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꽃처럼 바람처럼(1)
이 이야기는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전면 시락마을의 바닷가 조그만 암굴에 얽힌 전설입니다. 입에서 입으
로 전해져 내려온 전설이지만 그 내용이 너무 사실적이어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정렬부인’이라 불리던 여성이 실제로 있었던 것은 아닐까 추측하게도 합니다.
때는 조선의 영웅 이순신 장군이 바다 곳곳에서 승전고를 울리며 왜적을 물리치던 임진왜란 그 시점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공격을 받은 왜군들이 도망을 가면서 이 시락마을을 지나게 되지요. 왜군은 달아나면서도 마을을 불태우고 무고한 백성의 생명을 앗아가곤 했지요.
시락마을에 왜군이 들어오자 마을에 살던 젊은 부부는 바닷가 암굴에 몸을 숨겼습니다. 이 암굴은 사람 7~8명이 들어갈 수 있는 정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달아나던 왜군들이 이 암굴을 발견하고 들어왔습니다. 젊은 부부가 숨어있는 것을 보고 왜군들은 남자는 그 자리에서 베어버리고 기절한 여자는 배에 싣고 달아났습니다.
배에서 정신을 차린 여자는 왜군들이 자신을 욕보이려 하는 것을 완강히 물리쳤습니다. 밤이 되어 왜군들이 모두 곯아떨어진 그때, 여자는 품속에 깊이 간직하고 있던 칼을 꺼내어 배의 바닥을 파내었습니다. 밤새 후벼 판 덕에 배 바닥에는 구멍이 뚫리고 배는 서서히 가라앉기 시작했지요.
여자는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바다에 뛰어들었고 왜군들은 배의 침몰과 함께 모두 물귀신이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정렬부인’이라 일컬어지는 그 여자는 어쩌면 힘없고 독한 마음 하나 없이 평범한 아낙이었을 겁니다. 그런 여인이 왜군에 의해 남편을 잃고 치욕스러운 상황까지 당하게 되자 복수의 일념으로 배를 침몰시킬 때까지 배의 밑바닥을 후벼 파는 장면에 전율까지 느껴집니다.
‘꽃처럼 바람처럼’은 임란시기 이 장면을 모티브로 이야기 앞뒤에 여러 상상력을 덧붙인 것입니다. 그래서 등장인물이 구체적으로 묘사되거나 가상의 인물이 덧붙여지고 줄거리도 좀 더 폭넓게 전개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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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봄. 따사로운 햇볕이 시락마을 앞 논에 가득합니다. 아침 일찍 논에 나온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손에 벼 모종을 들고 못줄을 따라 길게 줄을 서서 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가운데서 선창을 하고 다른 사람은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면서 후렴을 합니다. 농민들의 구수한 모심기 노래에 동네 참새들도 나뭇가지에 앉아 짹짹거리며 박자를 맞추는 듯합니다.
아래웃는 모꾼들아 에헤이 춘삼월이 어느땐고
우리넘이 가실적에 에헤이 춘삼월에 오마드라
이논에다 모를심어 에헤이 감실감실 영화로세
그논에다 모를심어 에헤이 너울너울 영화로세
모시적삼 헌적삼에 에헤이 연적같은 저젖보소
….
논배미로 나뉜 논마다 돌아가며 마을 사람들은 모를 심었고 노랫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한참 모를 심고 쉴 때마다 참이 왔습니다. 참을 이고 논두렁으로 걸어오는 아낙 뒤에는 어린 아이들이 졸졸 따라붙었습니다.
“벌써 점심참인가베?”
여동생인 화선이가 다른 아낙들과 함께 참을 머리에 이고 논두렁으로 들어서자 신우가 허리를 펴고는 옆에서 모를 심던 친구 해원을 툭 치며 말했습니다.
“시간도 빨리 가지. 벌써 점심인가? 이거 오늘 해안에 모를 다 심기나 하겠나? 하하하”
해원도 허리를 펴고는 아내 화선을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친구, 화선이가 매번 참을 가지고 오니까 은근히 좋으면서 말이야!”
신우는 해원의 허리춤을 진흙이 묻은 손으로 툭 쳤습니다. 해원도 질세라 흙 묻은 손으로 신우의 옆구리를 치고는 겅중겅중 논 밖으로 나왔습니다.
“자, 먹고 하입시더!”
함께 일하던 마을사람들도 논둑으로 나왔습니다. 사람들은 논둑에 여기저기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참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촌장님, 탁배기 한잔 드시이소.”
신우가 밥을 먹다 막걸리를 한 사발 부어서는 촌장에게 다가갔습니다.
“촌장님예, 내일이 단옷날인데 씨름대회 크게 한 번 벌여야지예. 이번에는 산너머 어신마을하고 합치가지고 크게 한 번 하모 어떻겠습니꺼?”
신우는 매번 씨름대회 때마다 우승을 했던 터라 이번에는 이웃마을 장사들과도 힘겨루기를 해서 동네장사라는 인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촌장은 신우의 의견에 찬동을 했고 바로 열대여섯 먹은 아이를 통해 어신마을 촌장에게 기별을 넣었습니다.
