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299)
돌이끼의 작은생각 (110)
돌이끼의 문화읽기 (477)
다문화·건강가족 얘기 (20)
경남민속·전통 (14)
경남전설텔링 (74)
미디어 웜홀 (142)
돌이끼의 영화관람 (21)
눈에 띄는 한마디 (8)
이책 읽어보세요 (76)
여기저기 다녀보니 (92)
직사각형 속 세상 (92)
지게차 도전기 (24)
지게차 취업 후기 (13)
헤르테 몽골 (35)
돌이끼의 육아일기 (57)
몽골줌마 한국생활 (15)
국궁(활쏘기)수련기 (16)
Total
Today
Yesterday
11-24 00:52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세상 참 많이 좋아졌다. 오늘 아침 11시에 시험을 쳤는데 그 결과가 인터넷으로 오후 2시에 발표가 되는 세상이다. 부산 금곡동에 있는 산업인력공단에서 시험을 치르고 집으로 와 점심을 먹고 컴퓨터 앞에 앉아서 q-net 공단사이트에 들어가 내 수험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니 점수까지 다 나온다.

 

아침에 부산 금곡동 시험장에 가느라 약간 분주하게 움직였다. 북면에 계신 어머니께선 부랴부랴 지원이 본다고 일찌감치 버스타고 오셨고 나는 아이들 다 보내고 나서 갈 채비를 했다. 채비랄 것도 없지만 가방에 어머니께서 다려주신 민방 감기약을 한 통 넣고 집을 나섰다.

 

아침에 나에게 시험을 잘 쳐라는 파이팅을 외쳐주는 사람은 어머니 한 사람 뿐이다. 어제 아이들에게도 오늘 아빠가 부산에서 시험을 친다고 이야기했는데도 아내도 아이들도 모두 부랴부랴 집을 빠져나가기에만 바빴다.

 

가는 길에 같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있는 짝꿍 오지훈 씨를 태웠다. 벌써 한 달이나 되었는데 아직 호칭이 없다. 나이 차이가 너무 많다보니 마땅히 부르기 애매한 구석이 있다. 열살 정도 차이 나는 사람들은 그냥 날더러 형님이라 쉽게 부르는데 오지훈 또래의 사람들은 성인이라도 나와 스무살 넘게 차이가 나다보니 형님이라 부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아저씨라고 부르는 것도 맞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나야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이름 뒤에 씨를 붙여주면 그만이지만... 스무 살 넘게 차이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반이다보니 어색한 구석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그건 그렇고 네비게이션인지 바보게이션인지 그놈 믿었다가 하마터면 두 사람이 시험도 못 치를뻔 했다. 금곡으로 가야할 것을 거의 구포쪽으로 방향지시를 하는 바람에 10분은 넘게 지체되었다. 그러잖아도 빡빡하게 시간을 잡고 출발했는데. 업그레이드를 하든지 폐기하고 손이게이션이나 입이게이션에 의지하는 수밖에.

 

산업인력공단 부산지사에 도착하니 반 동무들이 걱정 반 반가움 반으로 반긴다. "왜 이리 늦었어요?" "공부 잘 하는 사람은 이리 늦게 와도 돼요?"

 

4층 강당에서 3개 반으로 나뉘어 시험을 치렀다. 총 150개의 좌석이 배치되어 있었다. 나는 1반 맨 오른쪽 맨앞 자리에 앉았다. 좌석에 별로 신경 안 쓰고 있는데 진해 석동에 사는 홍진익(오지훈보다 1살 작다)서 내 자리를 확인했는지 알려준다.

 

앞 교탁에 선 사람은 시험에 관련된 사항들을 알려준다. 이 시간에 나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목이 따가워 기침을 몇 번 한 것 말고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어제 남아공 월드컵 최종예선 사우디 전을 괜히 봤나 싶을 정도로 몸이 피곤했다. 잠이 안 와서 거실 식탁에 앉아 문제집에 있는 문제 별표해 놓은 것 10개를 딱 보고나서 잠이 쏟아진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는데 어쨌든 시험을 치는 데는 지장이 없겠지.

