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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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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즈음한 시기는 문화예술 분야의 격동기였다. 아니 정치, 사회, 생활 모든 것이 격변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 시점에 이광래가 주도한 '민예'의 활동 역시 격변기 상황을 대변했을 터이다. 한하균 선생의 글에서 놀란 것은 친일 극단이었던 '조선연극문화협회'가 광복과 함께 '조선연극동맹'이란 이름으로 옷을 갈아입고 즉각적으로 공산주의 선전계몽대로 돌변한 사실인데... 친일단체였던 이 극단을 '친일청산'에 더 강력하게 대처했던 북한이 묵인했다는 게 쉬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여튼.




연극의 예술성(순수성)과 대중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고 몸부림하던 이광래는 일제의 가교한 문화정책 때문에 신극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극연'과 '중앙무대'가 해체되자 상업극의 독무대가 된 극단에서 1940년 황금좌에 가담하게 된다.


이 황금좌는 1933년 12월에 창단된 극단으로 멀리는 남북 만주로, 가까이는 전국(물론 북한지역 포함) 각지로 이른바 지방 공연을 주로 한 극단이었다. 이 극단의 문예부와 연출부 책임자가 이광래였고, 월초 정진업이 이 극단의 중견배우로 활약하고 있었다.


굳이 서울을 피하고 지방으로 순회하는 까닭은 지나치게 친일적인 레퍼토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온재 선생은 필자에게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조선총독부 경무과(지금의 경찰청 정보과)의 직접적인 감시와 감독에서 조금이라도 더 벗어나고 싶은 심정에서 경성을 일부러 멀리한 것이라 했다. (당시에는 극장 안에 임석 경관석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정도로 감시가 심하였다.)


이 무렵에 공연된 작품은 일본인 마부네 유타카 원작 <태양의 아들>, 정비석 작 <청춘의 윤리> 등과 <칼맨> <춘희> <윌리엄 텔> <양산도령> <아버지 돌아오다> <아의 죽음>(정진업의 구술에 의함, 자신이 출연한 작품) 등 이광래 작·각색으로 된 레퍼토리였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제국은 드디어 연합군(미영불 등 세계각국)에 항복을 선언하였다. 따라서 우리 민족이 그렇게도 소망하던 광복의 날, 해방의 날을 맞이한 것이다. 그런데 어제까지만 해도 일장기를 흔들면서 황군승전(일본군의 승리)을 소리높이 외치던 조선연극 문화협회(친일 연극단체)가 8월 17일 '조선연극동맹'이란 새옷을 갈아입고 해방된 지 불과 2~3일만에 공산주의 선전 계몽대로 둔갑하게 된다.


1945년 12월께에는 조선예술극장·서울예술극장·청포도(극단)·배우극장 극단 전선·혁명극장 등 무려 86개의 극단이 조선연극동맹 산하로 들어가 이른바 '모스크바회의'에서 결정된 한국의 신탁통치를 적극 지지하면서 혁명적 리얼리즘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며 날뛰고 있었다.


지금도 70대 노인들은 창동의 공락관(구 시민극장)에서 혁명극장이 공연한 바 있는 <세 동무>를 기억하고 있으리라 믿는다. 특히 황철의 명연기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으리라.


사실 황철은 해방 후 공산당의 주구가 되어버리긴 했지만, 연기만은 이화삼과 함께 오래도록 연극사에 남을 연기자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쨌거나 온 나라가 좌익일생이 된 마당에 오직 하나, 그야말로 유일무이하게 민족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하여 고군분투한 극단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이광래가 이끌던 극단 '민족예술무대(민예)'다.


일본제국의 강압에 못이겨 친일연극을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그러나 조금이라도 민족적 양심이 있던 인사들은 물러나 스스로 자중하고 있던 그 무렵, 일기당천의 기개로 좌익 진영과 맞서 싸운 단체가 극단 '민예'였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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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5개월 간 진행됐던 화요명작예술감상회 마자막 날이다. 차문호 교수 대타로 작곡가 임지훈 선생이 등장했다. 차 교수는 오후에 리허설 강의로 최종 시간을 진행할 것이다. 불행하게도 그 수업을 들을 수가 없다. 급하게 휴가를 내지 않는한... 사실 그 때문에 휴가를 낼 수는 없다.


탱고로 마지막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킬 수밖에 없겠다. 임 선생은 지난 주 차 교수가 강의했던 멘델스존에 대해 다시 언급하면서 강의를 시작했다. 