해가 뉘엿뉘엿 서산을 넘어갈 즈음에 모심기는 모두 끝이 났습니다. 어신마을 쪽에서도 올해 단오씨름은 공동으로 하는 것에 찬성을 했고 장소는 시락마을로 정해졌습니다.
단옷날 아침이 되자 어신마을 사람들이 줄을 지어 건너왔습니다. 남정네들이나 남자아이들은 산을 넘어 지름길로 건너왔고 아낙들과 어린 아이들은 바닷가 길로 둘러서 시락마을에 왔습니다.
“채챙 채챙~! 둥두두둥. 징~”
드디어 두 마을 공동 단오행사가 시작되었습니다. 마을 공터 가운데엔 씨름판이 만들어지고 산 아래쪽에는 큰 그네가 설치되었습니다. 이것은 부인들과 아가씨들이 추천놀이, 즉 그네뛰기를 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자들도 누가 그네를 더 높이 뛰나 내기를 하였습니다.
화선은 은근히 그네를 뛰고 싶은 욕망이 일었지만 관두고 씨름 선수로 출전한 오빠를 남편과 함께 응원하기로 하였습니다. 화선의 남편 해원이 씨름 선수로 나가지 않는 것은 체구가 남자치고는 좀 작을뿐더러 늘 글만 읽는 서생이라 힘도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좋아서 사서삼경은 물론 옛사람들의 시문에도 능통했습니다.
해원은 씨름에 나갈 신우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잘 싸우라고 격려했습니다. 신우는 혜원에게 아무 염려 말라 하고는 씩 웃어주었습니다. 그때 신우는 경기장 맞은 편에서 언제부터인가 자신을 계속 주시하고 있는 눈빛을 감지했습니다.
천동석. 그는 어신마을 출신으로 몇몇 젊은 아이들을 패거리로 모아 돌아다니는 불량배 우두머리입니다. 멀리는 고성 읍내까지 장터를 누비면서 상인들로부터 돈을 갈취하기도 하고 그곳 불량배들과 툭하면 싸우는 망나니 같은 사람입니다.
징소리와 함께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우는 첫 시합에서 상대를 너무 쉽게 쓰러뜨렸습니다.
“와! 강신우 최고다!”
“오빠 일등!”
샅바를 고쳐매고 심판과 관중석을 향해 간단히 목례를 하고 돌아 나오는 신우를 보면서 동생 화선과 친구 해원이 엄지손가락을 치세우며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어신마을 천동석도 그렇게 우람한 체구는 아니지만 꾀가 많아서인지 여러 경기에서 번번이 승리를 하며 올라왔습니다.
그리하여 맨 마지막, 결승에 신우와 천동석이 맞붙게 되었습니다. 징이 울렸습니다. 화선과 해원의 응원을 받으며 신우는 모래판 가운데로 걸어나갔습니다. 천동석도 그의 똘마니들로부터 응원을 받으며 모래판 가운데로 걸어나왔습니다.
강신우와 천동석. 두 사람은 무릎을 꿇고 마주 앉아서 서로의 샅바를 잡았습니다. 천동석은 강신우의 샅바를 잡으면서 자못 긴장하면서도 안 그런 체하였습니다.
“이거 돼지가 따로 없구만. 내가 사람하고 씨름을 하는지 돼지와 하는지 모르겠네. 응?”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여 이겨보려는 천동석의 계략을 모를 리 없는 신우는 느긋하게 응대했습니다.
“돼지를 못 이길 사람은 없을 테고. 자네가 내게 지면 쥐새끼가 되겠구만. 응?”
“어림없는 소리 말라구. 내가 이래 봬도 장터 돌아다니며 자네보다 더 큰 덩치들 수없이 꼬꾸라트렸지. 조심하라구.”
심판이 두 사람의 등을 동시에 탁 쳤습니다.
“시작!”
강신우와 천동석은 한동안 서로 샅바를 마주 잡은 채 경계를 하였습니다. 신우도 상대가 그리 만만찮음을 느꼈습니다. 그리 큰 체구는 아니어도 힘이 얼마나 세게 들어갔는지 몸이 딱딱한 쇠꼬챙이 같았습니다.
천동석은 덩치가 자신보다 큰 상대를 쉽게 무너뜨리기 위해선 상대의 힘을 이용하는 전략이 잘 먹힌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몇 번 상대를 그런 전략으로 이겼기 때문에 강신우에게도 그 방법을 써먹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천동석은 전광석화와 같이 강신우의 샅바를 끌어당기며 배지기를 하려 했습니다. 덩치가 더 크고 힘이 센 강신우가 오히려 배지기로 자신을 넘기려고 하는 순간을 기다린 것이지요. 그때 발 뒤축을 뒤로 빼면서 되치기를 할 요량이었습니다.
그러나 강신우는 천동석을 번쩍 든 채로 그대로 있었습니다. 천동석의 작전을 간파했기 때문입니다. 들배지기 기술이 들어간 것입니다. 강신우는 몸의 방향을 틀면서 천동석의 중심을 흩트려놓은 다음 육중한 몸으로 천동석을 덮었습니다.
