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이무기와 처녀 제물(4)
(지난 줄거리)하동 동경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이무기로부터 처녀를 제물로 바치라는 요청을 받고 고민 끝에 제비뽑기를 해서 이서방의 딸 설희를 산꼭대기로 데려갑니다. 이무기는 마을사람들에게 재난을 당하지 않으려면 자신의 말에 순순히 따르라며 엄포를 놓고 설희가 탄 가마를 물고 물속으로 들어갑니다.
이무기의 궁전. 설희는 이무기가 자신의 몸을 감고 온몸에 독을 바르는 이상한 꿈을 꾸다가 깨어납니다. 설희는 이무기의 궁전에 머무는 동안 이무기가 곧 나라를 자신의 손아귀에 넣을 계획을 알아차리고 이곳을 탈출할 계획을 세웁니다.
설희는 잠자리에서 우연히 이무기의 흰 머리카락으로 가려진 반쪽이 인간의 모습이란 것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그 인간 모습의 이무기가 설희에게 탈출방법을 알려줍니다. 보름달이 뜬 밤 지하신전에 있는 푸른 구슬을 들면 결계가 풀려 밖으로 나갈 수 있다고 말입니다.
설희는 다시 인간 모습의 이무기에게서 지하신전 열쇠를 구해 탈출 시기를 모색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이무기와 이무기 부하들에게 잘 대해주어 마음을 놓게 하고선 보름날 밤 지하신전으로 들어갑니다. 뱀 병사들이 쫓아 들어오자 구슬을 던져 그곳을 빠져나옵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이무기는 화가 치밀어 천둥을 치게 하고 폭우를 내리게 합니다. 설희는 쉬지 않고 달려 집으로 돌아옵니다. 아버지가 마당에서 비 피해를 막기 위해 창고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버지.” 설희를 본 이 서방은 믿기지 않아 그만 뒤로 엉덩방아를 찧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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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그간 맘 고생이 얼마나 많으셨어요? 제가 살아 있었어도 연락드릴 방법이 없었습니다.”
“무슨 소리냐? 니가 이렇게 살아있다니, 이게 꿈인지 생신지 모르겠구나.”
이 서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설희는 일어나는 아버지의 손을 잡아 부축하고는 아버지의 품에 꼭 안겼습니다.
“자, 이러다 감기 걸리겠다. 들어가자꾸나.”
설희는 방으로 들어와 아버지께 이무기의 계략을 전했습니다.
“아버지, 이무기는 곧 이 나라를 지배하려 들 겁니다. 날이 밝는 대로 관아에 가서 이 사실을 고하고 군사를 불러 이무기를 물리쳐야 해요. 그러지 않으면 임금님도 쫓겨나고 온 백성이 이무기의 신하가 되어야 할 거예요.”
이 서방은 설희의 말이 너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 이무기가 임금님을 쫓아내고 왕이 된다는 말이냐?”
“네, 터무니없게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이에요. 지난 며칠 사이에도 자기 말을 듣지 않는 마을 여러 곳에 질병을 퍼뜨리고 수많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였어요.”
지금까지 이무기가 한 짓을 생각하면 딸의 말이 거짓으로 꾸며낸 말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이 서방은 그래도 설마 했습니다. 이 나라가 얼마나 큰데 동네 이무기가 무슨 힘이 있어 수많은 군대를 거느리고 있는 임금을 쫓아낼 수 있을까 의심이 되었던 거지요.
“설희야, 관아에 신고하는 것은 좀 더 고민을 해보자. 이만 씻고 자거라.”
다음날 아침, 비는 멎었습니다. 설희는 부엌에서 밥을 안치고 마당으로 나왔습니다. 그때 동네에서 바보라고 놀림 받는 진찬이가 집앞을 지나가다가 설희를 발견합니다.
“설희야, 히~. 너 이무기에게 시집갔다며 언제 왔어? 어어, 그러니까 너 쫓겨났구나. 히, 바보.”
설희는 여느 때 같으면 진찬이를 보자마자 “너, 혼난다” 하며 팔을 걷고 쫓아갔겠지만 이번엔 가만히 웃고 넘겼습니다.
진찬이는 예전처럼 설희가 화를 내며 쫓아올까 봐 몇 걸음 도망을 가다가 되돌아봅니다.
“어, 어. 안 잡으러 오네. 이무기에게 시집가서 착해졌나 보다.”
그러고는 자기 집이 있는 곳으로 뒤뚱거리며 사라집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이 이 서방의 집으로 몰려왔습니다. 설희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진찬이에게서 듣고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이무기에게 잡혀먹힌 설희가 살아있을 리 없다고 여겼습니다.
