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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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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지간이라도 소통이 되지 않으면 오해가 생기고 그 오해가 풀리지 않으면 돌아서게 된다. 그래서 소통은 인간 삶의 아주 기본적인 요건이다. 이런 기본적인 것이 얼마나 통하지 않았으면 '소통하자'고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더 웃기는 것은 소통하자고 그렇게 강조한 사람이 소통을 거부하는 경우인데 이런 사람의 본질은 이기주의에 있다. 자신에게 유리하면 소통하고 불리하면 먹통해버리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단체나 조직에 피해를 끼친다. 다른 사람에게 스트레스를 주고 병들게 한다. 나아가 사회를 병들게 한다. 결국엔 피해가 자신에게 돌아가게 되고 후회하게 되는데 문제는 그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영화 '핸드폰'이 이러한 상황을 아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연예인 매니저를 하는 주인공이 집으로 돌아와서는 피곤하다는 이유로 아내의 대화요청을 거부하는데 이것이 나중에 큰 불행을 낳게 된다. 계속 대화를 거부하는 남편에게 아내는 "이혼하자"는 말을 꺼내 대화하려 하지만 남편은 이마저 무시한다. 남편은 아내에게 다른 남자가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사람을 시켜 혼을 내주게 했는데 죽였던 모양이다. 분실한 자신의 핸드폰을 습득한 사람과 나중에는 집에서 싸우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아내는 남편이 청부살해한 사실을 알게 된다. 남편이 상대를 거의 숨지게 한 후 아내에게 다가갔을 때 태아 사진을 발견하는데 '이 사랑을 지키기로 했어요'라는 글을 보곤 아내를 목졸라 살해한다. 그는 태아가 다른 남자의 자식으로 여겼던 것이다. 동시에 거의 죽어가던 남자가 라이터 불을 켜 집이 가스폭발로 터진다. 남편만이 살아남지만 심한 화상을 입었다. 몇 개월 후 형사가 한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태아는 매니저의 아기라고.

아내가 대화를 요청했을 때 단 10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들어줬더라면 이런 불행이 왔을까. 아니 단 몇 초 만이라도 아내의 얼굴을 바로보고 애기할 수 있게 마음을 열어줬더라면 "나는 당신의 아기를 가졌어요" 이 한마디만 들었더라도 그렇게 많은 사건들을 만들지도 않았을 것인데. 아주 잠깐동안이라도 마음을 열지 않았던 것이 남을 죽이게하고 아내와 아기마저 죽게하는 결과를 불러오게 된 것인데 뒤늦게 후회를 한들 무슨 소용일까.

소통은 그래서 소중하다. 소통은 내가 말을 해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 되어야 자신의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무슨 할 말이 있을 땐 남편은 무조건 귀를 열어주어야 한다. 아내 역시 마찬가지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자식이 뭔가 할 말이 있어 불렀는데 "지금 바빠. 나중에 얘기해." 하는 순간 어떠한 불행이 시작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들어야 하고 자치단체의 장은 시민의 목소리를 무시해선 안된다. 그리고 나라의 수장은 더 큰 귀를 가져야 하는데 소수의 작은 목소리도 귀담아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무시하고 '핸드폰'의 남편처럼 해버린다면 나라를 멸망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는 것이다. 먹통된 핸드폰이 필요없는 이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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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공주 그림은 딸아이의 연습게임입니다. 중학교 1학년 때까지만 하더라도 공부도 못하고 아무런 재능을 보이지 않더니 중2 올라와서 드라마 '바람의 화원'을 보고 난 후 탤런트 문근영에 반하면서 신윤복처럼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서 그림 공부를 한 것도 아닌데 제법 따라 그리는 것입니다. 한편 대견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만 지나친 칭찬은 자만심을 심어줄까봐 그냥 '잘 그렸네' 정도로 평가해주었는데 지금까지 뭐든 못한다는 핀잔만 들어와서 그런지 그게 자신에게 큰 힘이 됐나 봅니다.