 

시험지를 받고 시작하기 3분 정도 여우가 있었다. 미리 문제를 풀어볼까 하다가 말았다. 어차피 60문제 30분도 안 되어 다 풀 텐데 비겁하게 먼저 푼다고 덕될 것도 없으니까. 모르는 문제가 갑자기 알아지는 것도 아니고.

 

예상대로 30분 만에 다 풀었다. 문제지에 파란색 볼펜으로 답안에 동그라미를 치며 풀어나갔는데 답안지에 사인펜으로 색칠을 할 때 실수를 했다. '다'가 답인데 '다'자의 디귿 윗부분이 파란색 선과 맞물려 '나'자로 보였던 것이다. 성급하게 답안지 '나'에 마킹을 했다가 아차 하고 손을 들어 교체를 했다. 손만 드니까 감독관은 알아서 새 답지를 가져왔다. 나중에 나와서 보니까 세번이나 바꾼 반 동무도 있었다.

 

30분만에 시험지와 답지를 감독관에게 제출하고 나오니 벌써 나온 사람들이 답안 체크를 하고 있었다.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다가 내가 나오니 나에게 물어본다. 그런제 질문이 이상하다. '무슨 문제에 답을 뭐라고 적었어요'라고 묻는게 상식인데 '무슨 문제 답이 뭐예요?' 하고 묻는다. 내가 채점관도 아니고 강사도 아닌데...

 

그런데 결론은 학원에서 배운 게 많이 나왔다. 아마도 배운 것을 그대로 기억한 사람이라면 많이 틀려도 두 세문제 놓쳤을 것이다. 돌아오는 길에는 김회석과 윤성민이 내 차에 합류했다. 이번엔 네비게이션을 믿지 않고 김해에서 새로 난 도로에 차를 올렸는데 진해로 통했다. 하는 수없이 안민터널을 거쳐 집으로 돌아왔다.

 

처음 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알아본 것은 합격 불합격 여부였다. 주민등록번호과 이름을 치니 '합격'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사실 나는 그것보다 내가 몇 점이나 받았는지 그것이 더 궁금했다. 합격이야 떼어논 당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번도 스무개 이상 틀려본 적이 없으니까. 서른 여섯개만 맞춰도 합격이니까.

 

점수를 알아보기 위해선 수험번호와 주민등록번호를 함께 입력해 넣어야 한다. 물론 이름은 당근이고.

 

91.66점. 60문제로 환산을 해보니 55개 맞았다. 흠, 잘한 편이다. 공부하면서 친 모의고사의 평균점수 이상이다. 처음엔 100점을 받아보려고 신경을 많이 썼는데 생소한 분야의 공부이다보니 한달만에 100점을 받기란 쉬운 게 아니었다. 며칠 전 100점의 꿈을 접으니 마음이 편했다. 시험치는 날도 문제집 하나 들고 가지 않는 여유도 부려보고 말이다.

 

아이들이 옆구리 찔린 채 '와'한다. 짜슥들 저거는 한 번도 평균 90점을 넘겨보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다. 아내는 "100점 못 받았나, 에이"한다. 그러면서 우리 남편 머리 좋네 한다. 이로써 나의 단기 기억력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겠다 자신이 생긴다. 대학도 고3때 3개월 공부해 들어갔으니 말이다. 참 더 단기 기억이 좋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대학 때 혼자서 대사를 나뱉어도 1시간이 걸리는 것을 2개월 반 연습해서 공연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험을 치거나 연극이 끝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 하루 공부해서 합격한 운전면허 필기시험(83점 받았다), 물론 20년이 되었지만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변속기는 클러치와 추진축, 또는 클러치와 종감속 기어장치 사이에 설치된 회전력과 속도를 바꾸어 주는 장치다. 주의할 것은 회전수를 바꾸지는 않는다는 점. 변속기의 필요성으로 회전력 증대, 시동시 무부하 상태 유지, 후진을 위한 것이지만 회전수를 증대하거나 환향을 빠르게 하기 위한 것이 보기로 나오면 틀렸다고 체크하면 된다.

