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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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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후 연극 바닥도 이념대결이 치열했던 모양이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땅 때문에 이념 갈등이 생기고 급기야 분단까지 이어진 것을 아닐까 싶다. 이념이야 타협할 수 없는 것이겠지만 제도는 얼마든지 합의점을 찾을 수 있을 텐데... 조선민족 성정이 얼마나 도아니면 모인지 반추해 볼 수 있기도 하낟. 암튼 그러한 상황에서 이광래는 남연 공연에서 땅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주장하는 남로당 조직의 요구에 역제안은 한다는데... 



극단 '민예'가 문을 닫던 그 해 그 달에 그러니까 1947년 11월에 이광래는 유치진·이서구와 함께 한국무대예술원을 조직한다. 이듬해인 1948년 이른 봄에는 우익진영의 많은 극단과 연극인들을 총망라하여 '극예술협회'라는 이름으로 UN한국위원단 환영 특별공연을 시공관에서 갖게 된다. 아울러 4월 한달간에 걸쳐 무대예술원 산하 21개 단체로 문화계몽대를 조직하여 남한 각지 촌촌면면을 찾아다니면서 이른바 연극의 '브나로드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그때 동원된 관객수는 연 150만을 넘었다고 하니 남한 인구 2800만을 고려하면 실로 경이적인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이로써 한때나마 전 연극계를 장악하는 듯하던 좌익세력을 누르고 국민 정서 함양에 다대한(큰) 성과를 올리게 되었다. 이때 한국 무대예술원 예술극장으로서 이 모든 행사를 진두 지휘한 이광래는 훗날 대한민국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하지만 수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중 하나를 소개하겠다.


전북 남원에서 공연 때였다. 반세기도 훨씬 더 지난 옛날 일이라 공연 작품명을 잊었지만 지주나 소작농과의 갈등 대목에서 5:5제냐 4:6제냐를 놓고 시비하는 대사가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잠시 그 당시의 사회상을 설명하고 이야기를 진전시키도록 하자.


광복 전 일제강점기 때에는 거의 전부가 3:7제였다. 다시 말해서 3할은 소작인이 가지고 7할은 지주가 차지하는 가렴주구식 제도였다. 그런데 광복이 되자 5:5제가 아니면, 양식있는 지주는 4:6제도를 택하고 있었는데 급진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주로 공산주의자)은 7:3제를 주장하고 있엇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완전히 거꾸로 바뀐 것이다. 그보다 더한 극렬분자들은 땅을 무상 몰수하여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표현에서 다소 내가 사용하는 용어와 차이가 있음. 인식의 차이)


첫째 날 공연은 탈없이 넘어갔는데 이튿날 공연 때부터 남로당 남원군당(당시는 군인이었음) 조직원들이 몰려와 강력하게 항의하면서 작품의 대사를 고치라는 것이다. "무상 몰수하여 무상 분배하다. 만약 이렇게 대사를 바꾸지 않으면 막을 올릴 수 없다. 실력으로 저지하겠다."고…. 이에 광래는 기발한 제안을 내놓는다.


광래는 "지금 관객이 입장하고 있으니 웬만큼 관객의 입장이 끝나면 관객에게 물어보고 결정하는 것이 어떠냐"라고 말한 것이다. 물론 그 당시도 미군정의 경찰이 없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미온적인 경찰의 미지근한 태도가 잘못되면 영영 공연을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에서 이렇게 대담한(?) 제안을 한 것이다. 여기에서 광래 일생일대의 명연설(?)이 탄생한다. 광래는 관객들에게 사자후를 토했다.


"나도 경상도 바닷가의 마도로스의 아들입니다." 연설의 시작과 함께 남로당원인 듯한 사람의 야유가 터져나왔다.


"마도로스가 뭐여? 그것부터 설명허랑께." 

"마도로스는 선주에게 노임을 착취당하는 뱃사람입니다."

장내가 조용해지자 광래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


14화는 이렇게 끝나구나. 잔뜩 기대하고 기다리는 순간에 중간광고가 나오는 기분이랄까... ^^ 어쨌든 어떤 명연설인지는 다음 화에서 확인해봐야 쓰겄어. ㅋㅋ.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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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연극의 선구자들이랄 수 있는 이광래, 김수돈, 정진업 이런 사람들이 극단 민예 활동 중 일어난 일화. 분위기를 보아하니 한번씩 거짓말로 상대를 골려주고 했을 것 같다.