“이 서방 있는가?”
사립문 앞에서 박 서방이 불렀습니다. 방에서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진찬이 말대로 설희였습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설희구나.”
“귀신은 아닌 것 같아. 어떻게 살아왔지?”
사람들은 들어오려다 말고 문밖에서 웅성거렸습니다.
“네, 저 설희 맞아요. 어젯밤 이무기 소굴에서 도망쳐 나왔어요. 아버진 일찍 촌장님 댁으로 가셨어요. 조금 있으면 촌장님이 여러분들을 다 모이라고 할 거예요.”
사람들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습니다.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한데 뭐가 뭔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설희는 내심 촌장이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관아에 이무기의 계략을 알려 이 동네에 수많은 군사가 올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한편, 촌장의 집. 이 서방이 맥빠진 표정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촌장의 말이 너무 무심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지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아이를 어떻게 다시 이무기에게 바치자는 말을 할 수 있는가. 생각할수록 촌장이 미워졌습니다. 만일 자기 딸이었대도 그랬을까.
“아침 먹고 다시 오게. 무당과 사람들을 불러모아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논의해 보세.”
집으로 돌아온 이 서방은 설희에게 마을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이 서방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제가 이무기에게 돌아간다면 지금 당장 해코지는 면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머지않아 모두 이무기에게 가진 것 다 내놓고 그것도 모자라 목숨까지 바쳐야 한다는 것을 왜 모를까요? 아버지, 나중에 열리는 마을회의에 저도 참석하겠어요.”
“아서라. 괜히 니가 나섰다가 더 일이 꼬일 수 있으니.”
마을은 설희의 일로 어수선했습니다. 동네 아이들마저 설희 누나를 이무기에게 다시 보내야 하느니 우리가 지켜야 한다느니 하며 목청을 올렸습니다. 설희는 이무기를 지금 물리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정보를 나라에 알리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했는데 마을사람들은 오히려 자신을 다시 이무기에게 바쳐야 한다고 주장을 하니 한심하고 갑갑한 노릇이었습니다.
같은 시각 동경산 꼭대기 이무기 궁전에서는 이무기가 마을을 정탐하러 보냈던 병사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래, 마을 분위기는 어떻더냐?”
“무당의 말로는 마을 사람들이 곧 마마를 다시 이곳으로 돌려보낼 것이라고 합니다.”
병사의 보고를 들은 이무기는 깊이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당장 마을을 공격하면 속이야 후련하겠지만 앞으로 아내가 다칠 우려가 있으니 함부로 병사를 보낼 수도 없습니다. 자칫 잘못하여 설희 뱃속에 있는 자신의 아들이 잘못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들어라! 마을에서 황후가 돌아오면 그 즉시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모두 척살하고 마을을 불태워버려라.”
“예, 폐하!”
마을에서 보는 동경산은 고요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언제 이무기가 해코지하러 내려올지 모른다며 불안에 떨고 있었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큰 삿갓을 쓴 스님이 설희의 집 앞에서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자 설희가 문을 열고 나왔습니다.
“허기진 노승이 이곳에서 밥 한 끼 얻을 수 있을까요?”
“네, 스님 방으로 들어오세요.”
설희는 스님에게 따뜻한 밥을 밥상에 얹어 몇몇 반찬과 함께 차려주었습니다. 삿갓을 벗고 밥상을 기다리던 스님은 설희에게 다시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며 합장을 하였습니다. 설희가 방에서 나가자 스님은 밥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숟가락을 잘 뜨지 않았습니다.
‘허어, 이상한 일이로다. 처자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그런데 예사 관상이 아니야. 지존이 될 상인데….’
밥을 다 먹은 스님은 상을 들고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리 주세요.”
설희가 얼른 부엌에서 나와 스님에게서 밥상을 받았습니다.
“낭자, 무슨 근심이 있나요? 얼굴에 수심이 가득 찼습니다.”
설희는 갑갑한 마음에 그간 있었던 일들을 스님에게 소상히 설명했습니다.
설희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스님은 촌장의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마을에 근심이 가득하군요. 근심을 잠재울 방도가 없지는 아니오만.”
스님의 말에 촌장은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잠시 후면 사람들이 이곳에 모일 것입니다. 그때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방도를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촌장의 방에 마을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무당도 굿을 하다가 달려와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촌장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이 서방의 딸 설희가 엊저녁에 이무기로부터 벗어나 마을로 돌아왔습니다. 아직 이무기는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것 같은데 우리가 어찌 하느냐에 따라 이무기의 태도가 달라질 것으로 봅니다. 설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촌장의 말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당연히 설희를 이무기에게 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좀 조용히 하세요. 한 사람씩 이야기를 해봅시다.”
