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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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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 마지막회.36회로 끝났다. 건강상의 이유였다. 온재 이광래와 월초 정진업. 정진업의 이야기는 아직 남은 듯도 한데... 한현주가 서울에서 어떻게 배우로 성공하는지 궁금했는데... 혹시나 해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봤는데...자료가 나와 있지 않다. 월초의 향후 약력을 보면 주로 마산서 활동을 했는데.. 서울 간 한현주는 다시 마산으로 돌아왔을까?

그것도 그러려니와 월초 다음 차례가 화인 김수돈 이야기인데... 제법 재미있는 일화가 있을 법한데 더 접하지 못하는 게 아쉽다.




현주의 정체를 알게 되자 '통영협성학원'의 재단에서 들고 일어난 것이다. 특히 염진사(구한말 과거에 진사로 합격한 통영의 대원로)를 비롯한 유림의 분노는 대단한 것이었다.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무배(巫辈)들이나 하는 연극을 한다는 것도 마땅치 않았는데 거기다 화류계 여자와 동거하면서 그 여자와 함께 연극을 하겠다니 될 법이나 한 말이냐? 안되고 말고!" 이러한 유림들의 거센 반대에 부딪힌 문화계 인사들, 그 중에서도 김용주, 김용기 형제를 비롯하여 박재성, 장하보, 유지환 등 이른바 양반의 집 자제들이 앞장서 간청을 한 것이다.


이에 중년층을 대표한 김채호(초대 통영읍장 김용식, 외무장관의 선친)와 청년층으로서는 노인네들의 신망이 두터웠던 이정규(초대 민선통영시장) 등이 나서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설득하려 했지만 유림들은 미동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광복이 된 뒤에야 알려진 이야기지만 '일본어 연극'이라는데 유림들의 반감이 더 컸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연극도 수포로 돌아가고 월초도 통영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그간의 사정을 좀 더 자세히 들어보기로 하자.


"나는 어느덧 탕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 시대의 이단자가 되어 있었다. 문학과 연극을 하는 선후배들이야 한자라에 모여 리허설도 하고 때로는 술시중을 들게 하면 같이 놀 수 있는 처지였지만 학원 운영자측, 특히 나이 많은 유림층에서는 막무가내였다. 아이들에게 영향이 미칠 것이니 추방해야 된다는 일부 주장이 우세하여 나는 일년을 채우지 못하고 그 학원에서 쫓겨 나오고 말았다."('세정무정'에서)


그리하여 풍광명미한 한국의 나폴리 통영을 떠나면서 몇 가지 계획을 세웠다. 첫째는 현주를 먼저 서울로 가게 하는 것이었다. 밤새도록 타이르고 구슬렀지만 여자 특유의 민감한 신경으로 현주는 다시는 버림받지 않기 위하여 몇 번이고 울면서 다짐을 받는 것이었다. "배신을 하는 날에는 당신도 죽이고 나도 죽을 것이라고..."


2~3일 후 현주를 서울로 보내고 허약해진 몸을 다스리기 위하여 두 번째로 마산의 부모 곁으로 돌아가 약을 먹기로 한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니 지금의 KBS 정동에 있었던 제2방송국 아동극 원고 모집에 당선되었다는 통지서가 와 있었다. 만신창이가 되어 있는 월초의 마음에 한줄기 광명의 빛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상금도 탈 겸 몸이 수습되는 대로 서울로 떠날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그리하여 '연극의 바다'에 뛰어 들리라고 다짐하고 다시 서울로 갔던 것이다.


※작가의 건강사정으로 시리즈를 이번회로 마감합니다. 차후에 기회가 되면 다시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그동안 아껴주신 독자 여러분의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세워진 정진업의 '갈대' 시비


갈대


모래밭에 묻어 놓은

물새의 노래는

영영 몰라도 좋은 것이 있었다


바람이 일면

바람 같은 심사

사색을 쫓고


스스로 시익시익

그이의 모기치마 여미는 소리로

울어야 하였다


지금은 열다섯 소녀 하나

울면서 항구로 간다고

사공의 넋두리에

열이 오르는데


낙동강은 돌아선 채

태고 그대로인 바다로 가는 것을

그는 잠자코 보고 있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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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초가 앞 번 이야기에선 기약 없이 슬그머니 현주를 떠난 듯하더니 현주가 통영으로 찾아오니 정식 결혼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부산일보에 술회한 이야기가 나온다. 느닷없고 뜬금없어서 고개가 갸우뚱해졌다. 한하균 선생이 이야기를 너무 심하게 축약하다 보니 그 두 사건의 가운데 들어가야 할 플롯을 건너 뛰어버리신 겐가. 그럼에도 찾아온 현주를 두고 생각하는 것이 탐탁지는 않다. 좀 귀찮게 여기는 듯도 해서다. 불원천리 택시를 타고 달려온 정인을 만났는데 얼싸안고 춤은 못 출망정 사람을 앞에 두고 자신에게 떨어질 이익과 불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태도라니.


어쨌든 지지난 이야기에서 예감했듯 현주와의 재회는 이렇게 전혀 극적이지 않게 이루어져 실망이다만 마침 여배우가 궁한 터에 절묘하게 짠하고 나타난 것은 드라마틱하다 하겠다. 그렇게 현주가 여배우의 길을 걷게 된다는 것이겠지. 마지막 한 회가 남았는데... 이야기는 아직 한참인 것 같다. 이야기가 어떻게 압축될 지 기대된다.




