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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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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아줌마의 경주여행기


밤하늘, 우주의 신비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경주박물관 안에서 하늘이 아니라 고개를 숙여 바닥을 보면 나타나는 우주랍니다.


지난 20일 오전 10시 30분. 우리는 창원역 앞에 서있었습니다. ‘희망나라’ 김하경 선생이 오길 기다린 것입니다. 이날 다문화가정의 가족들이 경주에 있는 한국의 문화재를 구경하러 가는 날이었습니다. 다른 때와 달리 이날은 우리 가족 동행자가 한사람 더 늘었습니다.

등산할 때마다 첩보작전을 방불케 하듯 눈을 피해 두고 나왔던 막내를 데리고 왔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짐이 두 배나 늘었습니다. 유모차에 기저귀가방, 갈아입을 옷가방…. 게다가 경주에서 1박을 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짐도 늘어나 가방의 부피가 커졌습니다.


버스가 도착해서 보니 안에는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었습니다. 얼핏 보기에 베트남 여성들이 많았습니다. 우리처럼 남편과 함께 자식을 데리고 온 사람도 있었고 시어머니와 함께 온 며느리도 있었습니다. 아침을 괜히 먹고 나왔습니다. 경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선 떡과 과자, 과일 등 먹을 것이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죽은 사람 옆에 산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요?

천마총. 왕의 무덤은 아닌데 무덤 속에서 말다래에 그려진 하늘을 나는 말에서 이름이 지어졌답니다. 무덤 속으로 산 사람이 들어간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오싹한 일입니다.


경주에 도착하자 처음으로 간 곳은 천마총이었습니다. 큰 무덤이 많이 보였습니다. 옛날 왕이나 높은 사람들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천마총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무덤 안으로 들어간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무덤 안에는 귀신이 있을 것 같아서 들어가지 않으려고 했는데 남편이 억지로 끌었습니다. 옛날에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무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들어가 보면 안다면서 말이죠. 천마총 안에는 금으로 만든 모자와 허리띠, 그리고 말다래에 그려진 천마도도 있었습니다. 천마도는 솔직히 잘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림이 너무 흐릿했습니다.


천마총 옆에 있는 쌍분입니다. 이중에 큰 무덤에선 남자 어른의 유골과 함께 15세 여아의 유골이 함께 출토되었다는데 순장풍습 때문이었답니다. 설마 오늘날에는 이런 풍습 없겠죠.


무덤 안을 구경하고 나오니 문화해설을 하는 사람이 사람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천마총 옆에는 나란히 붙어있는 두 개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것을 쌍분이라고 부르는데 부부의 무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큰 무덤에선 어른 남자 유골과 함께 15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유골이 나왔답니다. 그 이유가 순장풍습 때문이랍니다. 순장이란 것은 죽은 사람 옆에 노예로 부리던 사람을 산채로 혹은 일부러 죽여서 함께 묻는 것이라고 하는데 너무 끔찍한 일입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참 잔인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몽골에는 이렇게 큰 무덤이 없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의 무덤이 좀 크긴 하지만 이렇게 크진 않아요. 무덤이야기를 하니 생각나는 게 하나 있는데 소개할게요. 몽골의 울란바타르에 가 보신 분은 아실텐데, 시내에 큰 광장이 하나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동상이 있는 건물인데, 한국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곳이죠. 몽골말로는 자스깅 가쯔링 어르덩이라고 합니다.

예전에 이곳 지하에는 몽골혁명의 아버지로 인민정부를 수립한 수흐바타르의 무덤과 그와 함께 혁명을 주도했던 초이발상의 무덤이 나란히 있었습니다. 1992년 대통령 직선제가 되면서 유족과 국회의원들의 요청에 의해 울란바타르 인근에 있는 알텅얼기로 옮겼지만 오랜 기간 국회의사당 아래에 무덤이 있었던 것이 신기하지요.


◇목이 잘려나간 불상들, 왜 그런 거예요?


목이 잘려나간 부처의 상을 지원이가 만지고 있습니다. 조선시대 불교탄압으로 이렇게 만들었다는데 지나친 것 같습니다. 요즘엔 단군상을 이런 식으로 복을 벤다죠?


우리는 경주국립박물관으로 갔습니다. 시간이 많이 없어서 다 둘러보진 않았는데 그 중에서도 목이 잘려나간 부처상들이 인상 깊었습니다. 설명을 읽어보니 불상은 목부분이 약해서 지진에 의해 떨어져나갈 수도 있지만 조선시대에 불교를 싫어한 사람들이 일부러 목을 떼어내 버렸다고도 합니다.


한국에서 불교가 미움을 받은 적이 있었던 것처럼 몽골에서도 불교를 믿는 사람이 미움을 받은 때가 있었습니다. 수흐바타르의 인민정부 수립 후에 귀족들이 너무 티베트불교에 빠져있다는 이유로 스님들을 학살했습니다. 이때 러시아 군인들도 몽골의 스님들을 무차별로 총을 쏘아 죽였습니다. 특히 초이발상이 더 나서서 그랬는데 아직도 몽골사람들은 그에 대해 평이 좋지 않습니다.