탱고에 대한 설명은 '지식채널e' 자료를 감상하면서 살폈다.


http://www.ebs.co.kr/tv/show?prodId=352&lectId=1178031


태고 참고 영상


영화 여인의 향기, (카를로스) 가르델의 망명, 탱고레슨, 에비타. EBS예술의 광장 '포에버 탱고'


아르헨티나에 갔을 때 만난 여성 이름이 '산티아고' 이발비가 워낙 비싸 머리를 잘 안 깎기 때문에 머리가 대체로 길다.


빈부 격차 심해. 백인 유럽처럼 우아한 생활을 하다가 탱고, 서민들의 춤을 보고 반했는데... 유럽에서 귀족들이 좋아하다 보니까 뒤늦게 다시 아르헨티나에서 유행하게 돼. 원래 저거 꺼라면서.


카를로스 가르델... 피아졸라(이름 확인할 필요 있다) 


탱고 리듬은 간단. 브라질 삼바, 아르헨 탱고.


4분의 4박자. 유럽 클래식 컷박에 강약약 이렇게 가는데 박자가 특이하게 쪼개진다. 4박에서 3박으로 쪼갠단다. 어유 어려워.


우리나라에 태권도장이 많듯이 지금 아르헨티나엔 탱고 교습소가 짜다리 있다고.


이제는 70~80년대만 해도 클래식 연주회에서 탱고는 어색했지만 지금은 피아졸라의 탱고가 빠질 수 없는 레퍼터리가 되었듯 일상화 됐다. 


탱고를 알리는 최초의 곡. 카를로스 가르델. 작곡가 겸 가수.


https://www.youtube.com/watch?v=8dStp5hq294


그리고 감상한 작품은 알파치노 출연으로 유명한 '여인의 향기'


https://www.youtube.com/watch?v=F2zTd_YwTvo


어떻게 하면 세계에 알릴까 하고 만들었던 작품이 영화 '여인의 향기'래.


이 시기 아스트로 피아졸라가 등장한다. 반도니온을 들고 연주.


https://www.youtube.com/watch?v=j1v3jST9H5Y&list=PL7D4A2DF0C4794940&index=1




다음 감상곡은 리베로 탱고.


https://www.youtube.com/watch?v=kdhTodxH7Gw


아스트로 피아졸라의 리베로 탱고 영상 첫 장면은 곽객이 4박자 소뼉을 친다. 4박자 피아노 연주에 이어 바이올린이 거들고 이어서 금관악기들이 대거 몰려든다. 무대엔 검은 정장의 남성과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성이 격렬한 탱고를 춘다. 오케스타라 여러 악기 중에서 유난히 반도니온이 눈에 띈다. 이 음악은 우리나라의 아리랑처럼 아르헨티나에서 불려지는 곡이라고.


원곡은 좀 다르다. 반도니온과 바이올린으로 연주되었다고. 워낙 유명해지니까 다양한 형태로 연주돼.


피아졸라 곡은 모두 비슷비슷. 좀 다른 느낌의 곡은 몇 곡 안된다고. 


단순한 게 훨씬 더 매력을 가질 수 있다. 피아졸라는 곡이 격렬하고 흥겹다. 챔버 소사이어티는 실내악 단체.


유럽에서 낳이 연주되는 레베라탱고의 다른 버전 감상. 독일 국영방송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8UXlf_ZMb8E



요즘 하우스콘서트 유행. 집에서 공연하거나 잔디밭, 식당 등등. 대중에게 찾아가 공연하는 소규모 공연이 매력으로 여겨지는 시대다. 이런 게 더 음악데 대한 관심을 끌어낸다.


낭랑이라는 피아니스트가 우명해진 건 개성이 중요한 시대라... 일단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fpvrXpsCvqU


아주 분위기 있는 음악이 흐른다. 더 스윙글 싱어스...


https://www.youtube.com/watch?v=-uiG5jJavTU&list=PLGda4Xm2g7Y8kBwdjFTSuI5k33ptjLVVw


아카펠라로 연주한다. 요즘 공연장 설계가 너무 잘 돼 있어 소리가 어지간해도 잘 들린다.



다음 강상곡은 기타로 리베로를 연주하는 타타야의 공연. 


https://www.youtube.com/watch?v=ZHDLfdqZ1pE


네명이 등장하는데.... 음... 타타야가 네 명이야? ㅋㅋ. 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네 번을 연주해 합성한 거라고. 기타로 들어보는 리베로도 좋다.


남미쪽엔 기타 실내악 연주가 많다고.


