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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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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사천 선진리성 야외공연장에서 펼쳐진 가산오광대 정기공연을 보고 왔다.


마산오광대나 창원오광대, 하기야 이 둘은 거의 유사한 탈의 모양과 스토리를 지녔기 때문에 딱히 분류하기도 애매하지만... 그리고 고성오광대, 나아가 통영오광대와도 상당히 다른 스토리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하물며 수영이나 동래야류와도 큰 차이가 있다.


가산은 가면의 특징이나 스토리 구성에서 진주와 조금 닮았다고 볼 수 있지만 그 역시 스토리 구조에선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날 아쉬운 것은 가산오광대 여섯마당을 모두 시연하지 않았던 점과 마이크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대사를 전혀 알아들을 수가 없었던 점이다. 대본이야 언제든 구하려면 구하겠지만... 너무 아쉬워서 다시 공연이 있다면 전 과장을 모두 시연하는지 확인해보고 꼭 관람을 해야겠다.


다음 기사는 그날 공연한 것을 바탕으로 '가산오광대'에 관해 경남이야기에 실은 것이다. 이 글 보시는 분께선 참고삼아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오광대 탈놀음. 합천군 초계면 밤마리에서 시작되어 진주 사천(가산)으로, 또 마산, 창원, 고성, 통영으로, 여기서 더 나아가 동래나 수영으로 가서는 들놀음으로 전파되어 경남 부산지역에 행해지는 탈놀음이 오광대 탈놀음이다.


탈의 소재는 대부분 바가지나 나무, 닥종이로 탈의 형태를 이루나 가산오광대의 탈에는 종이탈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그런 가산오광대 연희가 지난 6일 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성 야외무대에서 36회 정기공연으로 개최됐다.


오광대 연희는 조선시대 사회풍자를 핵심 소재로 하고 있으나 그 형태는 제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제의라 함은 액을 물리치고 복을 기원하는 벽사의식인데 그런 의미에서 무당이 제사상을 차려놓고 굿을 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중요무형문화재 73호인 가산오광대의 시작은 고사로부터 비롯된다. 연희가 시작되기 전, 무대 가운데엔 돼지머리를 비롯해 팥떡과 배, 사과, 바나나, 그리고 탁주가 준비되어 있다. 본격적인 연희를 앞두고 고사가 진행된다.


        본격적인 연희에 앞서 행사의 원활한 진행을 기원하며 고사를 지내고 있다.




이번 고사에는 가산오광대 연희참가자들뿐만 아니라 찬조출연하는 축동초등학교 학생들도 자리를 함께했다. 고사가 끝나면 가산오광대보존회장이 연희자들에게 각각 탈을 전달한다.


가산오광대는 총 여섯 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 과장이 독립된 듯하면서도 양반과장에서 등장한 큰양반이 마지막인 6과장까지 퇴장하지 않는 것을 보면 다른 오광대와는 달리 스토리가 이어지는 면모를 보이기도 한다.


대부분 오광대 탈놀음의 가장 큰 특징이 1과장은 오방신장이 나와 악사들의 풍악에 맞춰 덧배기춤을 추는 무대다. 오방신장이란, 중앙을 비롯해 동···, 이렇게 다섯 방향을 관장하는 신, 혹은 장군을 일컫는 말이다. 신과 장군이 동일시 되는 것은 장군신을 모시는 무속에서 비롯됐기 때문이다.





가산오광대 스토리의 또 다른 특징은 1과장에 등장했던 오방신들이 2과장이 시작되어도 퇴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과장에는 영노가 등장한다. 영노, 이 영노의 정체에 대해 딱 이것이다 라고 규정짓기 쉽지 않다. 각 지역 연희에 따라 반은 인간이고 반은 짐승인 가상동물로 해석이 되는가 하면 양반 1000명을 잡아먹으면 하늘로 승천하는 일종의 용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가산오광대에서 영노는 양반 대신 오방신장을 괴롭히는 사자형상의 존재다. 2과장에서 이 오방신장은 서울서 유람온 양반으로 묘사된다. 영노가 오방신장을 다 잡아먹고 흥겨이 춤을 추는데 이때 포수가 나타나 “땅 땅!”하고 총을 몇 방 쏘면 쓰러져 죽는다는 스토리가 독특하다.


3과장, 문둥이 과장이다. 원래 가산오광대의 문둥이는 절름발이, 입찌그랭이, 곰배팔, 언챙이, 코빠진놈, 이렇게 다섯 명이 등장해야 하나 이날 문둥이 과장에 두 명만 출연했다. 문둥이들은 장타령, 동냥거리, 투전놀이 등 생활을 통해 그들의 비참한 삶을 춤으로 나타내고 있다.