강신우에게 깔려 충격을 받은 천동석은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정정당당하게 붙어선 이길 수 없다는 판단을 하였습니다. 두 번째 판에서 천동석은 미리 모래를 쥐고 있다가 강신우의 얼굴에 뿌렸습니다.
아무리 야비하고 교활한 천동석이라도 씨름대회에서 이런 반칙을 쓸 줄은 꿈에도 몰랐기 때문에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천동석은 눈에 모래가 들어가는 바람에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한 강신우를 끌어당기는 수법을 이용해 무릎을 꿇게 했습니다.
“보이소, 심판! 상대가 우리 선수한테 얼굴에 모래 뿌렸다 아인교! 못봤는교?”
“그래, 맞아. 저 사람이 이쪽한테 얼굴에 모래를 뿌리더만!”
화선과 해원이 심판에게 천동석이 반칙을 썼다고 항의하고 구경꾼들도 천동석이 반칙을 썼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무슨 소리야? 씨름하다 보면 모래가 튀고 그러는 거지. 지니까 괜히 억지 부리고 있어.”
천동석이 오히려 큰소리쳤습니다.
“괜찮아. 마지막 판에서 이기면 돼. 저 녀석이 어떤 비열한 짓을 또 할지 모르니 이번엔 속전속결로 끝내야겠어.”
신우는 우려하는 해원과 화선을 안심시켰습니다.
삼세판. 단판으로 끝나던 준결승까지와는 달리 결승에선 세 번을 겨뤄 두 번을 이긴 사람이 승자로 뽑히게 됩니다. 다시 상대의 샅바를 맞잡은 두 사람은 심판의 신호가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시작!”
그 소리와 함께 강신우의 기합소리가 온 마을을 울렸습니다.
“으라차차차!”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천동석의 몸이 번쩍 하늘로 솟구치더니 그 자리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모래사장에 얼굴이 처박힌 천동석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일어서서는 강신우를 노려보았습니다. 분이 삭히지 않자 자기 부하들을 있는 대로 걷어차고 신경질을 부렸습니다.
시락마을 사람들은 신우를 헹가래치며 좋아했습니다.
“역시 강신우를 당할 자는 없네, 그려.”
“어신마을도 평정을 했으니 다음 씨름 대회는 더 많은 마을과 함께 열어야겠는 걸. 하하하.”
신우와 해원은 받은 송아지 고삐를 화선의 손에 쥐어 집으로 돌려보내고 주막에서 밤이 늦도록 술을 마셨습니다. 동네 아저씨들도 일등을 축하하며 오며 가며 한 잔씩 주기도 하였습니다. 술이 약한 해원은 몇 잔 만에 혀가 꼬였습니다.
“역쉬 자넨 내 칭구야. 처남! 자넨 무과에 급제하고 난 문과에 급제해서…. 끄윽. 이 어지러운 세상 똑바로 한 번 세워보세!”
“어허! 이 친구 벌써 이러면 어쩌나. 안 되겠어. 자, 일어나게. 집에 데려다 줌세.”
신우가 해원을 부축하여 골목을 돌아나왔을 때였습니다. 몇몇 그림자가 돌담에 붙어 움직였습니다. 신우는 순간적으로 뭔가 불길하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보게, 잠깐만 여기 앉아….”
신우가 해원의 팔을 어깨에서 풀려던 그 찰나였습니다. 담장에서 튀어나온 그림자가 신우의 복부를 흉기로 찔렀습니다.
“윽!”
신우는 짧은 비명과 함께 앞으로 꼬꾸라졌습니다.
다른 그림자가 신우의 머리 쪽으로 걸어나왔습니다. 배를 움켜쥔 손 위로 선혈이 흘렀습니다. 신우는 핏발이 선 눈을 들어 그림자를 쳐다보았습니다.
“돼지가 이제야 사람을 알아보는 듯 하구만. 난 누구에게도 지고는 못 사는 성미라서 말이야. 앞으로 날 보면 알아서 잘 모셔야 할 거다.”
“천동석 이놈!”
천동석은 강신우의 얼굴을 향해 힘껏 걷어찼습니다. 강신우는 옆으로 쿵하고 쓰러졌습니다.
“이보게, 신우! 아, 이걸 어째.”
해원은 손을 부르르 떨면서 신우를 일으키려 하였습니다. 천동석은 해원에게 걸어왔습니다.
“아, 아까 낮에 돼지새끼 어깨를 주무르던 놈 아닌가? 헤헤헤. 이 녀석도 맛을 좀 보여줘야겠어.”
해원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습니다.
“여기 사람이 죽어가요. 누구 없어요?”
“아니 이 자식이? 애들아, 이 녀석도 바람구멍 몇 군데 만들어 줘라.”
“사람 살려요! 사람 살려요!”
“땅! 땅! 따당!”
그때 해원에게도 신우에게도, 물론 천동석 패거리에게도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괴상하고 기분 나쁜 소리가 연이어 들려왔습니다.
(다음 주 2편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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