 

변속기에서 유의할 점은 록킹볼과 인터록볼이라는 두개의 용어가 나오는데 전자는 물려있는 기어가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고, 후자는 두개가 한꺼번에 물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는 것.

 

정상작동되는 변속기에서 소음이 발생하는 원인으로 윤활유 부족, 베어링 마모, 기어마멸을 들 수 있으며 주행중 변속기 기어가 잘 빠질 땐 샤프트 축 고정 장치의 스프링 장력의 감소나 기어 백래시 과대, 싱크로 나이저 키 스프링의 장력 감소를 의심할 수 있다.

 

또한 기어변속이 잘 안 될 때엔 클러치 페달의 유격 과대, 변속레버 선단과 스플라인 홈 마모, 싱크로 나이저 링의 마멸을 의심할 수 있다.

 

트랜스퍼케이스는 험한 도로에서 구동력의 증가시키기 위한 장치다. 흔히 4륜구동으로 불린다. 이장치를 부착했을 때엔 어느 하나가 고장이 나더라도 구동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오버드라이브는 건설기계의 속도를 30%정도 빠르게 하고 연료를 절약하는 장치로 엔진의 여유출력을 이용해 움직인다. 오버드라이브의 주요 장치는 유성기어장치인데 그 구성품으론 선기어, 유성기어와 캐리어, 링기어다. 유성기어 세트에 들지 않는 것을 고르라는 문제가 출제된단다.

 

자동변속기에서 변속장치의 종류로는 프런트 클러치, 리어클러치, 프런트 브레이크, 리어브레이크다.  자동변속기 오일의 온도는 50~80℃이며 유압제어의 3가지 장치는 매뉴얼 시프트, 스로틀 압력, 가버너 압력이다.

 

드라이브라인은 변속기 바로 뒤에 붙은 추진축이다.드라이브라인은 자재이음, 즉 유이버셜 조인트로 연결되어 있으며 그리스유로 윤활한다. 추진축과 변속기를 잇는 것은 슬립조인트로 축의 길이 변화에 적응하도록 설계되었다. 자재이음은 각도 변화에 대응한다는 점을 명심.

 

추진축이 진동하는 원인으로 요크방향의 다름, 중심 베어링 마모, 밸런스 웨이트 떨어짐, 추진축의 굽음을 들 수 있다. 자재이음 양쪽에 두는 이유는 회전속도의 변화를 상쇄하기 위해서라는 것도 기억할 것.

 

뒤차축 어셈블리는 종감속기어, 차동기어장치, 액슬축, 하우징으로 구성되어 있다. 종감속기어는 영어로 파이널 드라이브 기어(final drive gear)라고 한다. 형태에 따라 윔 앤드 웜 기어, 스퍼 베벨 기어, 스파이럴 베벨 기어, 하이포이드 기어 형식이 있다.

 

차동기어의 작동원리는 랙과 피니언의 원리를 응용한 것인데 링기어의 회전수보다 한쪽 바퀴가 적게 회전한 만큼 바깥쪽 바퀴는 더 많이 회전하게 된다. 참고로 차동기어가 없는 건설장비는 모터그레이더로 대신 회전반경을 작게 하려고 앞바퀴 경사장치인 리닝 장치가 있다. 쇼바(현가장치)가 없는 장비는 지게차며 뒷바퀴로 조향한다. 로더는 허리꺾기식으로 조향한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화폐개혁은 되었어도 여전히 10환짜리 지폐가 있던 시절 우리 가족은 부산의 전포동에 살았다. 내 나이 다섯살, 온동네 어른들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때다. 1968년 여름엔 40년이 넘은 지금도 잊히지 않은 추억이 하나 있다.

