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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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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작가에게서 동시에 두 가지 취향을 느끼는 일은 드물다. 대개 시기적으로 조금씩 변해가는 흐름은 누구에게든 종종 발견되는 스타일이긴 한데 어쩌면 좀 상반된 성향을 보이는 작품을 동시에 내놓는 사례는 그리 흔하지 않다.


오늘까지 밀양 아리랑아트센터 전시실에서 작품전을 하고 있는 안영숙 작가가 그런 사례다. 전시실을 딱 반 나눠서 한쪽은 붉은 색 계통의 추상, 혹은 반추상 작품이 차지했고 다른 한 쪽엔 초록의 풍경화가 자리잡았다.


"무지개가 그렇게

항상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빛과 색이

언제라도 설레게 하는

힘이었습니다.


무언가에 이끌려 나오는

마음이...

오늘도 기쁨입니다."


그가 쓴 이 짧은 시는 그의 그림에 대한 인식을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것 같다.


한국예총 박장길 밀양지회장은 그이 작품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그의 작품들은 대다수 회화의 기본에서 변화하는 구상이 점점 추상으로 바뀌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작업들이다. 때로는 정물화의 모든 형태들이 파편처럼 분리되며 오히려 그것이 아름다운 노래처럼 들려주기도 한다. 철저한 구상에서 시작하여 형태가 서서히 조형적 양식화된 단순화로 변용하는 과정이 지나면 완전 형태가 사라져 색채만 남는, 마치 칸딘스키의 작품마저 느끼게 한다. 칸단스키가 말하였듯이 어쩌면 색채 만이 유일한 회화의 본성이라는 말이 떠오르기도 한다."











감상 잘 했다. 그림을 보면서 작가의 여유를 느낄 수 있었다. 빈 것에 대한 배려도 느꼈다. 여유가 있는 작가는 정신적 레벨이 높다는 것도 발견할 수 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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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일부터 17일까지 밀양아리랑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서 펼쳐졌던 제21회 경남청소년연극제가 합천 원경고등학교의 작품 '우리읍내'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오후 6시 시상식이 거행됐다. 이번 연극제에선 합천의 원경고가 단체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로써 원경고는 오는 7월 29일부터 8월 7일까지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리는 전국청소년연극제에 진출하게 됐다.


배우들의 고른 기량과 대사 처리의 앙상블이 높은 점수를 받지 않았나 싶다. 물론 작품성이 높은 손톤 와일더의 희곡 '우리읍내' 효과도 보았을 것이다. 'OUR TOWN'은 1938년 작으로 퓰리처상을 받은 희곡이다. 원작 러닝타임 2시간이 넘는 작품을 1시간으로 압축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스토리 진행도 좋았다.


단체 우수상은 '꿈을 꾸다, 꿈을 쓰다'를 공연한 김해 삼방고와 '무, 소금에 찍어 먹다'를 공연한 밀양 영화고가 받았다. 삼방고는 이번 연극제에서 최우수연기상과 희곡상까지 거머쥐었다. 단체 장려상은 '남매' 거제고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마산 무학여고 , '방과후 앨리스' 통영 동원고가 각각 수상했다.


학생들에게 돌아간 영광은 자연히 지도교사에게도 전달됐다. 최우수지도교사 상은 원경고 황소연 교사에게 돌아갔고 우수지도교사상은 삼방고 이여진 교사가 받았다.


앞서 언급했듯이 최우수연기상과 희곡상은 삼방고 김민정 학생이 받았고 우수연기상은 밀양 영화고 성우진, 거제고 최영은, 통영 동원고 김광수, 삼방고 안재형, 마산 무학여고 김정민, 원경고 전민정이 각각 수상했다.


심사위원장을 맡은 이상철 배우는 "최근 연극은 그 지역의 말을 많이 쓰는 게 추세"라면서 "청소년 연극에서도 지역의 말로 지역의 특성을 담아 표현해야 경쟁력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번 경남청소년연극제는 '청소년들의 포동포동한 끼로 도도하고 당당한 세상을 만들자'는 캐치프레이즈로 진행됐다. 


합천 원경고의 '우리 읍내' 공연 모습.