이광래·김수돈·정진업에 얽힌 일화다. 8·15광복의 기쁨이 미처 가시기도 전인 1945년 세모가 가까운 어느날 충남 강경에서의 일이었다고 한다.


그 당시 강경은 유동인구가 정주보다 훨씬 많은, 그래서 상품거래가 많았던 곳이어서 권번(기생이 대기하면서 요리점에서 부르면 주변에 나가기 위하여 여러 가지 예절과 춤과 노래를 교습받던 곳)도 있었다. 그만큼 경제적으로 윤택했다.


강경에서의 공연은 그야말로 입추의 여지도 없는 초만원을 이운 가운데 무사히 끝났다. 막이 내린 뒤 분장실로 돌아가 보니, 월초 정진업에게는 그곳의 권번에서 정중히 초대한다는 전갈이 와 있었다. 사실 크레이그가 말한 대로 '연극은 연출의 예술'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연극에서의 연출의 위치는 거의 절대적인 존대다. 그러나 관객의 입장에서 보면 연출 따위야 아랑곳없고 주연 남우나 주연 여우에게만 관심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월초에게만 초대가 있었던 것이다.


월초는 연출가 이전에 고향의 선배요, 친구인 온재와 화인에게는 살며시 행방을 알리고 초대에 응했다. 월초를 홀로(?) 보내놓고 온재 선생을 모시고 대폿집에서 쓸쓸히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화인은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찮았다. 그래서 화인은 온재 선생을 모시고 월초가 초대받은 요정으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진업, 진업(화인은 언제나 월초를 그렇게 불렀다) 어디 있는가?" 몇 번을 불렀다고 한다. 월초는 꽃으로 둘러싸인 이 화원에 잡인(?)이 섞이는 것을 꺼려 못들은 첫하다가 하도 다급한 부름에 방문을 열고 내다 보니 "큰일 났네. 자네 부인이 위중하다는 기별이 왔네. 어서 가 볼 차비를 하게"라고 근심어린 표정으로 화인이 말하지 않는가.


그렇잖아도 병약한 신부를 고향에 두고 온 월초로서는 남모르게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 무슨 청천벽력인가. 우직하리만큼 고지식하고 순수한 매혹적인 목소리의 주인공에다 헌칠한 키의 미남 배우인 월초의 눈망울에 눈물이 핑 번지는 것을 본 기녀들도 덩달아 입이 삐죽삐죽해지자 미리 화인과 약속이 되어 있던 온재도 한마디 거드는 것이었다. 


"오늘 저녁은 이미 늦었으니 내일 아침 고향에 다녀오게. 자네가 맡은 역은 내가 대신 함세..." 라고 말하자 월초는 황송해 하면서 굽신굽신하는 것이었다. 기녀들이 보아하니 '호랑이보다 무서운 곶감'이 있다더니 그렇게 선망하고 존경하고 사모하던(?) 주연 배우를 명령하고 타이르는 연출 선생(두 사람 다 체구는 작았지만)의 존재에 새삼스레 경탄과 존경의 뜻을 나타내면서 술잔을 권하는 것이었다.


새벽녘이 이슥해서야 숙소(여관)로 돌아온 뒤 그간의 경위를 알게 된 월초가 화인을 때려죽인다고 또 한번의 희극(?)이 연출되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어쨌거나 곡절 많은 해방 직후에 극단 '민예'는 제 목소리를 꾸준히 외치다가 전술한 바와 같이 프락치 사건 때문에 1947년 11월에 문을 닫고 말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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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예전엔 지금보다 전국 순회공연 다니는 것이 훨씬 더했다. 악극단이 순회공연을 펼쳤듯이. 지금이야 서커스란 게 거의 형태를 감췄지만 20세기 초만 하더라도 서커스가 열리는 지역에는 동네가 시끌벅적했단다. 1960년대에 태어난 나도 그런 서커스 공연을 들어가서 보진 못했지만 밖에서 얼쩡거렸던 기억이 있다. 다만 한 번도 연극을 그렇게 순회공연하는 것은 본 적이 없다. 음...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만해도 연극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2 때 교회에서 친구들이 연극을 해보자며 내게 어쩌면 일방적으로 맡겨버리는 바람에 대본 쓰고 연출을 하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내가 숫기가 없고 연기력이 딸리니까 배우 하지말고 연출을 맡겼을 수도 있겠다.


