담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선비의 모습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시동은 또 시동끼리 통하는가 보다. 아이들도 서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림의 특징을 보면, 화면 오른쪽에 앞으로 약간 기울어진 절벽을 배경으로 집 뒤에서 시작되는 계곡이 사선방향으로 전개되고 그 왼쪽은 여백으로 처리하며 전경 오른쪽에는 바위로 막아서는 구성이다. 이러한 공간구조는 16세기 후반 김시로부터 18세기 초 윤두서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다. 


절벽과 근경의 바위를 보면 각이 진 필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에만 빠른 필치의 부벽준(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측필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준법)으로 음영을 표현했다.


빠른 필치의 부벽준 처리와 복잡한 수지법은 표현 등에서 명대 후기 절파양식을 엿볼 수 있다.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도에 활달한 필치를 보여준 조선 중기 회화의 가작이라는 평이다.


심사정 '방심주산수도'


심사정은 젊어서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산수화에 심취해 스승인 정선의 진경산수화보다 전통적 중국 화제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산수와 인물, 화훼, 초충 등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심사정의 전형적인산수화풍이 나타나는 그림이란다. 화면 왼쪽 상단에 글이 있는데, 이로 나이 52세 때 1758년 가을, 정영년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다른 그림을 모방해서 많이 그렸다. 완전히 베끼는 것을 임모라고 하고 베끼되 새롭게 창작하는 것을 방작이라고 한다. 이 그림 역시 명나라 문인화가 심주의 화법을 따른 것으로 방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근경의 선비 모습을 제외하고는 심주의 화법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필법이나 하면 구성 등에서 심사정 특유의 화풍을 보여준다. 심사정은 오파와 절파의 양식을 혼합했는데 나름 창작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을 보면 먼곳의 산가 가까운 언덕은 피마준법(갈필에 의한 약간 물결짓는 필선으로 삼베 섬유를 푼 것 같은 까칠한 감촉을 가지며 이는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데 적용됨)으로 묘사된 데 반해 다리 건너편의 절벽은 부벽준으로 처리됐다.



이경윤 전칭작 '고사탁족도'


전칭작이라 함은 그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얘기다. 줄여서 그냥 '전'이라고도 쓴다. 그림의 분위기가 시원하다. 나무 그늘 아래 발을 담글 수 있는 물이 있다면 그곳이 명당이 아니고 어디랴. 그림에서 이 양반의 발을 보면 화가의 세심함을 알 수 있다. 물이 얼마나 차가웠으면 두 발을 서로 꼬아 '앗, 차거'하는 저 찰라를 포착할 수 있었겠나. 그런데 시동의 모습을 보소. 주인의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지 않은가. 손에 든 것은 분명 술이렷다. 한여름 무더운 날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술 한 잔 걸치는 것만큼 무릉도원이 어디 있으랴.


이명욱 '어초문답도'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나무꾼과 어부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그래서 한사람은 신을 신었고 한 사람은 벗었다. 이명욱은 숙종이 많이 아꼈던 화원의 화가라고 한다. 이 그림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그려졌으며 당시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북송대의 소옹이 지은 <어초문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대해 문답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서인들이 이런 사상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 또 이런 화려한 색채는 원체 화풍의 영향으로 당시 궁중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김정희 '세한도'


앞서 4강 정리에서 깊이 다뤘으므로 대략 생략하고.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 짧게. 제주도 9년 귀양살이 보낼 때였단다. "1844년 나이 59세에 수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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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었다. 3분 지각. 벌써 강의는 시작되었다. 오늘은 조선 말기 회화를 중심으로 공부를 한다.


조선 말기 회화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선수는 추사 김정희다. 그게 고증학과 직결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림과 글. 글이 그림 속으로 들어왔다는 것. 그 전엔 그림 옆에 발문이라든지 그렇게 글이 섰지만 이제 그림과 함께 한폭을 이루게 된다는 얘기다.


사실적 그림에서 감흥으로. 김명국의 달마도. 술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인물. 오원 장승업도 마찬가지. 




꼼꼼하게 잘 그리는 것보다 그림에 감흥이 들어간 그림이 좋은 그림으로 평가.


후기엔 고증학이 유행하면서 준법이든 묘법이든 문자향과 서권기(많은 독서와 학문을 통해서 형성되는 지성과 인품이 예술적 통찰로 승화되는 것)가 들어간다.