 그 이후로 딸은 수시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게 좋은 모양입니다. 어떤 때엔 밤 1시가 되어도 붓을 놓지 않고 제 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붓을 사용하기도 하고 색연필을 사용하기도 하고 4시간이 넘게 열중하는 모습을 보면 입가에 미소가 올라갑니다.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 이제 정리하고 좀 자라." "예!" 그러고도 한 시간은 더 그리다가 어느듯 잠을 잡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부도 못하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던 아이가 드라마에 반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나선 변한 게 많습니다. 공부를 하라고 하면 20분도 더 못버텼는데 이제는 두 시간도 거뜬히 버팁니다. 지난 중간고사 때에도 그랬고 이번 기말고사 역시 시험공부를 열심히 했습니다. 결과는 당연히 긍정적입니다. 극히 기초가 없어 부진했던 과목 외엔 대부분 고득점을 올렸으니까요.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얻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험기간 동안 그리지 못했던 그림을 그리는가 싶더니 작품을 하나 내놓더군요. 바로 아래에 있는 그림입니다. 예전보다 좀 더 꼼꼼히 그렸습니다. 칭찬을 했더니 좋아합니다. 이렇게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면 미술 쪽으로 더 발전할 수 있게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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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삼촌은 지금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어머니보다 12살 아래고 나보다 10살 위다. 사진은 삼촌이 1967년 8월에 송도해수욕장 구름다리 아래서 튜브를 타고 찍힌 장면이다. 67년도이면 내가 다섯 살때이므로 삼촌은 15살이 된다. 삼촌이 중학생이었을 땐 진주에서 살았는데 어찌 부산까지 해수욕을 하러 올 생각을 했는지 대단하다. 하기야 괄괄한 삼촌의 성격으로 보아 전혀 불가능한 행동은 아니었지 싶다.

 

1967년의 송도해수욕장은 지금과 너무 달라보인다. 바닷가의 주택이며 구름다리가 지금은 전혀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말이다. 지금은 거북섬으로 이어지던 구름다리가 있던 자리에 교각이 설치되고 거북섬 위의 건물도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내가 기억하는 송도해수욕장의 모습은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의 주인공들이 튜브를 타고 조오련이 빠르니 물개가 빠르니 하는 장면의 송도해수욕장이다. 말하자면 70년대 중반의 모습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영화 친구에서 주인공 준석이가 1976년 13살이었으므로 시대적 배경이 나와 똑같아서 더욱 공감하며 영화를 본 기억이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75년 부산 초장동 산복도로 인근에 살던 그때 친구들과 함께 팬티에 튜브 하나씩 어깨에 메고 송도까지 그 먼길을 걸어서 해수욕을 다니던 기억도 또렷하다.

 

영화 친구 이야기가 나왔으니 덧붙이자면 준석이와 동수, 상택, 중호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막 달리던 그곳은 부산 진시장 쪽에서 범일동 보림극장 쪽으로 철길 건너는 길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까지 범내골 판자촌 아랫동네에 살았으니 이 장면마저 정감이 들었다.

 

다시 송도해수욕장으로 장면을 옮기면 1975년 내가 튜브를 타고 친구들과 놀고 있을 때 실제 '친구'의 주인공들이 우리 옆에서 놀았을 가능성이 있겠다. 우리는 모두 싸움도 못하는 순둥이였는데 그 애들하고 시비가 붙었으면...

 

영화에선 다이빙대가 보이지 않았는데 그 시절 송도해수욕장엔 다이빙대가 하나 있었다. 거북섬에서 조금 오른쪽으로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서 뛰어내리곤 했다. 우리가 한참 튜브를 타고 놀다가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해 듣기로 배치기로 뛰어내리다 장이 꼬여 병원에 실려갔다는 사람도 있었고 먼저 뛰어내린 사람 위로 뛰어내려 둘이 크게 다쳤다는 얘기도 들렸다. 우리는 다이빙대까지 누가 먼저 헤엄쳐 갔다오는지 시합을 종종 했다.

 

또 당시 구름다리를 건너가려면 5원인지 10원인지 몰라도 얼마간의 돈을 내야만 했다. 그래서 어린 우리들은 한 번도 구름다리를 건너보지 못했다. 지나고 나니 아쉽다.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라도 돈을 얻어 건너보는 것인데...

 

우리는 점심 먹고 땡볕에 송도해수욕장엘 갔다가 해가 뉘엿뉘엿 기울 때야 돌아왔다. 산복도로 길을 따라 오가는 길에 보이는 영도와 부산 외항 먼바다는 아직도 추억 속에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장면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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