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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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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월 20일 네이버 영화 코너에 들어가면 <말모이>가 예매율 31.62%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연초의 집중적 이슈 때문에 상승세를 탔는지 모르나 여튼 개인적으로도 국문학도 출신으로 이런 영화가 1위에 오른 건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내가 아직 이 영화를 안 봤다는 게 목소리 작아지는 이유다. 이번 주 시간 내서 보긴 봐야겠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윤계상이 맡은 역 류정환의 실제 인물은 이극로라고 한다. 물론 영화이기에 이극로 실제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지 않는다. 어쩌면 당시 한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총체적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침 건축사이자 LH상임감사인 허정도 박사의 책 <도시의 얼굴들>을 읽던 중이라 감회가 새롭다. '한글학자 이극로'를 읽으며 그의 열여덟 살 마산 생활이 어땠는지 더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듯하다.





이극로가 한글학자로 조선어사전을 만들다 일제에 걸려 고초를 겪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 하지만 그가 의령 사람으로 인생의 전환기가 되던 시절 마산서 보냈다는 사실은, 사실 몰랐다.


 박사의 책을 보면,  이극로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시기 2년을 마산에서 보낸 고루 이극로. 새벽마다 말죽을 끓였고 여관을 드나들며 인단을 팔았던 고학생 이극로. 갓 뚫린 비포장 북성로를 오갔고, 상남동 골목길을 내달렸고, 일에 지치면 교방천에 발을 담갔던 청년 이극로. 때때로 긴 숨을 몰아쉬며 노비산에 올라 마산만을 바라보며 꿈을 키운 물불 이극로. 마산은 그 위대한 생애의 첫 장소였다."


이극로가 마산에 도착한 것은 1910년 5월 중순. 나라가 망한 해의 봄이었다고 한다. 그해 2월 서울로 가려다 맏형에게 붙잡혀 되돌아 왔고 3개월 지난 5월 60리 마산행은 성공한다. 마산 도착 다음날 길게 땋은 머리를 싹뚝 자르고 창신학교에 들어간다. 맡형 상로가 데리러 왔으나 머리 깎은 극로를 보고 데려가지 못한다.




그때 마산 인구가 1만 7000여 명이었는데 세상에 일본인이 6000여 명이었다니, 당시 마산은 일본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일본사람들이 살던 곳을 신마산, 원래 마산 사람이 살던 곳을 구마산이라고 했는데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이 흔히 쓰였다. 하긴 요새도 연세 지긋한 사람들은 신마산이니 구마산이니 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극로가 들어간 창신학교는 마산포교회(지금의 문창교회)가 세운 학교였다. 1906년 동서숙(공부방)으로 시작했다가 1908년 창신이라는 이름으로 개교. 초대 교장은 마산포교회 앤드류 애덤슨(한국명 손안로)이 맡았다.




학교의 북동쪽은 노비산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제비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산 이은상의 호가 이 산에서 비롯되었단다. 이극로도 이 인근에 살면서 노비산을 수시로 오르내렸다고 한다. 교방천이 북성로와 만나는 지점 인근에 이은상의 집이 있었는데, 집 옆에 공동우물로 쓰는 용천수 샘물이 있어서 극로는 이곳에서 물을 길러 말죽을 끓이는 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북성로는 1908년 뚫린 신작로였다. 그때 이 공동우물도 도로가 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우물이 어찌된 일인지 '은상이 샘'이라 하면서 이은상과 관련 지어 인근 자투리 터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역사 고증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책에선 남겨놓았다. 워낙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라 다른 기록도 많은데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보면 실제로 교방천의 옛이름이 운상천이었고 사람들은 이 하천을 운상이내라 불렀다. 게다가 이 샘을 은새미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단다. 이은상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이 샘은 은새미였다. 그 은새미를 이은상 샘이라고 갖다붙이다니...




여튼 이극로는 마산서 이은상의 아버지 한의원 이승규의 신세를 지기도 했나 보다. 그의 집에 기거했으니. 이승규는 극로보다 10살 적은 은상에게 극로와 비교하며 야단을 많이 쳤다고 한다. 극로 본 좀 받아라. 뭐 그런. 극로나 은상이 안확에게서 공부를 했다. 창신학교 강사로 온 안확은 수업하기 전 "대한제국 만세! 너희는 대학제국의 국민이다"하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이 증언은 이은상의 회고에 나온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시립추산어린이집 앞에 있던 추산정도 역사가 있는 장소였단다. 이곳에서 1914년 창신학교 개교 기념 집회가 열렸는데 마산 최초의 시국강연회였다고. 또 마산의 3.1운동도 이 추산정에서 시작했단다. 물론 이런 일들은 극로가 마산을 떠난 후에 일어났다.


극로는  교방천과 회원천이 만나는 지점 안쪽에 살았다고 한다. 위성 지도를 보니 일반주택들이 가지런히 모여있다. 창신학교에서 2년을 보낸 극로는 중국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 구마산 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12년 4월.




극로는 서간도로 갔고 상해동제대학을 나와 독일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 조선어 강좌를 개설해 강의하기도 했다고. 파리대학에서 음성학을 공부하고 미국과 일본을 거쳐 1929년 귀국, 조선어사전 편찬을 주도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에 터졌다. 극로는 함흥재판소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추적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해 사람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고.


광복 후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했고 백범과 함께 평양에 갔다가 북에 머물면서 고위 공직까지 지냈다고 한다. 1988년 해금 이후 남쪽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재조명됐다. 그의 호는 '고루'다. 골고루. 평등의 순우리말 아닌가. 그의 호가 마음에 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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