추사 김정희, 금석학, 중국 연행, 주자학, 이기철학. 너무 형이상학적인 것만 새악한 조선 초중기. 일반 백성 생활과 거리가 먼 가치만 추구. 오랑캐라고 생각한 청나라의 문명을 보고 깜짝 놀라. 조선보다 훨씬 우위에 선 문화를 발견. 그래서 당시 지식인들은 새로운 문물에 대한 욕구를 보임. 실학파. 박제가와 함께 중국 연행.




동영상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CtnJi__9iOc)


추사체는 예서를 바탕으로 개발되었다. 김정희는 소년시절부터 북학파 박제가에게 학문을 배웠고 청대의 학예일치사상과 금석학 등 새로운 사조에 눈을 떴다.


서화일치론. 누구, 당대의 장언원. 원대의 조맹부는 서화용필동법.-> 서화동원.


조선말기 서권기를 중시한 예술사조로 후기의 독자적 예술이 빛을 잃게됐다.




서양에서 사진기 등장으로 초상화 그려 먹고 살던 사람, 살길 사라져. 그래서 근대, 현대로 넘어오면서 형상 중심의 미술이 심상을 중요시하는 추상미술로 흐름. 한국에선 서체를 중요시하는 남종문인화로의 예술적 전환 이루어짐.


현대미술, 모스트모더니즘. 작가의 생각, 감상자의 생각 일치될 필요 없어. 감상자에게 몫을 남겨주는 것. 그게 현대미술의 경향. 하나의 충격요법이다.


한국화를 공부하는 이유는 마음을 노래하는 본연의 미술을 알아보는 게 좋겠다.


사람들이 손잡고 강강수월래하는 그림. 미니멀한 그림. 최소의 단위. 반복적으로 형상됨. 


추사는 형식적인 것뿐만 아니라 실증적인 것을 강조했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신라 때 555년. 만들어졌다. 김정희가 아니었으면 몰랐을 유물이다. 글자는 전서. 상형문자. 잘못해석한 것을 이끼를 걷어내고 실증 고증해보니 신라의 순수비라는 것. 하나의 비석도 예술이다.


진흥왕이 영토를 넓혔고 누가 무슨 관직을 가졌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짐.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그림에 대해 깊게 파고드는 공부가 필요하다.


불이선란도. 너무 자화자찬에게 빠진 내용이라고 말했는데 그건 농담을 말한 것. 시서화일치의 정수를 보여준 작품이다.


중국 양주에 8명의 괴이한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돈이 있는 곳에 예술가들이 몰린다. 문인들이야 기본 재산이 있으니 괜찮은데.... 후기에는 도 그렇지만은 아니었다고.


추사 귀향을 많이 갔다. 세한도, 이상적이라는 제자가 우정을 지킴. 당대 예술가는 배고픈 직업. 뭐 요새라고 다를 바 없지만.

추사 그림, 추상성이 강하다.


불교에서 선종, 스스로 깨닫는 것.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깨달으면 선종화를 그릴 수 있다. 앞서 달마도 역시 선종화다. 부지불식간에 깨닫는 것.


불이선란도. 추사체의 특성은 종횡의 굵고 가는 획들의 대조가 몹시 심하고 필획이 매우 굳건하고 거칠다.  또 마치 선화를 보는 듯 유희미가 돋보이고 필획이 제각기 개성있게 배열된 독특한 구성미를 보인다. 해서체처럼 반듯하게 꼼꼼하게 쓰지 않았다. 안평의 송설체 비교.


위 동영상(28분 지점) 참고. (계산무진) 추사 작품 중에서도 대표적 명작. 



전서를 도장에 넣는 것. 전각. 추사 학문적 경향이 예술에 담겼다. "난을 치는 것은 국가를 경영하는 것과 똑같다."




<불이선란도> 내용.


난은 치지 않은지 이십년, 우연히 본성의 참모습을 그려냈구나.

묻 닫고 찾고 또 찾은 곳

이 경지가 바로 유마 불어선일세.


불립문자.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


어떤 사람이 강요하면 구실을 삼아 마땅히 비야리성에 살던 유마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던 것과 같이 사절하겠다. 만향,


난은 미인의 향? 자신을 늙었다고 했는데 이건 현명하다는 얘기.


