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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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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왕의 아들을 구한 착한 부부이야기

고성군 하이면 월흥리 상족암 맞은편 병풍바위 신랑·신부굴


고성군은 공룡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전 세계를 통틀어 몇 개 없다는 공룡의 발자국 화석이 무더기로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자국이 발견된 상족암 인근은 군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이곳에 공룡박물관이 생기면서 많은 관광객이 찾는 곳이 되었다.


트레킹 코스인 공룡길을 따라 상족암으로 가도 되고 이왕이면 공룡박물관에 들러 각종 공룡

의 뼈와 화석들을 구경하고, 영화 상영시간에 맞춰지는 운이 있다면 3D 공룡영화도 볼 수 있으니 박물관을 들렀다가 상족암으로 내려가도 되겠다.



공룡박물관 전망대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전경.



병풍바위 옆으로 일명 브라자섬이라고도 불리는 안장도가 보인다.


상족암은 퇴적암인데 바닷물에 의해 침식되면서 절경을 빚은 자연의 멋진 조각품이다. 해식동굴이 생기면서 그 모양이 상다리처럼 생겼다 하여 상족암(床足岩)이라 이름 지어졌다. 이곳 상족암 앞 바닷물이 찰랑거리는 곳에 공룡의 발자국이 있어 그 자국을 따라 걸어보는 재미도 있다.


이곳에서 바다 건너편으로 보면 병풍처럼 막아선 커다란 바위절벽이 있다. 병풍 같다 하여 이름이 병풍바위다. 다른 말로 ‘입암’이라고도 하고 ‘선바위’라고도 부른다. 이 병풍바위 아래쪽에 동굴이 두 개 있는데 하나는 신랑 동굴이고 입구의 크기가 조금 작은 다른 하나는 신부 동굴이라고 부른다.



상족암에서 바라본 병풍바위.



사진의 왼쪽 위엔 전망대가 있고 그 아래에 신랑굴이, 오른쪽 끝에 신부굴이 보인다.



신부굴.


신랑 동굴은 입구가 둥근 편이고 신부 동굴은 세로로 좁다. 그렇지만, 신랑 동굴은 깊지 않지만 신부 동굴은 그 깊이가 40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정부 관광지식정보시스템의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서 연기를 피우면 4㎞ 떨어진 곳에서 연기가 솟았다.”라고 한다.


이 해식동굴의 이름이 각각 신랑 동굴, 신부 동굴이고 보면 필시 무슨 재미있는 이야기가 서려 있을 터. 관광지식정보시스템에 수록된 이야기를 여기에 다시 풀어본다.


“옛날에 이 어촌에는 청룡이라는 어부가 살고 있었는데, 마음씨가 착하고 마음이 정직하여 거짓말을 안 하는 우직하고 소박한 사람이긴 했으나 조금 어리석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청룡을 바보라고 부르며 놀려대었으나 그는 그저 좋아하기만 하였다.


청룡이 바보스러웠지만 그의 아내는 아주 똑똑하고 영리하며 얼굴 또한 절세미인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청룡에게 여복이 있다고 부러워했다. 청룡 또한 아내를 위하는 마음은 남달리 깊었으며 아내 또한 남편을 극진히 위하고 사랑하였기 때문에 두 내외는 금실이 좋았고 정이 깊었다.


그래서 비록 가난한 어부에 지나지 못하는 살임이었지만 초라한 초옥 안에는 단란한 웃음소리가 끊일 날이 없었다.


어느 해 가을이었다. 청룡은 여느 때와 같이 나룻배를 저으며 바다로 나갔다. 넓은 바다로 향하여 고기를 많이 잡고서 만선의 꿈을 안고 배를 저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물 위에 나뭇조각을 부여잡고 어떤 사람이 실신해 있는 것이 아닌가!


청룡은 깜짝 놀라 노를 저어 그 앞으로 다가갔다. 혹시 죽은 사람의 시신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럽게 건져보았다. 몸에는 아직 체온이 남아 있었고 그 사람의 형색을 보아 어부는 아닌 듯했다. 청룡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을 위해 잡은 고기를 그냥 두고 그 사람을 배에 싣고 급히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청룡은 아내와 함께 그를 따뜻한 방에 누이고 팔다리를 열심히 주물러 주며 극진히 간호했다. 그러자 죽은 듯 꼼짝 못하던 그가 부스스 눈을 뜨고 일어나 부인을 보며 말했다.


