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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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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시 동구 범일동 산복도로 바로 아래에 살던 때다. 내가(오른쪽에서 세번째)초등학교 3학년, 동생(맨가운데)은 2학년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였는지는 몰라도 앞집 만화방네와 함께 해운대 해수욕을 간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사진을 뜯어봐도 이날 어떻게 놀았는지 전혀 기억나는 게 없다. 옷 입은 차림으로 보아 중학생 앞집 형이랑 나와 동생만 물에 들어가 논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4학년 1학기까지 범일동에서 살았으니 못해도 4년은 한동네 살았을 터인데 앞집 동생들과 누나들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하나도 없고 중학생 형이랑 등짐놀이 하다 허리 다친 기억이 유일하다. 아파서 그만 하라고 그렇게도 소리질렀는데 무시하고 계속 나를 짊어지고 흔들더니... 미안하다 소리도 안하고... 그때 허리다쳐서 꽤나 오래 고생했다.

아, 기억이 나는 게 또 하나 있다. 만화방 아저씨에겐 아주 좋은 천체망원경이 있었는데 그걸로 달을 봤다. 천체망원경으로 달을 본 사람은 우리 반에서 내가 유일했다. 학교에서 막 자랑하던 기억도 난다. 만화방 앞에는 공터였는데 여기서 구슬치기 놀이를 참 많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한 게임에 빠지기도 했다. 뭐냐면, 구슬을 다 잃으면 많이 딴 애한테 가서 구슬로 머리를 세게 맞고 그 구슬을 가지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일확천주(구슬 珠)를 꿈꾸던 애들이 제법 있었다. 나는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다만 솔직히 딱 한 번 맞았다. 아버지한테서 야단을 더 맞았지만.

만화방 앞 공터에선 '가요제'도 열렸다. 주로 우리 또래 아이들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불렀다. 주요 곡목은... 노래 제목은 생각나는 게 없는데 주로 김희갑 노래나 이미자, 김추자, 남진, 나훈아 노래였지 싶다. 다들 고만고만한데 별시리 잘 부르는 애가 하나 있었다. 골목 안 중간쯤에 사는 애였는데 그애가 부르기만 하면 동네 어른들이 10원씩 주곤 했다.

10원 하니 생각나는 말이 있다. 당시 10원이면 엿이나 아이스크림(당시 말로 아이스깨끼)을 사먹을 수 있었다. '뽀빠이'도 가능했고 10원만 더 보태면 신제품 '자야'도 사먹을 수 있었다. 늘 아버지께 하는 말 "아부지 돈 10원만~" 세탁소 하시던 아버지는 그럴 때마다 어머니 눈치를 보셨다. "다음에 주께."

세탁소 다름판 옆에는 금고가 있었다. 그대로 돌려서 열면 '째르르릉'하고 큰 소리가 난다. 나는 당시 이 금고를 열 때 소리가 나지 않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한 손으로 위를 누른채 손잡이를 돌리고 서서히 아주 서서히 두껑을 여는 것이다. 금고 안에는 물론 반가운 10원짜리 동전이 많이 있다. 10원쯤 꺼내가도 아버지가 전혀 눈치를 못 챌 정도의 양이 들어있었다. 세번째 범행 쯤에서 들켰다. 아마도 그쯤이었을 것이다. 크게 야단을 맞지는 않았는데 어쨌든 그 이후론 아버지 금고에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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