한번에 그려냈는데 두 번다시 못그릴 마음에 드는 그림이다. 자화자찬이라기보다는 문인화가의 숙명적인 것. 창피한 것을 안 남기려고 맘에 안드는 것은 다 찢어버리는데...


처음에는 달준에게 주려고 그린 것이다. 다만 하나만 그릴 수 있을 뿐이지 둘은 있을 수 없다. 선로노인.


초서와 예서, 기이한 글자를 쓰는 법으로써 그렸으니 세상 사람들이 어찌 알 수 있으며 어찌 좋아할 수 있으랴. 구경이 또 쓰다. 고연재


소산 오규일이 보고 억지로 빼앗으니 우습다.


문자향, 서권기에 대해서.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 학문적 수양의 결과로 나타나는 고결한 품격을 나타내는 말.


내 눈에 대나무 내 마음이 대나무. 사실적 대상, 마음 속에는 사실적이지 않은 대상. 생각이 담긴 것. 이게 예술이다.


동양의 예술관 서양보다 일찍 깨쳤다. 회화의 원리를 일찍 깨달았다.




잔서완석루. 기본적으로 예서체를 바탕으로 했지만 자형은 윗선에 맞추고 아래로 내리치듯 썼다. 거칠다. 글씨의 의미가 중요한 작품.


세한도 관련 동영상 참고. 날씨가 추워진 다음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가치를 알 수 있다. 갈필. 국보. 그림 안에는 추사의 인생 굴곡과 문인끼리의 우정 담겨. 오군자, 육군자, 소나무와 연꽃 추가.




추사는 명대 동기창의 철학을 숭상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걸은 사람이라야 예술을 할 수가 있다는 것. '독만권서행만리'. 동기창의 화론 "만권의 책을 읽고 만리의 길을 걸으면 가슴 속에서 온갖 더러운 것이 제거되어 절로 구학이 마음 속에서 생기고 산수의 경계가 만들어져 손 가는 대로 그려내니 이 모두가 이루어진 것이 산수의 전신(傳神)이다."


시서합일. 추사의 작품은 글 그림을 따로 놓고 논할 수 없다.


제자 중에 추사 영향 많이 받은 사람, 우봉 조희룡. 매화를 좋아해 <호산외사>를 편찬하기도. 묵란도. 나름 개성적이나 추사보다 자유롭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묵죽과 묵매는 청대의 양주팔괴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것.




사군자. 매난국죽. 주변은 어두운데 하얗게 피어있는 꽃, 매화. 이게 매화가 사군자 안에 낀 이유.


깨어져 있는 글씨체. 중국 양주 작가들의 그림체를 많이 본받았다. 독자적인 화풍 드러내. 필법은 추사 닮고.


양주팔괴란? 중국, 청 ∙ 건륭년간(1736~95), 장쑤성 양주에 모인 8인의 개성파 화가들을 말한다. 금농(金農), 황신(黃愼), 이선, 왕사신(汪士愼), 고상(高翔), 정섭(鄭燮), 이방응(李方膺), 나빙(羅聘) 등을 가리키나, 그 외에도 고봉한(高鳳翰), 민정(閔貞)을 더하기도 한다. 화암(華嵒)을 추가하여 양주화파라고도 부른다. 대운하와 소금 거래로 경제적 번영을 이룬 상업 도시 양주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마왈관(馬曰琯) ∙ 마왈로 등 대부호들과 교우(僑寓)하여 지원을 받기도 했다. 화풍이나 화제의 공통점은 없었으며, 사왕오운(四王吳惲) 이래 이미 정형화되어 있던 문인화의 전통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분방하고 개성적인 제작태도를 보였다.(네이버 지식백과 미술대사전에서 발췌) 



소치 허유, 허씨 허백련 일가의 첫째. 너무 중국풍이다. 전남의 남종문인화 계보를 만든 주인공. 아들 미산 허형, 손자 남농 허건, 그리고 의재 혀백련을 통해 전통을 이어갔다고. 추사의 고증학적 세계관 전승. 예찬과 황곡망의 그림을 방작하는 태도를 보였다. 문인들의 쓸쓸함을 묘사. 


원경과 근경 사이에 물을 놓음으로써 노자 도가에 나오는 상선약수를 표현했다.


고람 전기(30세 요절) 추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인터미션.


근대 한국화.