◇경치만으로도 전통음악 들리는 듯한 안압지


사진에서 늘 보던 각도로 사진을 찍어보았습니다. 불국사는 참 매력적인 절입니다.


불국사 경내에 있는 기둥에 기대어보았습니다. 여러 기둥이 한 컷에 들어오니 참 멋집니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불국사로 갔습니다. 석가탑과 다보탑도 그렇지만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게 좋아보였습니다. 계단이 많아서 유모차를 밀고 다니기는 불편했지만 멋진 풍경이 많아 사진도 찍으며 천천히 한 바퀴를 돌았습니다.

한국도 몽골처럼 불교사원이 많은 것 같습니다. 등산할 때에도 산마다 절이 있었는데, 이야기를 들으니 나라에서 불교를 장려한 적도 있다면서요. 몽골에선 복드한(칸) 궁전처럼 절이 임금의 궁궐이었던 적도 있답니다. 물론 임금은 스님이었고요.


불국사를 나온 우리는 석굴암으로 가려했으나 시간이 없어서 점심을 먹고 안압지로 갔습니다. 옛날에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다는데 한국 전통 건물과 연못의 연꽃과 물에 비친 하늘이 어우러져 가야금, 아쟁, 단소 연주 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물에 비친 하늘이 아름답습니다. 안압지는 옛사람들이 뱃놀이를 즐긴 곳이라죠?


안압지엔 신라 천년의 향기가 흐르는 듯합니다. 한국의 전통 악기소리가 안압지 물결따라 흘러나왔습니다.


안압지를 한 바퀴 돌다보니 숲 속에 다람쥐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다녔습니다.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어도 도망가지 않고 오히려 폼을 잡는 듯했습니다. 안압지를 끝으로 다문화가정의 경주문화체험은 끝났습니다.


그런데 경주는 1박 2일로 구경하기엔 너무 볼 것이 많은 곳 같습니다. 특히 아쉬운 것은 식당 바로 옆에 첨성대를 두고 가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진으로 많이 보았던 것인데 버스 출발시간 때문에 먼발치에서 형체만 확인한 것이 후회되었습니다. 빨리 움직인다면 다녀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는데…. 다음에 남편과 둘이서라도 한 번 더 오기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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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과서는 못 가르쳐주는 발칙한 세계사
 

몽골제국은 과연 소멸되고 없는 것인가. <발칙한 세계사>의 지은이 남도현은 단호히 ‘아니다’라고 단정한다. 겉으로 보면 전체 인구 300만도 채 되지 않은 국가이지만 제국의 형태가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것이다. 지은이는 몽골제국을 정주영 회장이 세운 ‘현대가’와 비교해 설명했다.


1204년 칭기즈칸이 몽골제국을 창업한 것은 정주영 회장이 현대그룹을 이룬 것과 같고, 칭기즈칸의 사후 몽골제국은 아들들에 의해 여러 개의 칸국으로 분리된다. 그중에서도 쿠빌라이 칸이 세운 원이 종갓집에 해당되겠다. 이들은 서로 경쟁하기도 하고 협력하기도 했다. 쿠릴타이(몽골 유목민 합의제도)를 통해 상호 적통을 물려받은 것으로 인정한 대목이 그렇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정주영 회장 사후 ‘왕자의 난’을 겪으며 분화가 이루어졌다. 정몽헌 회장의 현대아산그룹이 종갓집에 해당되고 그 외의 재벌들을 모두 합쳐 ‘범현대가’라고 표현하는 것도 유사하다.


티무르·무굴 제국·영국왕실이 칭기즈칸의 후예

그러면 지은이는 왜 몽골제국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단언하는 것일까. 그 근거로 몇 가지를 들었다. 명을 세운 주원장이 원의 지배계층이었던 몽골인을 중원 밖으로 쫓아냈지만 이후 금나라를 세운 누르하치의 아들 청태종 홍타이지는 몽골제국의 적통을 물려받았다며 중원의 지배자로 자처한 사실이 그 이유다.

유럽의 티무르도 페르시아를 정복하며 인도북부에 제국을 창업한 칭기즈칸의 또 다른 후계자며 무굴 역시 인도에서 부활한 몽골제국이라는 것이다. ‘무굴’이란 말이 페르시아어로 ‘몽골’이라는 뜻인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몽골제국의 창업자 칭기즈칸.

이렇게 역사의 줄기와 가지를 엮어 해석해나가던 지은이는 결국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의 아버지 조지 6세가 칭기즈칸과 관련이 있음을 증명하기에 이른다. 물론 스스로 털어놓았듯 ‘무리하게 말도 안 되는 억지 결론을 끌어냈다’고 불 독자도 있을 것이다.