‘누구신지 모르겠으나 이렇게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주시니 그 은혜를 잊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치하하는 것이었다.


청룡부부는 ‘은혜랄게 있겠습니까?’ 하면서 어찌하여 바다에 떠 있게 되었느냐고 묻자 그 사람은 자초지종을 얘기하였다. 자기는 용왕의 아들로 태어나 바깥세상을 구경하기 위하여 세상으로 나왔다가 태풍을 만나 일행과 헤어져 이런 신세가 되었다며 앞으로 큰 재난이 닥치면 자기가 살고 있는 곳으로 찾아오라고 가르쳐주었다.


몇 년이 지나자 해안에는 왜구의 노략질이 심하여 마을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피난을 하였다. 그러나 청룡부부는 용왕 아들의 도움으로 피난을 가지 않고 그가 가르쳐 준 용굴로 피난하여 무사히 몸을 피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와 행복하게 살았다는 전설이 있다.”


병풍바위 전망에 입구에 설치된 이정표.



전망대에서 내려다 본 신랑굴.



원 안쪽, 반대편에 신부굴이 있다.


이러한 전설을 바탕으로 아마도 이 해식동굴들이 신랑 굴, 신부 굴로 이름 지어지지 않았을까 추측된다. 그래서 몇몇 자료에는 이 해식동굴이 용굴이라고 기록되기도 하다.


경남은행에서 발행한 ‘우리 고장 섬, 바다’란 책자에는 ‘자연이 펼쳐 놓은 열두 폭 병풍, 선바위’란 제목으로 관련 정보를 안내하면서 동굴에 대해서는 ‘자세히 보면 조금 큰 것과 작은 것 두 개가 있다 이름하여 쌍룡굴, 각각 수용굴과 암룡굴로 불린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서 얽힌 전설을 소개하고 있는데, 앞서 소개한 내용과 비슷하며 다만 “두 마리의 용이 살다가 승천한 곳”이라는 전설을 덧붙여 놓았다. 이러한 전설이 있어서 그런지 많은 사람이 이 신랑

신부 굴을 보면서 소원을 빈다고 한다.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이 병풍바위를 가까이 볼 수 있다. 상족암에서 공룡길을 따라 촛대바위를 지나고 20여 분 걸으면 입암마을을 만난다. 입암마을 방파제 쪽으로 가면 다시 나무데크 길이 조성되어 있다. 멀리 병풍바위 위에 불쑥 튀어나온 전망대가 보인다.



주상절리 경관.


이 전망대는 2011년 맥전포항으로 이어지는 데크를 설치할 시점에 만들어진 것이다. 낮은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전망대 입구에 상족암 1.6, 맥전포항 0.8㎞라는 양쪽 거리를 나타낸 이정표를 만난다. ‘맥전포’란 이름은 예전 이곳에 보리밭이 많아서 붙여졌다.


전망대는 절벽 밖으로 상당히 튀어나왔기 때문에 아래를 내려다보면 아찔한 기분을 피할 수 없다. 건장한 사내가 장난친다며 폴짝 뛰는 시늉만 내어도 겁이 나서 후딱 되돌아 나가야 하는 그런 분위기의 절벽난간이다.


여기서 왼쪽으로 내려다보면 신랑 굴이 보인다. 각도가 충분하지 않아 동굴 내부를 관찰하기는 쉽지 않다. 신부 굴은 아예 볼 수 없다. 동굴이 주상절리 돌기둥 절벽 반대쪽으로 났기 때문에 굴의 형태를 확인할 수 없다. 하는 수 없이 신부 굴은 상족암에서 망원렌즈로 당겨 봤던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이 전망대에서 바로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면 바위의 모양새가 묘하다. 바닷물이 찰랑거릴 때마다 하트모양이 드러났다가 사라졌다가 한다. 신랑굴 신부굴 앞에 있다는 것이 묘한 어울림으로 비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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