근대 산수화의 변모


조설말기 대가인 오원 장승업 제자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이 세운 서화미술회 강습소를 통해 근대 산수화 시작. 근대 6대가 중 의제 허백련을 제외한 대부분 이곳 출신. 초기 화풍은 산수화풍. 중국화풍에서 벗어나 우리의 풍경을 실제로 그렸다는 점에서 겸재의 진경산수에 가까워. 하지만 근대의 실경산수는 외물을 중시한 것이고 후기 진경산수는 산수의 내재적 기운의 표출이란 점에서 차이남.


또 서양화가 도입되면서 더욱 실제적인 실경 위주로 흘렀고, 근대의 산수화는 실사에 가까운 풍경화로 변모했다. 일제강점기 중국의 '몽롱파' 화풍이 들어온 것도 실경산수화의 특징.


미술 등용문, 일제가 담당하게 되면서 채색화 위주로 감. 이때 그림들은 한국의 자연미를 표출하고 서양의 원근법과 명암의 표현을 과감히 차용, 산수의 정취를 표현함.




오원 장승업 취화선. 지붕 위에서 막걸리 들고 소리치는 모습. 너무 추사 일파의 그림만 중시.. 화원의 그림을 천박하게 취급받는데 분노.


임모. 베껴그린 그림. 보는 앞에선 멸시. 몰래 그려 보여준 것에 감탄하는 장면 기억. 산수와 영모에 두루 재능을 보였고 근대의 대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의 스승으로 근현대를 잇는 중요한 화가라 할 수 있다고.


장승업의 호취도. 매의 날카로움. 두마리, 둘 다 경계. 긴장감. 한번에 그려낸 그림. 호방한 장승업의 성향을 보이는 작품. 붓에 마음이 담길 수밖에 없다. 동서양의 그림 차이. 동양은 창처럼 뽀족하다. 서양은 넓적하지만.


취화선 영화처럼 개성적 인물은 아니다. 중국풍의 그림이 많다. 화원이었기에 꼼꼼한 그림도 잘 그렸다. 여자와 술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영화에서처럼. 왕이 부르면 끝인데.. 다 때려치우고 도망. 독특한 사람이었긴 맞는데... 중국풍을 많이 그렸다.


장승업, 안중식, 조석진 작품.


장승업의 회화기법은 심전 안중식과 소림 조석진으로 이어져 하나의 근대적 전형을 이루었는데, 전반적으로 사실적인 실경을 기반으로 미점과 피마준법으로 표현된다. 심전과 소림이 설립한 서화미술회 강습소에서 배출된 조선 후기 6대가 중 현재 미술사적으로 큰 의의를 지닌 이상범과 변관식은 한국 산야가 가즌 야취의 미학을 잘 나타내고 있단다. 실경산수를 한국적 소재에서 찾아 자주적 미학을 찾고자 했다는 점.




근대 6대가. 변관식, 이상법, 노수현, 박승무, 김은호, 허백련. 이 사람들 중 왜색시비에 휘말린 작가도 있어. 먹고살려면 어쩔 수 없었는데... 안타까운 일.


1950~60년대는 왜색 화풍을 탈피하는 한국화의 경향을 보인다. 1946년 서울대에 최초로 미술과가 생기면서 왜색 탈피 문인화가 강조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서양의 추상 표현주의 영향을 받아 새로운 추상화로 양식이 변모되기도 했다.


대표적 인물이 운보 김기창과 우향 박래현이다. 




이러한 경향은 세계 1,2차대전 후 기존 가치의 상실에 대한 주목으로 실존의 양태를 철학적으로 파고들었으며 한국에서는 앵포르멜이 본격적으로 하나의 미술운동 차원에서 도입됐다. 1957~58년 무렵이다. 한국전쟁 후 사회적 상황이 전후 서구와 흡사했다는 점에서 앵포르멜 이념과 표현방법이 쉽게 접목될 수 있었다.