이때 설희의 아버지 이 서방이 입을 열었습니다.
“이무기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관군의 도움을 받아 물리쳐야 합니다. 언제까지고 계속 이무기에게 모든 것을 바쳐가며 살 것입니까? 지금까지 이무기의 행실을 보면 이번에 설희를 다시 바친다고 해도 우리를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무당이 이 서방의 말을 받았습니다.
“이 서방은 설희의 아버지라서 그런 말을 하는 것 같은데 이무기는 자신에게 복종하는 자에겐 하염없이 은혜를 베푸는 분이란 걸 왜 모르시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스님이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열었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이처럼 분분하니 쉽지는 않을 것 같소만 이무기를 처치하고 마을과 나라를 구할 방법이 있긴 있소이다.”
마을 사람들은 스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기에 오기 전에 설희라는 낭자로부터 이미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 이무기는 동해에서 시작해 여기까지 오면서 온갖 악행을 저지른 포악한 놈입니다. 이놈이 지나온 마을에는 온갖 질병이 난무했고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여기까지 말을 하곤 스님은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말을 꺼냈습니다.
“관군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오. 오늘 당장 산에 올라가 호수가 뜨거워질 때까지 불에 데운 돌을 던진다면 이무기를 쫓아낼 수 있을 겁니다.”
스님의 말이 끝나자 또 왁자지껄해졌습니다. 촌장이 조용히 시켰습니다.
“이무기에게 불돌을 던지다가 우리가 오히려 당하면 어찌합니까? 이무기에겐 뱀 병사들이 많이 있다면서요?”
박 서방의 말에 다른 사람도 맞장구를 쳤습니다.
“이무기를 쫓아내거나 없애는 방법은 그것뿐이오. 마을 사람들이 합심하지 않고 이렇게 분산된다면 절대 이무기를 이길 수 없을 것이오. 그뿐만 아니라 설희낭자를 이무기에게 바치는 순간 이 마을은 불바다로 변해버릴 것이라는 것 잊지 마세요.”
오랫동안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촌장은 스님의 말에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승산이 있는 싸움이든 없는 싸움이든 어차피 이대로 가다간 마을 사람들이 이무기에게 몰살당할 것은 뻔한 일이었습니다. 그럴 바에야 싸우다 죽는 것이 떳떳할 거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싸웁시다. 이판사판입니다. 관군이 이 일에 나서주지도 않겠지만 스님 말씀대로 우리 스스로 합심하여 이무기가 사는 못이 뜨거워질 때까지 불돌을 집어넣으면 된다고 하니 그렇게 해봅시다.”
스님의 말에 이어 촌장까지 이무기와 싸우자고 하니 박 서방과 그를 동조하던 다른 사람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무당은 슬그머니 뒤로 빠졌습니다. 어서 이 사실을 이무기에게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이를 설희의 아버지 이 서방이 눈치를 챘습니다.
“무당을 잡아라!”
그제야 사람들은 무당이 이무기의 사람임을 눈치 채고 도망가는 것을 잡아 포박하였습니다.
“너무 서운하게 여기지 말게. 일이 끝날 때까지 잠시 창고에서 얌전히 기다려 주게.”
촌장은 잡혀 있는 무당에게 한마디 하고 그를 잡은 마을 사람에게 눈짓을 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저마다 삽을 하나씩 들고 촌장을 따라 동경산 꼭대기를 향해 몰려 올라갔습니다. 설희 역시 마을 사람들 속에 섞여 산을 올랐습니다. 그리 높지 않은 산이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모두 못가에 도착했습니다.
이무기는 마을 사람이 근처에 왔어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내일쯤 아내를 돌려받고 나면 모두 마을로 쳐들어갈 것이므로 모두 휴식을 취하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공격하리란 것은 추호도 생각할 수가 없는 일이기도 했으니까요.
사람들은 돌을 모아 불에 달구었습니다. 한 시간 넘게 엄청난 양의 불돌을 만들었습니다. 이제 촌장의 공격명령만 떨어지기를 기다렸습니다.
“자, 공격을 시작하면 절대 멈춰서는 안 되오. 우리가 목숨을 걸고 이무기를 쫓아냅시다.”
촌장은 앞에 서서 손을 올렸습니다.
“공격!”
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마을 사람들은 일제히 삽으로 불돌을 떠서 못에다 던져넣었습니다.
못에 떨어진 불돌들은 치이익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연못 가운데서 부글부글 물방울이 올라왔습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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