 

세발자전거. 아버지는 나의 독촉에 못이겨 세발자전거를 사주셨다. 얼마인가 기억을 할 수 없지만 당시 한국의 경제사정을 생각한다면 서민들이 쉽게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참, 세발자전거와 위의 사진은 직접적인 관련이 없어서 설명하자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때가 바로 이 때였기 때문이다. 사진 찍은 때가 먼저인지 세발자전거 사건이 터진 게 먼저인지 알 수 없다. 그 즈음에 집 앞으로 어떤 사진사가 조랑말을 몰고 지나가며 아이들 사진하나 찍어보라고 강권하기에 어머니는 마지못해 그러마고 했는데 돈이 좀 들어도 40년이 지난 지금 아들의 추억거리 안주가 되니 잘 투자한 셈이다. 어머니 고마워요.

 

사진에 얽힌 얘기를 좀 더 하자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한게 원래 내가 말에 올라 타려고 했다. 사진사가 날 말 안장에 앉힐려고 했는데 내가 싫다고 했다.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 살 먹은 동생이 말에 오르고, 동생이 말 등에 올라가고도 울지 않은 것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나는 말고삐를 잡아야 했는데 그게 잘 되지가 않았다. 사진사는 자꾸 날더러 고삐를 들이미는데 난 겁이 나서 잡을 수가 없었다.

 

시간은 가고 하는 수없이 사진사는 그냥 사진을 찍자며 고삐는 동생을 주고 나보고는 차려자세로 있어라고 했다. 그게 말처럼 되나. 말이 자꾸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데 어찌나 겁이 나던지. 혹시 팔이나 가슴을 물까 싶기도 하고 발로 찰까 싶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사진사는 셔터를 눌렀다.

 

이 시기에 구입한지 열흘도 되지 않은 세발자전거가 감쪽같이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그때가 저녁무렵이었다. 밖에서 자전거를 번갈아가며 타고 놀던 동생과 나는 어머니의 "밥먹으러 들어와"하는 소리에 자전거를 챙기지도 않고 그냥 쪼르르 들어갔다. 어쩌면 어린 마음에 집 문 앞에 있는 자전거를 누가 어찌하랴 하는 방심이 화근이었는지 모른다.

 

밥을 한참 먹고 있을 때 아버지가 "자전거는?"하고 물었다. 그제서야 밖에 그냥 놔두고 들어온 것이 불안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총알같이 뛰어나가 봤지만 자전거는 이미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뒤였다. 밥이고 뭐고 그 순간에 자전거를 빨리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다섯 살이면 제법 어린 나이인데도 온 동네를 뒤집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결국 혼자서는 못 찾고 아버지와 함께 동네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수사는 며칠 계속 되었다. 누군가 타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서였다. 잃어버린지 열흘쯤 되었나 우리는 지치기 시작했다. 한번은 아버지가 한 말인지 내가 한 말인지 분명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세발자전거를 찾아다니다 훔쳐가기 아주 좋게 대문 밖에 남겨진 세발자전거를 봤을 때 "우리 저거 가져가자"하는 범행모의를 했었다. 아버지가 반대한 건지 내가 반대한 건지 역시 기억이 나지 않는데 우리는 그날도 해가 뉘엿뉘엿 질때까지 헤매다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세발자전거에 대한 마음을 비웠다.

 

아마 아버지는 이 세발자전거 사건을 기억하시지 못할 것이다. 아무리 어린 나이였어도 나에겐 아주 인상적인 경험이지만 아버지껜 그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아직 아버지께는 물어보지 못한다. 어머니라면 몰라도. 시시콜콜한 추억 잡담은 아버지와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968년 부산 전포동, 이곳에서의 기억 중에 또 떠오르는 것은 내가 전철 다니는 길을 따라다니며 누군가 흘린 과자를 주워 먹었던 것과 만화방 아저씨 집에 있는 큰 개의 목줄을 잡고 있다가 흔드는 바람에 몇 미터나 끌려가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들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