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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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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읽는 책, 이왕주의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 딱 내 관심사다. 스토리를 어떻게 해석하고 의미를 담아내느냐 하는 작업. 


<트루먼 쇼>와 <슈렉>은 '해방을 위하여'라는 묶음 제목으로 분류해 다룬 작품이다. 읽고 보니 그러하다. 두 작품의 공통점. 틀 밖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다만 트루먼은 내부에서 바깥을 향해 있고 슈렉은 밖에서 안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정도의 표현으로 이게 무슨 말인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트루먼 쇼>에 나오는 주인공 트루먼은, 말하자면 주인공의 깜냥을 갖추지 않은 인물이다. 아주 평범한 보험회사 샐러리맨. 지구를 구하는 영웅도 아니요,  그렇다고 멋진 사랑의 사연을 지닌 매력남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가 영화의 주인공이 된 이유는 태어날 때부터 감시의 대상으로 선택받았다는 이유 뿐이다. 


그의 활동 공간은 철저하게 만들어진 거대한 세트장 안이다. 그 자신 외의 모든 인물은 배역을 충실히 소화해내는 배우일 뿐이다. 만들어진 공간에서 모든 일거수일투족이 5000개의 카메라에 의해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그야말로 비밀이라곤 하나도 보장받지 못하는 완전히 까발려진 삶을 산다.



그런 그에게도 산너머 바다건너의 세계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연출자에 의해 수많은 위험의 경고를 겪으며 포기하고 억제하도록 길들여지지만, 실비아와 피지섬, 이 두 단어가 그를 시헤이븐이라는 거대한 세트장 바깥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하게 한다.


우리의 삶에 비추면, 뭔가 유사한 모습이 발견되지 않나. 어쩌면 우리도 태어나면서부터 해야하는 것과 하면 안 되는 것에 길들여지고 다른 생각을 할 수 없는 환경에서 밤낮없이 경쟁에 내몰려 삶을 소비하고 있지 않냐는 거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세상은 우리가 배운 것 안에만 있는 것일까.



영화에서 피터 위어 감독이 하고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 작가는 책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시선에 맞춰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아예 시헤이븐 바깥으로 나서는 것이다. 그 바깥으로 탈출함으로써 감시의 시선, 투시의 카메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영화에서 그가 제기하고 있는 물음은 어떻게 카메라 앞에서 부끄럽지 않고 떳떳해지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카메라 바깥으로 나서느냐다."



우리 일상에서 알게모르게 도처에 배치되어 있는 트루먼의 카메라는 어떤 것일까. 무심히 켠 컴퓨터? 이메일? 메신저를 통한 우연한 대화? 친구에게 보낸 핸드폰 메시지? 마트에서 긁은 신용카드?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사찰의 대상이 된다면 이 모든 것은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드러내는 도구로 작동할 것이다.



그것뿐일까. 바깥세상에 대해 꿈도 꾸지 못하게 하는 카메라는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제도, 규칙, 원리, 법, 도덕적 양심이나 종교적 계율조차 세트장 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하는 높은 담장인 것이다.



기존의 틀을 깨고 바깥 세상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 '포스트모더니즘' 정신이다. 작가는 카메라 세트장 밖으로 빠져나가기 위해선 몇 가지 지혜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첫째, 의심에 의심을 거듭하라. 트루먼처럼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모든 공간을 의심해서 거기 숨겨진 카메라를 찾아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자신의 자의식을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내가 특별하게 두려워하는 것, 내가 유난히 고통받는 약점, 내가 두드러지게 거북해하는 일들. 그래서 저 먼 으로의 동경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셋째, 깨닫고 나면 즉시 행동해야 한다. 지금 당장. 머뭇거리는 만큼 시간낭비다. 



포스트모더니즘 말이 나왔으니 좀 더 다뤄보자. "간단히 말하면 서양 문명의 전통에 대해 통째로 도전하는 반항 운동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내게 이런 해석보다 권력자가 만든 제도에 의해 만들어진 상식의 틀을 벗어나 사안을 새로운 인식으로 들여다 보는 운동이라는 해석이 더 마음에 든다.


작가는 책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했다. 첫째, 우리 사회에 잘 작동되고 있는 합리적인 원리, 규칙, 질서, 코드 등에 강하게 반발한다. 둘째, 규격화된 표준을 혐오한다. 셋째, 타자의 목소리, 그들이 들려주는 작은 이야기에 귀 기울이려 한다. 음, 이부분은 설명을 좀 덧붙이자. 이야기의 중심에 서지 못하는 사람들 즉 여자, 흑인, 황색인, 가난뱅이, 과부, 왼손잡이, 고아, 장애인, 기형자, 못난이 등...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극하는 것이다. 넷째, 어떤 틀이나 액자의 바깥으로 나서려 하고 그 바깥에서 안에 있는 모든 제도와 규칙에 저항하려 한다.



바깥에서 안을 들여다보며 바깥의 자유를 고수하고자 하는 작품이 바로 <슈렉>이다. 포스트모더니즘 특성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작품이다. "잘 정돈된 이야기코드를 해체하고 차이의 조화를 부추기고 주변부 타자들의 목소리로 엮이고 모든 통상적인 예측들을 통렬하게 위반한다."



어느날 슈렉이 한가이 사는 숲으로 몰려드는 일단의 군상, 걔들이 누군가. 피터 팬, 피노키오, 신데렐라, 백설공주, 인어공주, 아기돼지 삼형제... 얘들은 성주 파콰드에게 쫓겨난 동화속 주인공들이다. 파콰드가 지겹다며 쫓아낸 배역들이다. 슈렉이 이들을 돕는다. 왜? 정의감이 불타서? 아니다. 조용히 살고 싶어서다.


이야기는 어찌어찌 진행되면서 슈렉이 불뿜는 용이 사는 악마의 성으로 피오나를 구하러 가게 되고 뭐 어쩌다 또 사랑에 빠졌는데, 그 예쁜 캐릭터 피오나가 슈렉이나 별 다를 바 없는 외모로 변신하고 둘이서 조용한 숲에서 알콩달콩. 뭐 이런게 줄거리다. 해피엔딩이긴한데 동화가 보여주는 일반적 관념을 적나라하게 박살내는 반전이다.



성 안이 규율을 따라야 하는 삶이면 성 밖은 자유의 삶이다. <슈렉>은 그것을 포스트모더니즘으로 보여준 영화다. 이 챕터 마지막 문단은 포스터모더니즘을 위한 변론이다.


"그러나 오해는 말자.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 자체의 틀 바깥에 나서서 이 모든 규칙, 질서, 원리 등을 깡그리 부수고 묵살하고 위반하라고 선동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에는 그 바깥이 있음을 깨우쳐주려는 것이며 그 바깥으로 나서려는 의지와 안의 것들에 맞서려는 위반의 정열을 부추기려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은 어쩌면 해방된 영혼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그래서 자신의 삶을 풍요하게 살기 위해서,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전략일지 모른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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