월초는 '사회'라는 바다에 발을 들여 놓은지 처음으로 생활에 안정을 얻었고, 선배 동료와 함께 좋아하는 연극 문학에 대한 의견을 끝없이 나눌 수 있는데다 술마저 함께 하게 되었으니, 금상첨화란 이를 두고  일컫는 말인듯 싶었다.


여기에 뜻밖에도(?) 현주가 나타난 것이다. 다시 월초 자신의 말을 되새겨 보자. 


"어느날 밤 청마 사형과 하보(응두) 사형 그리고 나 세 사람이 유명한 통영 오통잔(기금의 대포를 그때 그렇게들 말했다)을 몇 순배인가 기울이고 서로 헤어져서 거나한 기분으로 하숙집으로 돌아오니 문전에 택시가 서 있고 친구 K(강계호)가 차비를 치르고 있었다. 현관(그때 하숙집은 왜식으로 된 여인숙이었다) 긴 의자에는 현주가 핸드백을 들고 앉아 있다가 들어서는 나를 보고 용수철처럼 발딱 일어섰다. 나는 친구 K가 고맙기는 하였지만 한편 귀찮게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현주와의 관계를 비밀로 해두었다가 정식 결혼은 불가능하더라도 서울 쯤 가서 동거라도 할 계획과 약속이 그전에 이미 굳게 이루어져 있었다. 말하자면 그 준비 기간으로서 내가 학원에 와 있는 셈이었다. 그런데 K가 이렇게 외고펴고 자동차로 버젓이 모시고 왔으니, 그나마 나는 확고부동한 총각 접장으로 가족 상황에 기록되어 있었다."(부산일보의 '세정무정'에서)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이 딱한 사정을 전해들은 장하보 선생이 중재역(?)을 맡고 나선 것이다. 때마침 그 무렵 박재성 작으로 아카몬(일본 동경제국대학의 교문이 붉은 벽돌로 된 것이어서 붉은문=아카몬'이 동경대학의 교지 이름이 되었다)지에 발표되었던 '아키(가을)'라는 작품 외 공연 기획을 하고 있을 때였기에 이 작품의 여자 역할을 못 구해 애를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고쿠고 조오요오'라 하여 무대 위에서도 우리말로 된 연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고 또 무대 경험이 있는 여자 연기자 구하기가 하을의 별따기처럼 지난한 일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도 없었다. 여기에 현주가 안정맞춤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주는 연극에 출연할 초청 여배우로 둔갑한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은 예나 이제나 오래 못가는 법. 끝내는 들통이 나고 만 것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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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으로 간 월초로선, 당시는 자신이 어떤 인연이 맺어질지 상상도 못했겠지만 학원 선생을 맡았던 것이 얼마나 행운이었을지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월초가 있는 학원의 교장이 일본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났는대 대한 교장으로 온 사람이 청마 유치환이었던 것이다. 유치환과 파트너가 되었으니 그가 놀 물은 반은 정해져버린 것일 터이다. 물론 월초가 오늘날에 기록으로 남겨질 인물이기도 하지만 당대 그가 만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역시 문화활동은 노는 물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하겠다. 김용기, 전혁림, 윤이상, 유치환...




통영에 서린 추억의 첫째는 교장이던 김욱주 박사(동영제대 농학부 줄업, 초대 농림부 농지관리국장,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역임)의 따사로운 인격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그는 언제나 너그러우면서도 절도있는 생활 리듬을 깨뜨리지 않는 스포츠맨(동경제국대학 테니스 대표선수)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보다도 600평이 넘는 넓은 저택에 수천권이 넘는 장서를 즐비하게 갖춰놓고 독서하다 지치면 밖에 나가 운동하고, 운동하고 돌아오면 아내(진주 일신고녀-진주여고 출신)가 끓여온 차를 마시며,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는, 말하자면 그의 꿈같은 생활이 부럽다 못해 '현기증이 날 정도'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김 박사의 부친은 통영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판사 출신의 변호사요, 갑부였기 때문이다. 김 박사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둘째는 청마 유치환 사백(詞伯 학식이 높은 사람)과의 만남이다. 월초가 부임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때 앞에 말한 김 교장은 동경으로 공부를 더 하기 위해 떠나고 후임으로 청마가 부임한 것이다.


"그때까지 나는 연극과 산문을 공부하고 있었던 때라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서정시에서 특히 언어의 시성을 탐구하려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청마 사형의 시집(청마시초)을 모조리 읽고, 적잖은 감화를 받기도 하였다.(부산일보 '세정무정'에서)고 술회하고 있다.


셋째, 연극의 선배와 동료를 만나 견문을 넓히고 보다 높은 차원의 연기 공부를 하게된 것이다. 당시 통영에는 참으로 기라성 같은 대 배우와 연출자가 많이 있었다. 


박정섭(나운규의 아리랑과 벙어리 삼룡이 등의 영화에 성격배우로 활약함), 서성탄(일본 축지소극장 출신의 연극인, 동랑 유치진과의 인연으로 통영에 정착함), 김용기(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연출자, 이해랑·김동원 등과 동인), 김아부(후기 토월회 출신의 연기자), 최배송(동양극장 출신의 연기자) 그리고 극작가 박재성 등이 거의 날마다 모여 토론하고 숙식을 같이 하는 날이 많았다.


물론 그 비용은 3000석 지주의 둘째 아들 김용기가 도맡다시피하였지만, 거기에다 무대장치를 맡아 협력을 아끼지 않은 화가 김용주(오늘날의 국전 전신인 '선전' 특선 작가), 전혁림(국전 특선작가)과 효과를 돌봐 줄 작곡가 윤이상, 정윤주와 시인 유치환, 시조시인 장용두(하보) 등이 가세하였으니 월초로서는 참으로 '행복한 나날'이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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