앵포르멜?  이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독일 표현주의나 다다이즘의 영향을 받아들여 기하학적 추상(차가운 추상)의 이지적인 측면에 대응하여 서정적 측면을 강조, 색채에 중점을 두고 보다 격정적이고 주관적인 호소력을 갖는 표현주의적 추상예술로 나타났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후인 1951년 프랑스의 평론가 M.타피에는 이러한 경향의 화가들의 그룹전을 기획하고 소책자 <또다른 예술:un art autre>(1952)을 발간, 이 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면서 그것을 앵포르멜(非定形)이라 했다. 선묘(線描)의 오토메티즘, 산란한 기호, 그림물감을 뚝뚝 떨어뜨리거나 석회를 쳐바르는 기법 등을 구사, 구상 ·비구상을 초월하여 모든 정형을 부정하고 공간이나 마티에르에만 전념함으로써 또다른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려는 것으로 그것은 기성의 미적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조형의 의미를 만들어내려 했으나, 무정형 ·무한정한 자유가 오히려 표현에서 멀어질 수 있는 위험성도 내포하였다. 대표적인 화가로 포트리에, 뒤뷔페, M.마튜, G.마티외 등이 있으며, 국제적인 예술운동으로 전개되었다.(네이버 지식백과)


이어 추상 표현주의뿐만이 아닌 권영우의 초현실주의, 장운상의 큐비즘까지 선보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반대로 현식만 새로운 것을 추구했을 뿐이지 동양 전통적 사상을 현대화한 것은 아니라는 맹점을 지닌다.




새로운 추상화의 집단화된 운동을 추진한 화단은 백양회와 묵림회를 들 수 있다. 백양회의 주 멤버는 김기창, 박래현 등의 작가가 참여했는데 주로 국전에 불만을 품은 작가들이었다. 운보처럼 파격적 추상을 표현하는가 하면 종래의 형식주의를 표방하는 작가들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화단은 전통적 화풍에서 벗어나려 한 현대적 조형운동으로 기록되기는 하나 형식에선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평을 받았다.


묵림회 주 멤버는 서세옥, 민경갑, 정탁영, 전영화 등. 전통 방식의 동양화에서 서구의 사조를 받아들여 새로운 실험을 구사했다. 아방가르드적인 동양화의 출발점으로 본다. 서세옥의 미니멀리즘 경향 그림은 이후 이우환에게 양향을 미친다. 주로 서울대 출신의 화가들로 구성. 수묵화에 정탁영, 신영상, 채색을 강조한 안상철, 안동숙 등이 포진해 있다.


특히 안상철은 전통 동양화에서는 보기 힘든 입체 오브제를 활용하거나 종이를 찟어 새로운 공간감을 창출했다는 점에서 돋보이는 작가다. 안동숙은 영적인 화면을 주로 구축했다. 세밀한 채색, 디테일한 구성이 돋보였다. 묵림회는 앵포르멜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70~80년대 한국화의 경향은 실경산수의 부흥, 수묵채색화의 새로운 변화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근대화단 6대가 중에 소정 변관식과 청전 이상범의 예술관이 재조명되었고 상업화랑이 등장하면서 추상 실험양식에 몰두했던 40대 작가까지도 이러한 열풍에 동조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아파트 열풍이 불면서 실경산수를 선호하는 소비자가 많아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는 설명이다.


1980년대 수묵화운동이 일었는데, 수묵의 조형성을 극대화하면서 한국 본질적인 미와 정신을 강조했다. 단색조의 수묵화야말로 한국인의 고유 미의식을 드러낼 수 있어 전통과 변혁을 한꺼번에 충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 수묵화는 다양한 양상으로 나타났다. 송수남의 '긴강', 오숙환의 '빛', 김호득의 '폭포', 이종목의 '물처럼' 등의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88년 서울올림픽과 함께 컬러TV가 급속도로 번지면서 한국화단에서도 채묵화가 유행하게 되었다. 덩달아 민화의 현대적 표현을 모색하기도 했다. 박생광의 그림들이 그러하다. 박생광의 그림은 특히 오방색이 많이 구현되었는데, 이게 오히려 왜색풍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박생광은 진주 출신의 화가다.


박생광과 함께 오방색을 즐겨 활용한 화가 중에 전혁림이 있다. 그는 통영 사람이다. 주로 통영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그의 그림은 오행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도시화가 이루어진 지금, 이 상항에서 한국화는 현실을 벗어날 수 없다. 현재의 모습이 회화의 주제와 소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화가들은 한국화의 전통성 인식보다는 세계화된 미술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쪽으로 고민하게 되었다. '지금 여기 있음'. 



정리하자면, 근대 한국화에서 현대 한국화로 건너오면서 변화된 것은 먼저 준법의 파괴가 일어났으며, 구도의 변화, 현대적 표현 방식 연구, 서양 조형양식 영향, 그리고 재료에서도 전통에서 벗어나 다양하게 매체를 차용했다는 점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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