티코티코 연주 독특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Vo-OpQS2zdQ



기타 콰르텟. 우쿨레리도 잘하는 연주팀이라고.


https://www.youtube.com/watch?v=uT3SBzmDxGk


두 개의 첼로가 협연하는 피아졸라 곡도. 괜찮네. 오빌비온. 망각이라는 작품. 피아졸라 곡은 대부분 끈적끈적해. 제목이 캬바레라는 곡이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pZQSlk3eI


싸이의 표절? 6마디는 베끼고 두 마디는 변화. 피아졸라도 그 수법을 잘 써. 다양한 편성을 구사. 


https://www.youtube.com/watch?v=WMn7sDmNMco


마지막 감상 영상. 손열음의 연주. 8개의 연주회용 연습곡 Op. 40중 간주곡_카프스틴 곡.


손가락 푸는 연습곡. 에튀드. 


손열음 러시아 콩쿠르에서 2등을 했는데... 카프스틴 곡은 자세한 내용이 없어 연주자가 곡 해석을 잘 해야 한다고. 여기서 손열음이 1등의 자질을 갖추었음에도 변주곡에 탱고를 넣어 1등을 하지 못했다고.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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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출이 무대에 서면 사실 전체 그림을 객관적으로 그리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연기력도 되고 연출력도 있는 사람을 종종 본다. 타고난 것이겠다. 마냥 부럽기도 하고. 마산 연극의 태동기에 활동했던 이광래가 그런 사람인 모양이다. 그는 극본까지 썼으니. 하긴 연출과 희곡은 연기에 비해 훨씬 더 가까운 사이이긴 하다.




1938년 무렵 중앙무대에 상연된 작품이 이광래의 <지는 해>아 입센의 <헬게랜드의 해적> 등이었다.


전자는 노년과 청춘의 애욕 갈등을 다룬 단막극이고, 후자는 정의와 복수를 그린 비극이다. 두 작품 다 이광래 연출로 부민관(세종문화회관) 무대에서 공연되어 흥행으로도 성공했고, 작품성도 높았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이광래의 연출은 처음으로 한국에 표현주의 수법을 시하였다"고 이향민은 <비판지>6권 7호에서 말하고 있다.


여기서 바뜨릴 수 없는 일화 한토막이 또 있다. 그 당시는 연극의 분업화(조연출, 장치, 효과 따위의 분업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앗기 때문에 <헬게랜드의 해적>이란 입센의 작품에서 이화삼(훗날의 국립극장 연출부장)이 '군나프' 역의 연기자와 조연출을 겸하고 있었다.


이화삼의 연기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바로, 거의 신기에 가까웠다고 정평이 나 있다. 그런데 이 이화삼이 공연 도중에 급성맹장염에 걸리고 말았다. 겨우겨우 그 공연은 마쳤지만 다음 공연이 문제였다. 실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명 연기자의 뒤를 이어 연기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것이다. 이에 이광래는 모험을 감행한다. 연출자 스스로가 이화삼의 대역을 맡고 나선 것이다 다행히 이광래는 다음 공연의 관객들이 대역인 줄 꿈에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훌륭히 역을 소화해냈다.


'중앙무대' 관계자들도 조마조마하던 마음을 가라앉혔을 뿐아니라 오히려 이화삼 연기를 능가하는 연기에 박수와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사동이 깨고 옥동이 사왔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지금도 전해오고 있다.


이렇게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던 중간극은 역시 자금난에 허덕이다 1937년 6월에 자진 해산하고 말았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여진이 있듯이 중앙무대도 재기의 몸부림으로 일년에 2회 내지는 4회의 공연을 1945년 광복을 맞을 때까지 계속하기도 했다.


이때 온재 선생은 한편으로는 극작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연출도 맡으면서 때에 따라서는 제작과 기획까지도 도맡아 일인사역의 구실을 해낸 것이다. 이 무렵에 발표된 작품이 <지새우는 뒷골목(1939)>, <지하도(1940)>, 청계천 풍경(1941)>, <동상(1944)> 등이다.


이러한 중간극의 활동에 대하여 유치진은 <사회공론(四悔公論)>제4권 제5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지도이론을 형성화한 극작가 연출단이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중앙무대에서는 이 방면에 빈약하지 않았던가. 하기는 해단체의 신인 극작가 이광래, 신인 연출가 신재현 등이 있었다.(신군이 연출하였다는 <촌선생>은 최근 내가 본 우수한 연출의 하나다.)


그러나 이분들이 중간극의 현실적 과제 밑에서 그 어려운 곡계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 유감이다.


중앙무대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더라고, 혹은 지도이론을 수정하여서라도 존속되어야 함께 애정어린 격려를 선ㅂ로서 아끼지 않고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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