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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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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압보도가 있는 곳이면 대부분 이런 입간판이 세워져 있습니다. "이곳은 맨발 건강지압보도입니다. 본 시설을 이용하시는 시민 여러분께서는 반드시 신발을 벗고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사진 속의 장소는 창원시 천주산 천주암 등산로에 있는 지압보도 시설이다. 창원시장 명의로 세워진 이 안내문이 합당한지 의심케하는 장면이다.

창원 의창동 주민자치센터 시민체육시설에도 지압보도가 있다. 그곳은 얼마든지 맨발로 이용할 수 있을 정도로 관리가 잘 되어있다. 유사한 안내문이 그곳에도 있지만 어느 누구도 반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산속에 이렇게 흙과 낙엽이 덮인 이곳에서조차 '반드시' 신을 벗고 이용하라면 공감할 사람이 과연 있을까.

애초부터 이러한 환경을 계산해서 문구를 작성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리고 장소가 지압보도로 적절한지도 미리 면밀히 검토했다면 쓸모없이 예산을 낭비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말입니다.

이곳에서 신을 신고라도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면 그나마 다행일 것입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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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립미술관 앞 각종 철새 모형의 솟대들.

'철새 정치인'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이 그분껜 죄송하지만 '이인제'씨입니다. 왜그런지는 확실히 모릅니다. 그냥 신문이나 TV 뉴스를 조금 많이 봤을 따름인데... 다른 사람도 몇몇은 생각이 날 듯한데 별로 반갑지 않은 인물 쭉 나열한다고 좋은 글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한 분으로 만족하렵니다.

나는 언론이 비겁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당 저당 옮겨다닌 정치꾼들에게 '철새'라는 칭호를 붙여준 데 대해 불만이 있습니다. 철새정치인 빼고 '철새' 하면 떠오르는 새들이 있습니다. 저어새, 따오기, 쇠기러기, 뜸부기... 철새들은 이름도 예뻐서 기억이 가물가물 해도 인터넷에 더 찾아보게 되네요.

철새의 종류엔 겨울새, 여름새, 또 나그네새가 있다고 합니다. 겨울새는 가을을 북쪽에서 보내고 겨울에 한반도로 날아와 지내는 철새이고 여름새는 제비같은 새처럼 봄에 한반도로 날아들었다가 가을이 되면 다시 남쪽으로 추위를 피해 날아가는 새를 말한답니다. 나그네새는 그냥 봄, 가을 한반도 금수강산에 잠시 날개를 쉬었다 지나가는 철새를 그렇게 부른답니다.

철새들이 계절에 따라 한반도에 날아들어 여름과 겨울을 보내고 돌아가는 것은 본능에 의한 것입니다. 물론 돌아가는 것인지 돌아오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철새에게 국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 나라 저 나라 다니는데 여권보자는 사람도 없으니 우리나라 새다, 남의 나라 새다 따질 것도 없겠지요. 그저 북쪽에서 왔다갔다 하는 새는 추우면 한반도로 날아들고, 남쪽에서 왔다갔다 하는 새는 더우면 한반도로 날아든다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철새에게 우리 언론은 엄청난 불명예를 덮어씌우고 있습니다. 정체성 없이 주판알 튕겨 자신에게 유리한 정당을 오가는 사람에게 어찌 본능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고귀한 생명체인 '철새' 칭호를 부여한 것입니다. 철새들 이 말 듣고 마음 편히 하늘을 날 수 있겠습니까.

철새라 함은 솟대 걸린 가을 저녁놀처럼 아름다운 비상(飛上)이 먼저 떠오르는데 '철새 정치인'하니 변절자, 이기주의자, 기회주의자 등이 철새에 덧칠되는 것 같아 썩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아, 기회주의자라는 표현을 쓰다보니 소설가 전광용의 '꺼삐딴리'가 생각나는군요. 일본이 실권을 잡으면 일본인에 아부해서 한자리 얻고, 소련(구 러시아)의 힘이 세다 싶으니 이젠 쪽에 붙어서 특혜를 받고, 미국의 세력이 강해지니 잽싸게 영어를 배워서 안정적 생활을 영의하며 소위 '지도층' 인사가 됩니다.

