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산행)몇 년을 벼르다 겨우 가게 된 김해 분산성
두어 달 던 김해 신어산에 올랐을 때 분성산을 내려다 보면서 언제 저 산성을 걸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분선산성을 걷고 싶었던 생각은 훨씬 이전에도 있었다. 김해천문대를 오를때마다 들었던 생각이었는데... 김해천문대만 하더라도 무려 꼽을 손이 모자랄 정도이니. 그렇게 벼르던 분성산성을 어제, 2015년 1월 17일 드디어 걸었다.
그렇게 많이도 내려다 보던 분성산성이지만 어떻게 코스를 잡아야할지 막막했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 산을 좋아하는 지인이 떠올랐다. 예전 글공장에서 한솥밥 먹던 후배 최상호가 생각난 것이다. 친해서 그런 것도 있지만 이 인간은, 꼬시면 꼬시껴주는 매력이 있는 친구다. 덕분에 이날 분성산 산행은 재미가 있었다.
분성산 천문대 들어가는 입구에 차를 대고 걸음을 옮긴지 10여분 만에 왼편 등산로를 만났다. 시멘트 길로 쭉 올라가도 되지만 산행의 재미를 마이너스시키는 그런 길보다 흙길을 밟는 게 훨씬 마음을 편하게 해준다.
분성산에는 돌이 많다. 산비탈 여기저기 볼강스레 톡톡 튀어나온 바위들을 보는 눈이 즐겁다. 잠시 서서 멍하니 쳐다볼라치면 얘들이 서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는 듯하다. 혹시 모른다. 산에 오르는 우리에 대해 얘기하는지도.
등산로를 따라 조금 오르다 보면 체육시설이 있는 곳이 나타나는데 그 바로 아래에 삼등분된 바위가 있다.거참 신기하다. 누가 당근 자르듯 칼로 쓱싹 잘라놓은 듯하다. 단단한 바위가 자연적으로 저렇게 잘릴 수가 있는 것일까? 암튼 신통방통하다.
천문대가 있는 분성산 꼭대기. 하나도 힘들이지 않고 산을 올랐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반가운 일이다. 산, 그 자체가 괴로움이요, 고통의 대상이었던 때가 불과 몇 달 전이었다. 물론 이 정도 높이의 산을 가지고 산이라고 하기 멋쩍은 측면이 없는 건 아니지만.
분성산의 정상 바닥에 표지석이 있다. 그런데 분성산이 아니고 분산이다. 한자로 盆(동이분) 山(뫼산). 이 산이 낙남정맥에 딸린 산임을 나타냈다.
그런데 그 옆에 있는 또 다른 표지석엔 분성산이라고 적혀있다. 김해금강산악회에서 세운 것이다. 해발 382미터. 대충 산의 내력이 추측된다. 분산이 원래 이름이다. 그런데 산성이 있다 보니 분성산이란 이름을 붙인 모양이다. 오랜 동안 사람들의 입에서 그렇게 불려지면 그게 이름이 되는 것이니. 분산이라 하든 분성산이라 하든 틀린 것은 없다. 그런데 산성의 이름을 분성산성이라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중복이 된다. 앞으로 산성의 이름은 분산성이라고 하겠다. 그게 맞는 말이니.
분성산 꼭대기에서 분산성으로 내려가는 길 역시 사람들이 그리 다니지 않는 흙길을 택했다. 최상호 팀장이 몇 번 다녀봤다니 길을 잃은 염려는 없겠다. 따라 내려간다.
이 길로 잘 왔다 싶다. 좀 전에 산을 오르면서 보았던 돌들을 만났다. 멀리서 봤을 때 돌이었지만 이렇게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큰 바위다. 바위에 올랐다.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경치가 눈에 가득 들어오고 마음을 들뜨게 한다.
