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을 찾아서)2000년 역사 가야진 용신제
삼국사기에 기록된 지낸 국가 제례…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19호
가야진 용진제는 신라 초기부터 전해오는 나라 제사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 남아 있다. 권32 ‘제사조’에 기록되기로 “가야진용신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국가적 제전으로 제정한 중사(中祀) 가운데 사독(四瀆)의 하나다.”라고 했다. 이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이야기가 실렸다.
신라 시대 중사는 제후가 왕명을 받들어 명산대천에서 올리던 제사다. 사독엔 오악(산신), 사해(해신), 사진(지신), 그리고 사독(천신)으로 구분되는데 가야진용신제는 사해가 아니라 사독에 해당한다. 당시 기우제 성격이 강해서였을 것이다.
가야진사에서 바라본 낙동강.
그리고 사독은 서라벌을 중심으로 동서남북에 있는 토지하(흥해), 웅천하(공주), 황산하(양산), 한산하(서울)을 일컫는 말인데 지금은 유일하게 가야진용신제만 남았다. 신라시대엔 천신제와 풍년기원제 성격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가야진용신제는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19호다. 신라시대부터 꾸준히 이어져 오던 이 민속제례가 끊어질 위기에 놓인 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였다. 일제는 가야진사를 허물고 용신제를 금지했다. 그러자 주민들이 몰래 인근 천태산에 들어가 제사를 모시면서 명맥을 유지했다.
가야진사
앞 제단의 남문에 금줄이 쳐져 있다.
헌관과 제관들의 이름을 적어놓은 종이도 걸려
있다.
광복 후 현 위치로 돌아왔고 꾸준히 보전해왔기 때문에 1983년엔 경남무형문화재자료 제7호로 지정되었고 1990년 대대적인 복원정비를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췄다. 가야진용신제는 이제 민속놀이로 승화해 1995년 제27회 경상남도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이어서 1997년 도무형문화재가 된 것이다.
가야진용신제는 1 부정가시기, 2 칙사맞이굿, 3 용신제례, 4 용소풀이, 5 사신풀이 순서로 진행된다.
부정가시기굿
제단 주위를 돌면서 부정가시기굿을 하고 있다.
먼저 부정가시기는 제례일 3일 전부터 제관들은 목욕재계하고 제단 내외를 청소하며 제향을 준비한다. 제를 올리기 전에는 제단 주변과 출입문에서 부정을 쫓아내는 의식을 한다. 그리고 제단 주변으로 부정이 없도록 황토를 뿌리고 금줄을 치고는 부정가시기 굿을 벌인다. 부정가시기 굿은 풍물패가 가야진사 앞에 마련된 제단을 돌면서 진행된다.
“부정아 가시라/부정부정 웬 부정/천상아래 넓은데/목욕재계 삼석달/점지하신 이곳은/이제 정성 대했네/삼용신을 모신 터/부정을 물리세/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부정아 가시라/훠이 훠이 부정 가시라.”
칙사맞이굿
칙사맞이굿칙사맞이굿 중에 길닦이를 하고 있다.
칙사가 당도하기 전에 먼저 길을 닦는 의식이다. 칙사는 나라에서 보낸 관리로 용신제에서 제관이 된다. 가야용신제에선 현재 양산시장이 초헌관을 맡는다. 칙사맞이굿을 할 때엔 사람들이 괭이와 망깨 등 농기구를 들고 소리에 맞추어 땅을 고르고 다지기도 하고 빗자루로 쓸기도 한다.
이런 노동 품앗이에 술이 없을 수 없다. “아이고, 대라! 좀 쉬었다 하세!”하고 누가 소리라도 치면 잠시 휴식을 하기도 한다. 이렇게 일을 하다 중간 중간 쉴 때마다 술이 공급된다. 길닦이 노동이 끝나면 일꾼들과 풍물꾼들이 섞여 춤도 추고 소리도 하며 노동의 피로를 푼다.
