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진4 [한하균 오동동야화30]서울서 유치진·홍해성과 인연 닿은 정진업 정진업이 서울로 연극 공부를 하러 가서 만난 사람이 유치진과 홍해성이라고 한다. 물론 이광래가 내쳤더라면 그마저도 불가능했을 인연이었겠지만, 어쩌면 번역 일을 하면서 '극예술연구회'가 주최한 강습회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만 해도 여간 다행한 일은 아니었겠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을 들여다 보면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만큼 중요한 일도 없겠다 싶다. 월초가 서울에 갔을 때의 광래는 극작가로서보다도 오히려 문화부 베테랑 기자로 더욱 명성이 높았을 때였다. 광래는 연극을 배우겠다고 찾아온 고향 후배를 매몰차게 되돌려 보낼 수는 없고 여러 가지 궁리를 하다가 우선 검열대본 번역일을 맡겨 보기로 했다. 당시는 우리나라 말로 연극을 할 수 있을 때였는데(왜정 말기에는 일본말로 대사를 주고 받아야 했으니까) 우리 나.. 2017. 7. 20. [한하균 오동동야화17]국립극장 차지에 발휘된 이광래의 수완 앞서 16화에서 이광래가 이끌던 '극예술협회'가 있었지만 새로 '신극협의회'를 만들어 유치진이 대표를 맡게 하고 자신은 간사장 역할을 맡았다는 얘기를 했다. 그 이유를 17화에서 풀어놓는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얽혀 있다.그 실타래를 풀어가보기로 하자. 광복 직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조선공산주의 예술가 동맹의 약칭) 산하의 '연극동맹'이 온 연극계를 붉은 깃발로 물들이고 있을 때 유일무이하게 이에 대항하고 나선 단체(극단)가 민예요, 그러기에 그 민예가 고군분투하고 있었다함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런데 무대예술원 창립과 함께 그야말로 자의반 타의반 혹은 순전히 타의로 일본제국의 문화정책에 강제로 끌려나가 친일연극을 했던 사람들도 깊은 잠에서 깨어나 하나로 뭉치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38.. 2017. 7. 6. [한하균 오동동야화16]1948년 극협-신협 바뀌는 과정의 이광래 온재를 두고 한하균 선생은 높은 존경심이 있나 보다. 경연하는 학생들이 온재의 작품을 선정해 공연준비를 하자 다른 작가의 작품을 하도록 추천한 일이나 극예술협회를 구성원은 그대로 하면서 '신극협의회'로 변경할 때 대표를 유치진에게 양보한 일을 두고 '희생'했다고 표현했다. 그러면서 맨 마지막엔 "이렇게 해야만 극단 신협이 국립극장에서 자주 공연할 수 있을 테니"하면서 덧붙였다. 말하자면 계산된 작전이란 얘기다. 황무지에도 봄은 오는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 악명 높은 미군정 193호는 소멸되고 연극예술의 씨앗은 돋아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국 연극학회의 탄생과 함께 연극경연대회의 개최였다. 1949년 6월 금천대회관(전시경찰국자리) 3층에 사무실을 두고 고고의 성을 울린 한.. 2017. 7. 4. [한하균의 오동동야화]마산의 신극운동 앞 순서의 글에서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 후의 여러 단체들이 순회공연을 했다고 했다.(표참조) 표(동아일보에서 추출하여 뽑은 것)를 참고로 살펴보면, 첫째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공연하였다는 것, 둘째 고학생 돕기 운동이 태반이었다는 것, 셋째 일본제국에 대한 문화적 대항 내지는 민중계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소나기가 갑자기 퍼붓듯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위장된 문화정책의 영향에 따라 1920년대 초반(21~23년) 몇 차례 공연이 있은 뒤 일제의 마각이 드러나면서 다시금 휴면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1년에 접어들어 마산의 휴학생들과 지식청년이 힘을 합하여 극단을 창단하기로 하고 공연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발기인은 목발 사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김형윤(경남신문 전신인 마산일.. 2017. 6. 15. 이전 1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