그러나 철새는 '꺼삐딴리'가 아닙니다. 그저 날씨에 따라 본능에 따라 거주지를 주기적으로 옮기는 것일 뿐입니다. '철새'라는 말이 '기회주의'와 상통하게 되면 본의 아니게 억울함을 당할 수도 있겠습니다. 오랜 늪의 신비가 매력적인 '우포'에서, 찬바람이 물결을 깨우는 주남저수지에서 어떻게 철새를 좋아한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철새'의 본디 의미를 되살렸으면 합니다. 신뢰할 수 없는 정치인에 붙이지 말고 진짜 철새에게 돌려주어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으면 합니다. 음, 그렇다면 기회주의 정치꾼들은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전광용 소설의 주인공 '꺼삐딴리'를 명사화해도 될 듯합니다. 하지만 이 땅에 꺼삐딴리는 아예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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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주인 없는 의자가 되었지만 빨간 방석이 깔린 낡은 회의용 의자는 참 오랫동안 나와 함께 했습니다. 내가 떠나 버린 그 자리에 아직도 그대로 있을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마 다른 용도로 사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내 기억으론 이 의자를 구입한 시기가 1995년쯤으로 알고 있습니다. 경남매일 마산 시절을 끝내고 창원시대를 열었을 때 중앙동에 있는 한국일보 공장 2층과 3층 일부를 세를 내어 들어갔는데, 3층 회의실을 꾸밀 때 샀습니다.

경남매일은 당시 동성종합건설이 인수해 독립채산형식으로 운영되어오다 외환위기가 시작되자 자금압박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는 수없이 98년 한국일보 더부살이를 끝내고 팔룡동 허름한 공장으로 이사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이 회의용 의자는 갈 데를 잃고 일부는 업무용으로 일부는 휴게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중에 한 개가 내게 온 것입니다. 70년대 식당용 의자만 앉았던 내겐 이 회의용 의자가 정말 편하고 좋았습니다. 양 발을 올려도 될 만큼 앉는 부위도 넓었습니다. 허리가 좋지 않던 내겐 딱이었습니다.

그러다 98년 10월 부도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남매일은 시월의 마지막 날 3000호를 끝으로 폐간하고 말았습니다. 이 때 의자와 일찍 이별할 수 있었는데, 엑셀을 조금 할 줄 안다는 '죄(?)'로 퇴직금 정산을 하느라 망한 회사에서도 계속 나와 함께 했습니다.

그러다 1999년 5월 경남도민일보를 창간하게 되었는데 석전동 사옥에서 새집살림을 차렸는데 그 때에도 이 의자는 내 의자가 되었습니다. 이듬해 양덕동 현 사옥으로 옮겼어도 이 의자는 나를 따라다녔으며 회사 전 직원의 의자를 교체할 때에도 이 의자만은 여전히 나의 엉덩이를 받쳐주는 충성을 보였습니다.

그러고 보니 11년을 나와 함께 한 것 같습니다. 빨간 방석도 나와 함께 오래했군요. 2002년쯤 이모가 여관을 개조하면서 내게 준 것을 회사에 가져다 쓰기 시작했는데 방석치곤 수명이 참 길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방석은 이제, 청소하시는 아주머니가 처리했겠군요.

신문사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때가 1990년 10월이었으니 언론사 생활 만 18년이 되었습니다. 그 기간만큼이나 부서도 다양하게 옮겼습니다. 문화부에, 사회부, 교열부, 편집부, 조사부(자료실), 전산미디어팀, 여론팀, 다시 편집부와 문화체육부….

내가 좋아서 선택한 직업, 내가 좋아서 신문사 만들기에 뛰어들었던 경남도민일보. 특히 도민일보 시절은 내 몸에 딱 맞는 '회의용 의자'였습니다. 나이 마흔 여섯에 그 편안했던 의자를 두고 나왔습니다. 언제 새 의자를 찾게 될지 모릅니다. 다른 의자를 찾기 어려울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아주 오랫동안 가정이 내 일자리 일지도 모릅니다.

처음으로 언론사 일을 접고 하루를 보냈습니다. 오랫동안 나를 받쳐준 의자가 눈에 아른거리듯 신문사의 일도 여전히 하고 있는 것처럼 그런 감정이 남아있습니다. 세월이 잔상을 지워주겠지요. 하지만 언론개혁을 위해 함께 했던 시절의 기억은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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