4과장부터는 양반에 얽힌 이야기가 전개된다. 큰양반의 탈은 박에다 개털을 가득 붙인 털복숭이 탈이다. 큰양반과 함께 등장하는 세 명의 작은양반들, 그리고 오광대놀음의 대표적 아이콘, 말뚝이가 등장한다.


양반들은 자기 과시를 하고 싶어서 말뚝이를 불러낸다. 그것도 아주 ‘양반스러운(?)’ 포즈를 잡고서. “이놈, 말뚝아~!” 첫 부름에 듣고 쪼르르 달려올 말뚝이가 아니다. 양반들은 돌아가면서 “이놈, 말뚝아~!”를 되풀이한다. 몇 번을 불러서야 말뚝이가 말채칙을 휘두르며 등장하는데. 양반들, 말뚝이에게 양반의 근본 자랑하려다 오히려 망신만 당하고 ‘옴메 기죽어’ 하게 된다.


오광대의 대표적 장면이어서 그런지 다른 오광대에 비해 스토리를 상당히 달리하는 가산오광대라도 이 부분은 별 차이가 없다.


5과장은 중과장이다. 조선시대 말쯤 불교가 많이 부패하면서 산에서 수도에 전념해야 할 중이 속세에 내려와 양반의 첩을 희롱하고 파계승이 된다는 얘기다. 광대들의 눈에 비친 조선 말의 사회상은 유교와 불교의 대립뿐만 아니라 사회 고위층의 위선 행위로 가득찬 모습이었을 것이다.






6과장은 할미와 영감과장이다. 다른 오광대와 달리 개털얼굴의 큰양반이 여전히 퇴장하지 않고 할미의 짝인 영감이 된다.


할미와 영감이 서울 갔다가 데려온 첩 간의 삼각관계를 다루었다. 여기에 다른 오광대와 달리 재산분배로 갈등을 일으키다 할미가 아닌 영감이 죽게 된다. 이러한 특징은 김해오광대에서도 나타나는데 동제인 ‘당산제’와 관련이 있다는 해석이다. 당산신이 여신이므로 마을굿 맥락을 따라 영감을 죽게 하고 ‘당산’ 할미를 살려내는 연희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광대 연희가 끝나면 전 배역과 관객들이 모두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어울려 논다. 이날 공연은 이후 다른 찬조 공연이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뒤풀이마당은 이후 펼쳐진 동래야류가 끝난 다음으로 미뤄졌다.


이날 가산오광대 정기공연은 가산오광대와 동래야류, 두 지역의 탈놀음을 비교해볼 수 있는 자리였다. 탈의 모양도 많이 다르고 스토리도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많이 다르다. 문화라는 것이 한 뿌리에서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지역이 갈리고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는 것이 당연지사다. 창원오광대, 마산오광대, 고성오광대에 이은 이번 가산오광대 탈 연희를 보면서 각각 다름을 확인하는 것도 재미있는 관람방법이리라.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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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이야기에 연극 기사를 올렸다. 지지난 주 성산아트홀 소극장에서 보았던 '당신만이'와 마찬가지로 늙어서 삶을 되돌아보는 그런 '노인성 연극'이다. 등장인물이 70대니까. 아직 이 연극을 보진 않았지만 소개된 정보로 보아 영감 젊은 시절 연극 배우에 대한 꿈을 접고서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온 것에 대해 언급이 있는 모양이다.

연극, 학창시절 잠시 해봤던 것도 내겐 큰 안줏거리인데... 만약 극단 활동까지 했더라면 어땠을까 싶다. 한때는 빠져드는 게 두려워 지레 겁 먹고 탈출하다시피 하며 공연장에 발길을 끊었던 적도 있지만. 그 피를 속일 수 없는 것인지... 딸아이 고등학교 때 1년이나 연극에 빠져버렸네... 적극적 만류로 겨우 벗어났지만... 영원히 등질 수는 없을 듯하다.

때가 올까...



“배우는 감정이입이 필수걸랑. 그 사람들이 그냥 막 외워서 하는 게 아니란 말이지.”

“당신은 그런 말도 못 들어 봤나? 진짜 인생이 더 드라마라고.”


단칸방에 살고 있는 70대 노부부. 이들의 유일한 낙이었던 TV드라마를 천둥번개가 치는 통에 무엇이 고장 났는지 볼 수 없게 되자 직접 드라마를 펼쳐보인다.


