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하균의 오동동야화]이광래의 출세작 '촌선생'
세 번째 쓴 희곡이 극예술연구회 10주년 공연으로 오른 데다 신춘문예 당선까지 되었다는 것은 정말 부러운 일이다.
출세작이 된 <촌선생>
이광래는 앞에서 말한 극연(극예술연구회)과 더불어 조선연극협회에 가입될 뿐만 아니라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촌선생>이 수석으로 당선됨으로써 작가로서의 위치를 굳히게 된다.
<촌선생>은 광래로서는 세번째 작품으로 그 전의 두 편 <어막의 일야> <지는해>는 습작기 작품이었던데 비해 <촌선생>은 극연의 제10회 공연작으로 상연되어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이제 그의 출세작인 <촌선생>의 스토리를 잠깐 소개해보기로 한다.
송해운이라는 촌선생은 강렬한 향토애를 가진 사람으로, 사재를 털어 야학교를 설립하여 직접 경영하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달훈 달근이라는 두 아들이 있었다. 달훈은 서울에서 현대교육을 받고 도회지의 여성과 결혼하여 귀향한다. 당시의 인텔리 청년답게 벅찬 꿈을 안고 농촌을 부흥시키려고 내려온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농촌의 너무나 비참한 현실에 부닥쳐 환멸과 실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달훈과 이상을 같이하여 결혼하게 되고 시골농촌에까지 내려온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둘째 아들 달근은 무식하지만 농촌에서 처참한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보아왔으므로 농촌의 현실에 대하여 착오을 일으키지 않을 정도의 지혜를 갖추고 있었다. 모든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고민하는 그들에게 가을이 되자 달훈이 결혼비용으로 진 빚 때문에 단 하나의 농촌사업 거점이었던 야학교 교실마저 양도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다.
촌선생은 엄숙하게 달훈에게 "물러가거라. 그래서 네가 배운 학문을 모름지기 어따써야 할 것인가 깊이 생각해 보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촌선생은 둘째 아들 달근과 함께 농촌의 재건을 굳게 다짐한다.
촌선생 송해운의 강렬한 향토애는 당시(1935년께)의 상황에서는 나라 사랑의 은유적 표현이고 농촌의 재건은 나라의 광복을 찾기 위한 한 방편임을 쉬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은 1936년 4월 10일부터 14일까지 새로 지은 부민관(세종문화회관의 일부가 되어 있음. 6.25직전에는 국립극장 자리)에서 이서향의 <어머니(1막)>와 함께 유치진 연출로 극연 제10회 공연으로 상연되었다.
출연진은 허남실(무대감독을 겸하고 있었다. 당시는 연기진이 제작을 겸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웅, 이의춘, 김영옥, 김갑순 등 당대의 톱스타들이었다.
부민관은 객석이 2000석이나 되는데다 무대도 넓고 좋아 극연 1기때 주로 공연하던 공회당의 좁은 연단 위에서 연기하느라 북새를 떨던 때와는 비길 바가 아니었다.
거기에다 관객이 5800명이나 동원되어 당시로서는 대성황이었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중앙지에 보도된 극평은 작품의 주제성을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연출가 유치진도 재평가하여 극찬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4월 10일 개막 첫날 첫 무대에서 잊지못할 일화가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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