산, 바위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의 모습은 복합적이긴 하지만 묘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수십만의 사람들이 저 작은 시멘트 안에서 개미처럼 살아가고 있다. 나 역시 산을 내려가면 저런 곳에서 개미처럼 살지만... 이렇게 내려다 보는 상황이 되니 꼭 산신령이 된 듯하다.
분산성을 망원렌즈로 당겨 찍었다. 그런데 깔끔하지가 않다. 날씨 탓인가? 자다 일어난 눈 맨키로 뿌옇다. 산꼭대기에 산성이 빙 둘러쳐져 있다. 이걸 태뫼식 산성이라 한다. 산에 띠를 둘렀다는 뜻이다. 이러한 산성축조법은 고려말에 전성기를 이루었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물론 이 산성은 삼국시대에 지어졌단다.
망원을 좀 더 당겨 찍었다. 성벽의 깔끔한 선이 제법 멋있게 보인다. 왜구가 쳐들어왔을 때 저곳에서 항전을 했을 고려병사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절벽 위에 세워진 성벽이니만큼 지형적으로 아주 유리하다. 때문에 왜구들이 전전긍긍했을 모습도 그려진다.
산을 내려가다 다시 오르는 시점에 이정표가 있다. 산성부락으로 향한다. 길은 잘 조성되어 있다. 잘 만들어진 둘레길과 같다.
길을 따라가다 보면 플라스틱 의자 두 개가 과객을 부른다. 쉬어가라고. 앉으니 김수로 드라마 촬영지였던 가야테마파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한참 조성중이다. 좀 멋있는 건물을 짓는 듯하다. 뭘 짓는 것일까. 주위엔 아라비아 풍의 건물도 있고 초가로 지붕을 한 건물들도 있다.
김수로의 궁전이었을 기와지붕의 건축물들도 내려다보인다. ... 가야시대에 이러한 건축양식이 있었을까? 한 번 찾아봐야겠단 생각을 하면서 이동했다.
분산성벽. 감히 기어오를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높이다. 옆길을 걸으며 중압감을 느낀다. 어떻게 이런 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 크고 작은 돌들이 적절한 자리를 잡아 전체적으로 반듯한 조화를 이룬 게 신기할 정도다.
산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의 높이다. 실제로 고려말 성곽에 이런 문을 만들었을지는 알 수 없으나 만약 적이 여기까지 침범해 들어왔더라도 이 작은 공간을 통과해 들어가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만장대. 분산을 따로 만장대라고 부르기도 한단다. 만장대가 있는 이 봉우리의 높이는 해발 323미터.
만장대에서 본 신어산 은하사 풍경. 은하사나 동림사나 절들이 자리잡은 곳은 신어산의 자궁 자리이다. 멋지게 자리잡았단 생각이 든다.
신어산과 은하사, 동림사. 왼쪽 앞에 철탑이 딱 거슬리네...*^^*
신어산의 산세도 절경이다. 바위 절벽이 여간 장엄한 게 아니다. 저런 바위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온갖 형상이 나타날 것이다. 그런 가운데... 전설도 생기고...
고종황제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의 친필이란다. '만장대'. 당시 산성을 보수하면서 흥선대원군이 여기까지 와서 역사의 한획을 그었군.
협곡같은 바위 사이를 지나 해은사로 가는 길에 위치안내도가 있다.
충의각. 이곳엔 4개의 비석이 있다. 맨 왼쪽 게 당시 김해부사였던 정현석이 흥선대원군을 기리며 '만세불망'비를 세웠다. 흥선의 관심을 만년 동안 잊기 않겠다니... 거참... 만년을 살겠다는 욕심은 있었을까... ㅋㅋ. 죽어서도 잊지 않겠다는 거겠지만... 어쨌든 저 비석은 앞으로 만년 갈는지 모르겠다.