몽골제국의 이야기는 이 책의 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발칙한 세계사>는 세계 전쟁사를 초점으로 ‘강자의 세계사’와 ‘약자의 세계사’ ‘미스터리 세계사’로 나누어 편집했다.


앞서 끌어온 몽골제국의 이야기가 강자의 세계사라면 벨기에 이야기는 우방에 의해서까지 전쟁터로 돌변한 약자의 세계사에 해당될 것이다. 1939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독일은 폴란드전에서 재미를 본 전격전을 벨기에에서 다시 맛보자는 계획을 세운다. 프랑스 또한 우방국인 벨기에를 이용해 독일을 무찌른다는 발상을 한다. 독일은 벨기에를 프랑스 정복을 위한 침공소로 활용했고 프랑스는 자국에서의 전투를 피하고자 벨기에를 선택했던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역사에 완전히 새로운 해석 시도

지은이 세계 전쟁사를 다룬 이 책에서 한 가지 이치를 전달하고자 한다. “강자는 역사를 이끌고 약자는 눈치를 본다”는 것이다. 미국·소련·영국을 한 편으로 하는 연합국과 ‘베를린-로마-도쿄’를 한 축으로 한 추축국 3국이 벌인 2차 대전에서 우리는 추축국들이 세계를 상대로 싸운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많은 나라들이 추축국에 동조하거나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거로 내세운다.


또한 역사에는 미스터리한 일이 많다.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인 히틀러와 관련한 미스터리를 소개한다. 바로 유명한 ‘다이나모 철수작전’이다. 1940년 5월 24일 북부 프랑스 됭케르크에 포위된 영-불 연합군에 어찌된 영문인지 히틀러는 공격중지를 명령한다. 연합군 30만 명을 일거에 몰살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그대로 보내는 바람에 연합군은 도버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철수한다. 히틀러가 공격을 하지 않은 데는 해석이 분분하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 속담도 미스터리를 더욱 재미있게 해석할 분석이 될까.


역사에는 알 수 없는 일, 이해하지 못할 일이 수없이 많다. 이런 과거에 나름의 해석을 붙여보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일이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에 발칙하다 할 만큼 새로운 해석을 통해 역사의 인과관계를 알아가는 것이 이 책을 읽는 재미일 듯싶다. 300쪽. 1만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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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인 한 아이가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말로는 같은 학급의 아이들이 계속 괴롭혀서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내성적인 이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런 고민에 휩싸였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전혀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며 견디어 왔습니다.

속으로야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며 온갖 상상을 다 했겠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행동으로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에게나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고자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자질이 나쁘다는 인식도 그렇지만 결국 나중에 피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고통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성적에 몰입한 공교육

이 아이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에게 관심을 얻고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학원에 나가 밤 11시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남들만큼 공부를 하면 저절로 반에서 성적이 올라갈 거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여전히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서나가는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의 관심을 얻고자 했던 계획과, 그래서 친구들의 괴롭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판단한 아이는 더는 학교에 나갈 수가 없었나 봅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정서불안 증세까지 보이던 그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지난 여름방학 때 부모의 동의로 휴학하고야 말았습니다.

학교가 어떤 곳인가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나이 7살이 되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공식적으론 이때 처음으로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치원이나 학원 같은 곳에서 미리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에 들어갑니다.

취학 전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또래 아이들에 비해 뒤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초교육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학교에선 대부분 한글과 수셈 등 기초교육이 된 상태라고 여기고 수업진도를 빠르게 나가기 때문입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기초학습이 부진한 아이는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또래 아이들과 수업을 받지만 그냥 공부 못하는 학생 정도로만 치부될 뿐 선생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학교에선 선생님이 반 아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쏟아 달라고 요구하기 무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각종 행사에 공문서 처리할 것이 좀 많습니까. 오죽하면 선생님들의 가장 큰 요구가 '학급에서 학생과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하는 것이겠습니까.

꼴찌와 왕따에 관심을

어쩌면 이 때문에 학부모가 공교육에 신뢰를 다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이 너무 성과 위주로 흐르는 것도 문제입니다. 서울대에 학생을 많이 진학시키는 고등학교가 좋은 학교로 평가받다보니 인성교육 보다는 아이들의 성적에 집중해 교육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선생님의 관심 밖으로 떨어져나가게 되고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공교육에만 의지하다가 손해를 보는 처지에 놓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안학교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을 보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공교육이 학업성적이 부진하거나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공교육이라면 이 아이들을 더 챙겨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가만히 놔두어도 공부를 잘 하지만 못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목적이 올바른 사회인으로 기르는 것이라면 '꼴찌'와 '왕따'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요.

부모와 학교의 무관심에서 아이들은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요즘같이 좋지 않은 환경이 세상살이 곳곳에 퍼져 있는 상황에선 더욱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내색하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살펴보는 게 부모나 선생님의 역할일 것입니다. 공교육은 그늘에 있는 아이를 양지로 불러내 끌어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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