“이왕 할 거 배우들처럼 멋 좀 내 보자구요.”


할머니는 장롱에서 자식들에게서 선물받은 옷을 하나 둘 꺼내 맞춰본다. 천둥번개가 또 한 번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번쩍이면 젊은 시절로 돌아간 두 사람. 배우가 되고 싶었던 남편과 생활을 강조하며 남편의 꿈을 포기하게 한 아내.


그리고 막내의 사망 등 요란했던 세월을 보내면서 살아온 두 사람의 인생,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드라마가 아닐까.





오는 5일 오후 5시 밀양연극촌 가마골소극장에서 공연하는 <노부부의 연극놀이>에 대한 이야기다.


이 연극은 ‘극단 가마골’이 제작했다. 극단 가마골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연극단체다. 이들의 무대는 ‘한결아트홀’, 옛날 가마골소극장이다. 현재 가마골소극장은 밀양연극촌으로 옮겨왔다. 극단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극단은 밀양연극촌의 연희단거리패와 뿌리가 같다.


‘노부부의 연극놀이’라는 이 작품, 원제는 최보영 작가의 ‘드라마’다. 201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희곡부문 당선작이다.


아옹다옹 평생을 살아오면서도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감싸줄 수 있는 사람은 부부라는 것을, 이 노부부의 ‘드라마’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을 것 같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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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이나 관련 유적을 찾아가는 일은 재미있습니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실물이 존재한다는 것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요소이지만 그 현장을 보면서 이야기의 속내를 더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전설의 현장을 찾아가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은 일도 다반사입니다. 이번 ‘꽃처럼 바람처럼’의 소재가 된 ‘시락암굴’ 역시 현장을 찾기 쉽지 않았던 사례 중의 하나입니다. ‘전설텔링’ 시리즈의 첫 이야기였던 ‘도롱이 도깨비와 효자 박 선비 이야기’에 등장했던 ‘우곡각자’의 경우 네 번에 걸친 탐사 끝에 현장을 찾아냈으니까요.


그뿐만 아니라 ‘용의 눈물’에 등장한 ‘장군바위’는 사람이 다니지 않는 산 중턱에 있다는데 마침 때가 숲이 우거진 한여름이라 탐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만 사례도 있지요.


현장을 찾아내기 어려운 만큼 그 현장을 찾아냈을 때의 보람은 더 큽니다. 이번 시락암굴은 그런 차원에서 하나의 보람이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을 했을 때 이야기는 수도 없이 검색되어 나왔어도 그 현장 사진은 전혀 찾을 수 없었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마산합포구 진동에서 고성방향 삼진의거대로를 따라 가다 ‘암아교차로’에서 좌회전해 길따라 쭉 들어가면 7㎞ 지점에 시락마을이 있습니다. 아주 평화로운 시골마을입니다.











그래도 50여 가구가 사는 동네라 그런지 버스도 다니더군요. 마을회관에 들러 ‘시락암굴’을 아는지 물어보았습니다. 할머니 여러분이 계셨는데 처음엔 아무도 ‘시락암굴’을 모른다 하였습니다. 그러다 ‘바닷가 굴’이라고 하니 그제야 ‘아, 그거’하면서 알은 체를 하였습니다. ‘아랫속개’에 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라고 하였지요.


마을회관을 나와 동네 사진촬영을 위해 좀 걸어 나오는데 출타했다가 돌아오는 마을 이장님을 만났습니다. 시락암굴에 대해 물어보았지요. 이장님 역시 시락암굴이라는 표현에 대해선 잘 몰랐습니다 ‘바닷가 동굴’이라고 하니 “아~, 그 이순신굴?”이라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어렸을 적, 거기에 헤엄쳐서 가보기도 했는데…, 그래 거기에 무슨 이야기가 얽혀 있다더만. 우린 자세히는 모르겠고.”


어디쯤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거는 배타고 가야 할 낀데. 그냥 걸어서 들어갈라 카문 힘들끼라.”


이장님과 함께 있던 어르신이 이장의 대답에 말을 보탰습니다.


“갈라 카모 갈 수야 있지. 헌데 찾기가 쉽지 않을 끼라.”


어르신의 이 이야기에 현장답사에 대한 희망이 반 토막 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또 고생을 해야 하나. 어르신으로부터 경로를 자세히 안내받고 차량을 이용해 목적지로 출발했습니다. 가던 중 마을회관에 있던 할머니들의 말이 생각나 아랫속개에 있는 횟집에 들렀습니다.


“이 근처에 시락암굴이 있다 카던데 아시능교?”