길닦이 소리가 정겹다. “용당마을 장정들아 가야진사 역사가세/어허여차 망깨야/길을 닦자 길을닦자 가야진사 길을 닦자/어허여차 망깨야/목괭이로 땅을 파고 나무가래 땅고르고/어허여차 망깨야/망깨로서 다져보세 천년만년 다하도록/어허여차 망깨야…”
칙사맞이사인교에 칙사를 모시고 제단으로 향하고 있다.
이렇게 길닦이가 끝나면 사인교를 앞세워 칙사를 맞으러 간다. 정자에서 기다리던 칙사(나동연 양산시장)가 사인교에 오르면 다시 제단으로 향한다.
“쉬! 칙사님 나가신다/쉬! 나랏님 명을 받고 칙사님 나가신다/쉬! 칙사님 행차시다.” 그렇게 칙사가 지나는 길에는 양옆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서 구경을 한다. 예전에는 부복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용신제
용신제초헌관을 맡은 칙사 나동연 양산시장이 제례를 하고 있다.
칙사가 제단에 당도하면 비로소 용신제가 시작된다. 먼저 강신굿을 하고 제단 남문 옆에 설치된 용고(龍鼓)를 세 번 울린 후 집례관의 집전에 따라 제례가 엄숙히 진행된다. 현재의 제례는 유교 형식을 띠며 제물은 돼지를 비롯해 익히지 않은 것을 올리고 잔은 3개를 놓는다. 이는 가야진사에 얽힌 전설에 따라 용 3마리에게 올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용신제축문을 읊을 때면 모든 참제원들이 절을 한다.
용신제의 홀기(제례의 순서)가 진행되면 초헌관인 칙사는 여러 차례 제단을 오르내린다. 초헌례가 진행될 때 가야진용신제 시제축문을 읊는다. 그러면 모든 참제원들이 엎드려 축문을 듣는다.
“유세차 을미년 삼월을축삭십칠신사/근견신 양산시장 나동연 감소고우/가야진지신 복이 위국지축 택윤만물 극인극사 사아백복/근이 생폐예제 자성서품 식진명천 상향.” 한자로 된 어려운 말이나 제사를 지내는 헌관이 ‘감소고우’ 즉 가야진의 신에게 삼가 밝게 고하는 것으로 나라에 좋은 일이 있고 만물은 윤택하고 모든 일에 복이 있길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용소풀이
용소풀이_불집태우기불붙은 송막.
침하돈돼지 제물을 용소에 넣는 의식.
용신제례가 끝나면 모두 제단 인근에 마련된 송막(불집)으로 간다. 풍물을 치며 송막을 한 바퀴 돌면 칙사가 불을 지른다. 이때 마을 사람들은 짚신을 벗어 불길로 던지며 용의 승천을 기원한다. 요즘은 행사를 위한 제례이므로 미리 송막 주면에 짚신을 마련해놓고 송막이 타오르면 짚신을 주워 던지는 시늉을 한다.
풍물이 끝나면 모두 강변으로 간다. 헌관과 집례 사령들은 배를 타고 용소로 간다. 제물을 용소에 있는 용왕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르기 위해서다. 용소는 강에서 가장 깊은 곳이다. 용소에 도착하면 칙사가 헌작하고 세 번 절을 한다. 그러고는 “용신님, 이 희생을 바치오니 부디 흠향하소서!”하고 외치고 돼지를 물에 빠트린다.
이어서 함께 간 사람들이 “침하돈! 침하돈! 침하돈!”하고 세 번을 외친다. 이 소리와 함께 나루터에 있던 풍물패와 마을 주민들은 “비온다!”하고 외친 후 즐겁게 풍물을 울린다. 칙사 일행이 배를 타고 돌아오면 다시 모두 제단 앞으로 가서 흥겹게 뒤풀이를 한다.
사신풀이
사신풀이는 제관과 마을사람들이 함께하는 대동마당이다.
용소풀이가 끝나고 제단 앞에 모인 모든 참제원들이 풍물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며 뒤풀이를 한다. 이를 사신풀이라고 한다. 칙사는 관복을 벗고 제관을 비롯한 모든 참제원과 마을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논다. 대동마당이 펼쳐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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