또 샜다. 지금에야 보고싶은 연극이 있으면 일부러 찾아가서 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지역의 문화 수요자를 위해 많은 극단이 지역 또는 전국을 돌며 공연을 펼치고 있다. 이게 한때는 부정적인 측면이 많이 드러나긴 했는데.. 이젠 지역의 극단들 수준이 많이 향상되었기 때문에 선의의 경쟁 차원에서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광복 즈음, 이광래가 이끌던 '민예'는 어떻게 전국 순회공연을 다녔을까. 오늘 이야기는 한하균 오동동야화 12번째 이야기를 베껴 써본다.



극단 '민예'는 민족정기를 바타응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두말할 필요도 없이 반탁운동의 기치를 높이 흔들면서 1945년 10월에 조직되었다.


신재현, 맹만식, 송재로, 박상익, 남궁연, 김득순(김감순은 오류), 유해초 등이 창립멤버로 참여했다. 단장은 물론 이광래였다. 사무실은 종로 베카리 음식점 2층에 두고 1947년 늦가을까지 서울을 중심으로 남한의 각 지역을 순회 공연하다가 조선 연극 동맹(좌익)의 프락치 사건으로 분열이 생겨 해산하기에 이른다. 프락치 사건의 개요는 이렇다.


KAPF파의 효장 임화(시인 소설가)의 처가가 마산이다. 마산 이상조의 여동생 숙희가 그의 처다. 그녀는 훗날 지하련이란 예명으로 소설가로 문단에 데뷔하는데, 폐병으로 가포 결핵요양원에 와서 치료를 받고 있던 임화와 알게 되어 둘이 연애결혼하게 된 것이다.


이 임화가 해방이 되자 좌익 예술인의 핵심 멤버로 설치고 다녔는데 극단 '민예'만이 그들의 노선과 달리하고 있어 눈엣가시처럼 고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그 '민예의 대표인 이광래가 처가의 먼 친척뻘이 되는 것을 알고, 처가를 매개로 하여 협박도 해보고 달래기도 해 보았으나 이광래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극단 '민예'에 프락치(그 사람은 지금도 생존해 있으므로 성명을 밝히지 않겠다, 2000년 기준)를 넣어 정보를 빼냈을 뿐 아니라 와해공작을 시도한 것이다. 그 당시 돈으로 쌀 한가마 12원 할 때 공작금이 400원 가까이 소요되었다니 얼마나 공작이 치열했나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민예가 창단되던 무렵에는 마산과는 여러 가지로 겹친 인연이 있었다. 일제 말기의 황금자 시절에 월초 정진업이 중견배우로 활약하였다 함은 이미 전술한 바 있다. 그는 영양실조 끝에 조막염에 걸려 오래도록 병상에서 치료하다가 해방의 감격과 함께 서울로 가서 민예에 입단, 주연 배우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한몸에 받게 된다.


곧 뒤따라 서울로 간 화인 김수돈은 연출부에 배속되어 이광래의 훈도 아래 조연출로 맹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마산 사람 셋이 중심이 된 극단 '민예'는 전국을 누비고 다니면서 순회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무렵 상연된 대표적인 작품은 김동인 작 이광래 연출의 <젊은 그들>을 비롯해 김형활 각색 이광래 연출의 <카츄샤>, 이광래 작 연출 <청춘의 애정>, 이광래 작 연출 <박쥐의 집> <독립군> <백일홍 피는 집> <최후의 밤> <어머니의 모습> <청춘의 정열> <청춘산맥> 등으로 수많은 작품을 밤마다 바꿔가며 공연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합포성을 대표할 만한(?) 이 세 분의 예술인들이 한솥밥을 먹기는 필자가 알기로, 극단 '민예' 생활이 최초요, 최후가 아니었나 싶다.


연극과 문학과 술을 좋아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성격은 너무나 판이하기 때문에 가지가지 이야기가 없을 수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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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지하련의 이름이 '숙희'로만 나오는데 숙희는 아명이고 본명은 이현욱이다. 그의 셋째 오빠 이상조에 대해선 자세한 내용이 나오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 단지 임화와 일찍 알고 지냈고 전향 문제로 투옥되었다는 사실 정도. 지하련이 살던 산호리 집은 지금도 용마고 뒤편에 있는데...지난해 말인가 불이 났다고... 헐리기 전에 찾아봐야지 하면서도 아직 찾아가보지 않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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