합천 원경고 '우리읍내'.


희곡상과 최우수연기상을 받은 김해 삼방고 김민정 학생이 시상을 맡은 경남도교육청 체육건강과 한지균 과장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최우수 지도교사상을 받은 합천 원경고 황소연 교사가 시상을 맡은 경남도 문화예술과 하종덕 사무관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단체 최우수상이 발표되는 순간.


단체 최우수상엔 합천 원경고. '우리읍내'에서 연출과 에밀리 역을 맡은 전민정 학생이 하종덕 사무관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단체 기념촬영.


행사가 끝난 뒤 아리랑아트센터 밖에선 단체 최우수상을 받은 합천 원경고 연극팀 학생들이 연기지도를 맡았던 문종근 객석과 무대 대표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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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 순서의 글에서 마산에 신극이 태동하던 1920년대 후의 여러 단체들이 순회공연을 했다고 했다.(표참조)


표(동아일보에서 추출하여 뽑은 것)를 참고로 살펴보면, 첫째 여름방학을 맞이하여 공연하였다는 것, 둘째 고학생 돕기 운동이 태반이었다는 것, 셋째 일본제국에 대한 문화적 대항 내지는 민중계몽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소나기가 갑자기 퍼붓듯 3·1운동 직후 조선총독부의 위장된 문화정책의 영향에 따라 1920년대 초반(21~23년) 몇 차례 공연이 있은 뒤 일제의 마각이 드러나면서 다시금 휴면기에 들어갔다.


그리하여 1931년에 접어들어 마산의 휴학생들과 지식청년이 힘을 합하여 극단을 창단하기로 하고 공연 준비에 착수한 것이다. 발기인은 목발 사장으로 너무나 유명한 김형윤(경남신문 전신인 마산일보 발행인)씨, 김종신(전 마산시장 및 국회의원)씨, 이우식(의령의 부호로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투옥되기도 함, 안호상 이극로 등의 독일유학을 거의 도맡다시피함, 물론 이번 일에도 재정 원조가 컸다고 함)씨, 그리고 이광래 이일래 형제가 그 중심인물이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 할까. 레퍼토리를 이광래 작 <어막의 일야>로 정하고 일주일간 책읽기 연습에 들어갔을 때였다고 한다.


당시 마산경찰서 고등계(주로 사상문제를 다루는 부서) 형사인 일본인 고다마가 연습장에 나타나 자꾸만 쓰잘데없는 시비를 거는 것이었다. 이에 키는 작지만 성격이 불같고 단단한 체구인 이광래와 언쟁을 하다가 육박전 직전까지 가는 사태로 악화되었다.


여기에 앙심을 품은 고다마 형사가 광래의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다카다노마바 사건'을 들추어내어 조사할 게 있다는 명목으로 구류를 시켜버린 것이다. 이로써 마산의 신극운동은 첫 출발부터 시련과 난관에 부딪혀 좌절하고 만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32년 7월에 '극예사'라는 단체를 김여찬 이훈산 등의 발기로 창립하고, 연출부에 천전막, 무대부에 윤종환, 음악부에 박성옥, 집행부에 김무산 등이 가담하였다는 기사가 당시 동아일보에 보이지만 공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일본 유학을 팽개치고 귀국한 이광래는 상경하여 서울에서 집안의 아저씨 뻘이요, 어린 시절 막역한 친구 길상의 형이요, 또한 친형 일해의 죽마고우인 노산 이은상(당시 조선일보 학예부장이었다)의 도움을 받아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기자로 근무하면서 연극에의 꿈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 무렵 광래의 관심을 끈 것은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의 활동이었다. 극연은 극영동호회를 모체로 하여 1931년 7월 8일에 발족한 신극단체다. 창립 동인은 김진섭 이헌구 서항석 유치진 등 해외문학파와 일본축지소극장(일본신극의 요람무대)에 연극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홍해성 등이었다.


각 신문상에 발표된 이들의 창립취지를 보면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로의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이 신극을 수립하려는 목적'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진정한 의미의 우리 신극 수립에 감동해 극연에 참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1935년은 실로 이광래의 연극 인생에 있어 기념할 만한 한해가 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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