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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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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17:42

[전설텔링]구룡지엔 용 한 마리가 남았는데

아직도 양산 통도사 대웅전 옆 작은 연못엔 절 지킴이 용이 산다?


용이 전설의 주인공으로 단골 등장하는 이유는 아마도 그 신비함 때문일 것이다. ‘전설텔링’ 이 코너에서 등장한 용들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 용은 신의 반열에 있는 동물인데 ‘마리’라는 표현을 썼으니 실례가 아닌지 모르겠다.


용이 언제 처음 태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기원전 3~4세기에 쓰였다는 동아시아 고대 신화집인 ‘산해경’에도 실린 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용은 인간사에 관여해왔던 것 같다. 특히 용은 그렇게도 자주 또 많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올랐건만 아무도 본 적이 없기에 더욱 신비 모드를 강화해 나가고 있다.


아무도 용을 본 사람이 없는데 용에 대한 이미지가 대동소이한 걸 보면 희한하다. 민화를 보든, 사찰의 벽화를 보든, 건물의 용 조각을 보든 용의 모습은 대개 거기서 거기다. 산꼭대기 천지에 사는 용이나 강물에 사는 용이나 또한 바다에서 사는 용이나 그 모습은 한결같다.


통도사 대웅전 대방광전 방향 앞쪽에 있는 구룡지.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 여기서 문자의 힘이 얼마나 강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중국 위나라 때(220~256) 만들어진 ‘광아(廣雅)’라는 책에 묘사된 뒤로는 이 용이 중국, 몽골, 한국, 일본으로 퍼져 나가며 수많은 세포분열을 거쳤음에도 거의 똑같은 유전자를 유지하고 있다.


‘광아’라는 책을 살짝 열어볼까. ‘용은 인충(鱗蟲) 중의 우두머리로서 그 모양은 다른 짐승들과 아홉 가지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표현이다.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 눈은 토끼, 귀는 소, 목덜미는 뱀, 배는 큰 조개, 비늘은 잉어, 발톱은 매, 주먹은 호랑이와 비슷하다.


그야말로 짬뽕동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고대 사람들은 신화 속의 동물은 이런 식으로 혼합하는 취미가 있었나 보다. 이집트의 스핑크스도 그렇고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나 켄타우로스 같은 인간과 동물의 혼합체도 만들었으니.


어쨌든 흔한 동물의 혼합체임에도 용은 동아시아 사람들에게 고귀한 존재로 추앙받기까지 하며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또한, 용은 산신과 어울려 다니는 호랑이와 달리 물속의 용왕과 어울려 다녔다. 그래서 산에는 호랑이신 물에는 용신이라는 대비로 존재감을 확실히 해왔던 것도 사실이다.


구룡지 맑은 물에 강룡교 다리와 나무 그림자가 어울려 비치고 있다.


한반도에 살았던 용들은 마냥 신비하고 위엄이 있는 경외의 대상이었던 것만은 아니었다.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양산 통도사 구룡지에 사는 용 이야기만 하더라도 다른 용들이 들으면 자존심 팍팍 구겨질 만한 캐릭터의 용들이 등장한다.


2008년 양산문화원에서 발간한 ‘양산고을 옛이야기’엔 통도사 대웅전 옆 자그마한 연못인 구룡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유래를 설명했다. 그 유래는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와 얽힌 한 토막 전설로 전해지고 전해진 것이다. 내용의 일부를 따왔다. 다음과 같다.


통도사를 창건한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는 진골 출신인 소판 김무림의 아들로 속명은 선종랑이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물려받은 논밭과 집을 희사하여 원녕사(元寧寺)란 절을 세웠으며 홀로 깊은 산에 들어가 고골관(신체를 시체의 관점에서 보기, 즉 시체가 썩어서 백골이 되는 모습을 보고 덧없음을 깨닫는 수행법)을 닦았다.


그러던 차에 636(선덕여왕 5), 왕명으로 제자 10여 명과 함께 당나라로 들어가 청량산의 문수보살에게 기도 정진해 문수보살로부터 가사 한 벌과 진신사리 100, 불두골(佛頭骨)과 손가락뼈, 염주와 경전 등을 받았다.


그 후 종남산 운제사에서 3년 수행하고 643년 대장경 일부와 번당(幡幢), 화개(花蓋) 등을 가지고 7년 만에 귀국했다.


자장율사는 신라 최고 승직인 대국통에 임명되어 승니(비구와 비구니)의 규범을 통제하고 보름마다 계를 설했다.


삼성각 앞에서 바라본 구룡지 모습. 맞은 편에 대웅전인 대방광전이 있고 왼편엔 배롱나무가 서 있다.


자장율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문수보살에게서 받아온 석가모니의 가사와 사리를 모실 절을 세우기로 하고 선덕여왕과 함께 창사할 터를 찾기 시작했다. 며칠을 찾아다니던 어느 날, 축서산(鷲栖山)에 이르니 산의 형세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 영축산의 모습과도 너무나 흡사했다.


자장율사는 마음속으로 감탄하고 산 아래 큰 연못이 있는 곳에다 절을 짓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연못에는 아홉 마리의 용이 살고 있었다.


절을 지으려면 연못을 메워야 했기에 자장율사는 용들을 불러내 설득에 나섰다. 하지만, 용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자장율사는 하는 수 없이 법력으로 연못을 펄펄 끓게 해 용들을 쫓아냈다. 아홉 마리의 용 중에서 다섯 마리는 남쪽을 향해 산 너머로 도망을 갔는데 그곳을 오룡골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또 용 세 마리는 동쪽으로 달아나다 솔밭 길 근처 야트막한 산의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떨어져 죽고 말았다. 그때 용이 흘린 피가 바위에 낭자하게 흘렀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 바위를 용피바위 또는 용혈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현재 산문 쪽에 있는 검붉은 색의 용혈암은 이 용들이 흘린 피가 묻어서 바위 색이 변한 것이라고 한다.


구룡지를 가로지른 돌다리인 강룡교.


마지막 한 마리는 순종하며 절을 지키겠다고 맹세해 자장율사가 자그마한 연못을 만들어 그곳에 살도록 했다. 그 못이 지금 통도사 대웅전 바로 옆에 있는 구룡지(九龍池)이다.


아무리 다양한 동물의 혼합체로서 신령스런 역할을 도맡아 왔다고 해도 불력을 앞세운 스님 앞에서는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았나 보다. 끓는 연못을 스스로 식히지 못하고 도망을 갔으니. 게다가 세 마리는 도망가다가 바위에 부딪혀 피를 흘리고 죽었다 하니 용의 체면이 여간 구겨지는 게 아니다.


큰 연못을 메우고 남은 한 마리를 위해 작은 연못을 조성했다고 하니 한 마리 분량의 연못 크기 곱하기 9를 하면 원래의 연못 크기가 나오려나? 어쨌든 남은 한 마리를 위한 구룡지 크기는 아담할 정도다. 넓이가 15㎡에 지나지 않는다.


구룡지 북쪽으로는 금강계단이 있다. 시계방향으로 동쪽엔 대웅전, 남쪽엔 응진전, 그리고 서쪽엔 정면 세 칸짜리 건물 삼성각이 있다. 구룡지 곁에는 배롱나무가 혼자 남은 용의 친구가 되어 사시사철 표정을 달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양산 통도사 위성지도./다음지도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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