충의각에 대해 잠깐 설명을 곁들이면, 충의각은 분산성의 수축내력 등을 기록한 4개의 비석을 보존하기 위해 건립한 거란다. 정국군박궁위축성사적비는 고려말 분선성을 보수하여 쌓은 박위장군의 업적과 내력을 기록해 김해부사 정현석이 1871년에 세운 것이고, 흥선대원군불망비 2개는 분산성 보수하는 걸 허락해준 흥선대원군 뜻을 기리고자 세웠다. 이 비석엔 정몽주가 쓴 분선성 관련 글도 새겨져 있다.
또 부사통정대부정현석영세불망비는 정현석 부사의 공을 기리고자 고종 11년, 그러니까 1874년에 세워진 것이다. 매년 양력 10월 28일에 이곳에서 제례를 지낸단다. 이들의 공을 기리기 위해.
충의각 앞에서 점심을 먹었다. 따스한 햇살이 밥맛을 더욱 돋웠다. 바로 5미터 옆으로는 똥바람이 세차게 불기에 이 자리가 더욱 명당으로 여겨진다. 막걸리도 한잔...
해은사로 들어서면 추위에 와들와들 떨고 있는 듯한 용왕조각상을 발견할 수 있다. 옹달샘에선 물이 분수로 솟아 오르고 있으나 추위 때문에 주변이 꽁꽁 얼어붙었다.
가락고찰 해은사. 해은사는 범어사 말사다. 약 2000년 전에 지어진 거란다. 물론 2000년 그대로일리야 있겠나. 수십차례 보수되고 중건되고 했겠지. 가락국이 세워지고 7년 후 아유타국에서 허황후가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왔는데... 머나먼 바닷길 풍랑을 막아준 용왕에게 감사하며 지은 절이라고 한다. 그래서 절 이름이 해은사다. 불이문을 통해 사찰 안으로 들어가면 대왕전이 바로 앞에 나타난다. 대왕전은 가락국의 김수로와 허황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해은사 사리탑(?) 문양이 독특하다. 아마도 인도 아유타를 상징하는 조각이리라. 그런데 이 탑 앞에 파사석탑 적멸보궁에 대한 연혁이 설명되어 있다. 적멸보궁이라 함은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진 곳이다. 이곳에 부처님 진신사리가 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드는데... 우리나라 5대 적멸보궁은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이고 이밖에 달성군 비슬산 용연사와 사천 다솔다에도 적멸보궁이 있다고 한다.
어쨌든 이곳에 쓰여진 연혁대로라면, 부처님이 80살 되던 해 열반에 들었는데 진신사리를 세상 8곳에 나누어 봉안했는데 그후 300년이 지나 인도 아쇼카왕이 진신사리를 재분배했고 그중 일부가 송나라에 전해졌다. 송나라에서 방자면, 소철, 소동파 시인 소식, 그리고 법태 대선사에게 차례으로 전해졌다. 그러다 청나라 때 추사 김정희가 진신사리를 얻어 해남 대흥사 연파혜장선사에게 증정했다. 이게 약 200년 전이다. 이때 다성(차의 성현)으로 알려진 초의선사에게 전수되고 다시 김해 신도회장 배석현 거사가 이를 얻어 3과는 연화사 칠층석탑에 모시고 3과는 분성 만장대 해은사 타고봉에 모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전남 해남 대흥사에서 찍은 초의대선사 동상.
암키와로 조성한 담장. 기와를 차곡차곡 쌓아 담장을 만든 것인데... 제법 멋스러움을 자아낸다.
분산성곽 일부 구간은 무너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두었다. 세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잇는 구간이다.
잘 쌓아 반듯한 모습의 분산성곽. 산성의 멋스러움을 그대로 표출하고 있다.
하산했다. 가야테마파크로 들어가는 입구는 잠겨있다. 내부 조성 중이기 때문이다. 오는 5월 개장할 거란 안내문이 있었다. 개장하면 한 번 놀러 와봐야겠다. 분성산으로, 산성으로 한바퀴 휘 돌았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지만 몸에 이로울 정도의 운동은 한 셈이다. 밥가 막걸리로 에너지를 충분히 보충했기에 배가 든든하다. 나른한 겨울 햇살이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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