횟감을 손질하던 중년 아주머니의 대답에 실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시락마을에선 이쪽에서 물어보면 알 거라고 했는데 아주머니의 대답은,


“그런 거 여기에 없어예.”


아주머니는 잘 모르고 있구나 생각하고 돌아나서려는데,


“창포고개 넘어가면 산에 동굴이 하나 있긴 한데…”


하는 것입니다. ‘설마, 산에 있는 동굴을 전설에서 바닷가 동굴이라고 표현했을까. 만조가 되어 물이 차면 동굴 입구까지 수위가 높아진다고까지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말이다.’ 그래서 차를 몰아 창포고개를 넘어 시락마을 어르신이 일러준 모 횟집으로 들어가서 또 물어보았습니다. 역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더군요.








창포리에서 동쪽으로 난 소로를 따라 가다 보면 그 어르신이 이른 대로 길이 있겠지 싶어 일단 걷기 시작했습니다. 40분을 걸어갔다가 나왔는데도 바닷가로 가는 길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시 이곳을 빠져나와 동진교 인근 바닷가 카페가 있는 쪽으로 이동했습니다. 바닷가 암굴이라면 혹시 이곳에서 관찰이 가능하지 않을까 여겼던 것입니다.


육안으로 잘 확인이 되지 않아 카메라에 망원렌즈를 달고 바닷가 오른쪽 끝에서부터 왼쪽 내만 쪽으로 사진을 여러 컷 찍었습니다. 카메라 LCD 패널을 통해 확대하여 관찰해보니 이야기 속의 암굴과 비슷한 곳이 하나 발견되었습니다. 아닐지 모른다 싶어도 일단 가서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의지가 일었습니다.








다시 창포 고개를 넘어 좀 전에 갔던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카메라를 통해 확인했던 위치에서 해변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나 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는 수 없이 마른 가지가 무성한 숲을 헤치고 가파른 경사를 따라 내려갔습니다. 웬 가시나무가 그렇게도 많던지. 100미터 남짓한 거리인데 1시간이나 걸려 내려왔습니다. 코를 찌르는 갯내가 어찌 그리도 반가웠던지.


멀리 사진 촬영을 하면서 위치를 확인했던 곳을 가늠하여 방향을 잡고 걸었습니다. 절벽이 바다와 맞닿은 곳이 있어서 그런지 물이 깊어 보이는 곳도 있었습니다. 두려운 마음이 절로 일었습니다. 조심조심 바위를 타고 건너갔지요. 그렇게 10분을 걸었을까 ‘뭔가 있다’는 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해안으로 내려와 암굴을 찾아 가는 길입니다.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고 마침 그곳에 도착했을 때 이야기에 나오는 그 암굴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카메라 셔터를 눌렀습니다. 동굴 안을 관찰하면서 약간은 실망했습니다. 암굴이 그리 넓지 않다는 것입니다. ‘시락암굴’ 전설을 소개하며 설명한 자료에는 어른 7~8명이 들어갈 수 있다고 했는데 기껏해야 3명 들어갈까 말까 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 더 자료에 대해 실망한 것은 시락마을에서 이곳의 위치가 동쪽으로 2㎞라고 했는데 위성지도로 보면 직선거리로 3㎞는 족히 되었기 때문입니다. 글을 올리는 사람들이 현장확인 없이 남의 글을 그대로 베껴 쓰다 보니 이런 일이 생겼겠지요.








이번 전설텔링 시리즈 3편에서 천동석의 손에 오빠를 잃은 강화선과 남편 최해원이 왜군의 눈을 피해 이곳 암굴로 가는 장면이 있습니다. 해안가 길을 따라가면 위성지도로 계측해보니 4.7㎞가 나오는군요. 전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밤새 묻어주고 지칠 대로 지친 몸을 이끌고 이곳까지 걸어오는 장면이 있는데 섬세하게 묘사하지 못한 게 아쉽습니다.


전설이 만들어진 곳이 시락마을이고 창포리의 절벽 아래 바닷가 암굴을 이야기하다 보니 ‘시락암굴’이 된 사정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거리상으로 마을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곳이라 과연 실제였다면, 젊은 부부가 왜군의 습격을 피해 이곳까지 왔을까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산속에 숨을 곳이 어디 한두 곳이겠습니까.


그럼에도, 바닷가 절벽 아래에 있는 바위동굴과 시락마을을 관련지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 지혜는 배울 만하겠습니다. 시락암굴, 그 현장을 탐사하면서 1592년 임진왜란 때의 그 비극을 더욱 실감 나게 상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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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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