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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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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신학교는 마산 역사의 한줄기를 이루고 있는 비중이 큰 사립교육기관이다. 1906년에 세워졌다. 일제강점기 기미독립만세 참여 등 일제에 항거한 활동 때문에 탄압을 받다 폐교되기도 했다. 내가 알고 있는 대충의 이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한하균 선생의 이야기를 베껴 써본다. 오재 이광래 선생과 창신학교는 어떤 스토리를 공유하고 있을까.


온재 선생과 창신학교




온재 선생의 본명은 흥근이다. 광래는 그의 개명이고 온재는 그의 아호다.


온재 선생은 한국 신극이 태동하던 1908년(이인직이 원각사를 창립하고 <은세계>를 최초로 상연함) 9월 29일 마산시 중성동에서 이순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마산에서 거제를 거쳐 통영까지 오가는 정기여객선의 선장이었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그의 형인 이일래는 동요 작곡가다.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는 산토끼 동요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줄 안다. 이 노래의 원 작곡자(그 뒤에 다른 사람이 약간 편곡했다 함)가 바로 이일래다. 그가 재직했던 창녕의 이방초등학교 교정에는 지금 그의 노래비가 서 있다. 말하자면 일제 때 수탈당하던 우리 겨레의 형편으로는 제법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셈이다.


대체로 한 집안의 맏이는 너그럽고 유순한 반면 차남은 야멸차고 장난꾸러기 기질이 있듯이 이들 형제도 그랬던 것 같다. 창신학교 소학부(요즘의 초등학교) 최고 학년이던 일래는 여덟 살에 입학한(당시로서는 굉장히 빠르게 입학한 셈이다. 거의 대부분 아홉 살 아니면 열 살에 입학했었고 심지어 장가를 간 신입생도 있었다고 한다) 광래 때문에 여러 가지로 피해(아우를 잘 건사하지 못한다 하여 부모로부터 꾸중을 들었다)를 보아야 했다.


1908년에 개교한 창신학교는 경남의 명문 사립임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만 그 학교에서 교편을 잡은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더욱 놀랄 것이다. 김윤경(국어학자·한글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름) 박사를 비롯해 역시 같은 사건으로 옥사한 이윤재 선생, 안자산 선생, 그리고 일제 때는 일제와, 건국 후에는 자유당의 횡포에 맞서 싸웠던 박순천 여사, <물새 발자욱>의 작곡자 박태준 박사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창신학교 졸업생 중에도 쟁쟁한 명사가 많다. 우라 나라 초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 장관을 지낸 안호상 박사, 이극로 박사, 독립군(광복군) 사령관으로 활약한 김원봉 장군, 가고파의 시인 이은상, 그의 제씨인 이길상(화학자) 박사 등이 모두 창신 출신이다.


이러한 창신학교에서 1915년에 졸업한 사람 중에 일래가 있었고, 1921년에 졸합한 사람 중에 광래가 있었다. 일래는 아저씨 뻘인 이은상과 한반이었고 광래는 이길상과 한반이었다. 이들의 항렬은 숙질 간이었지만 어울려 놀 때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 이들이 한창 개구쟁이 짓을 할 때인 1910년 대의 마산은 물 좋고 공기 좋고 그래서 인심 좋은 고장이었던 모양이다. 


이 고장 출신이면서 시장과 국회의원을 역임한 고 김종신 씨는 "내가 어릴 때만 해도 서원골에는 피래미가 지천으로 많아 천렵을 해서 회쳐 먹었고 또 오동교 아래에는 지금 봉암다리 근처에만 있는 꼬시래기가 많이 있었다"고 60년대 초에 술회한 바 있다.


마산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있는 이일래 산토끼 노래비.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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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를 베껴쓰기 전에 오늘의 주인공인 월초 정진업 선생에 대한 기본 정보부터 훑어보아야겠다. 자료는 역시 <경남연극인물사1>이다. 정진업은 극작가이자 배우,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다.1930년 김해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현 용마고등학교인 마산공립상업학교를 나왔다. 1936년 무렵 이광래 선생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극단 극연, 낭만파, 태양 등에서 연극수업을 받았고 영화 <해연> <여인애사> <삼천만의 꽃다발> 등에 출연하기도 했다. 나머지 이야기들은 한하균 선생의 야화를 거친 다음 풀어볼란다.




월초 전진업 선생과의 만남


세 번째로 월초 정진업 선생과 만났다.


1951년 스산한 바람이 세차게 부는 초겨울이었다. 마산의 화인 선생으로부터 서신 한 통이 배달되었다. '마산문총(현 예총)의 종합예술제에서 서항석 작 <군상>을 내 연출로 공연하니 꼭 오라. 자네가 존경하는 동랑 선생 작품이 아니라서 조금은 섭섭하겠지만 연출가에 뜻이 있는 자네가 한 작가에만 전념한다는 것도 생각해볼 일이 아니겠는가'하는 요지의 편지였다.


국제극장(지금은 없어진 부림시장 위 강남극장)에서 마지막 날 저녁 공연을 보게 되었다. 일찍이 토월회(1920년대 박승희를 중심으로 조직된 한국 신극단체의 효시) 시대부터 무대로, 스크린으로 널리 알려진 톱스타의 한 사람인 고 복혜숙(당시 피란 차 마산에 잠시 거주하고 있었음) 선생과 중진 여배우 김영옥(역시 피란 차 마산에 거처를 정하고 있었음) 여사의 연기 역량이야 새삼스레 말할 나위가 없었다. 


정낙 나를 깜짝 놀라게 한 것은 그 육중한 체구에 걸맞게 박력 넘치는 연기와 그 낭랑한 보이스 컬러로 극장 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볼륨있는 대사를 구사하는 남자 연기자였다. 막이 내린 뒤 소개받아 알았지만 그가 바로 월초 정진업 선생이었다. 월초 선생은 1939년 <문장>지에 소설을 발표해 문단에 데뷔했지만 그뒤 시인으로 전업했다. 사실은 연극인으로 이광래 선생과 함께 일제 때는 만주 각지로, 해방 후에는 '민예'의 중진 배우로 전국을 누비고 다니던 대배우였던 것이다.


그날 저녁 이른바 쫑파티(연극이 끝난 뒤의 자평회 및 축하연)에서 주기가 도연해진 월초 선생의 자작시 낭독이 있었다. 과시(果是) 천하에 명성이 자자한 그대로 뛰어나고 멋진 낭독이었다.


그 자리에서 화인 선생의 권유로 나도 미당 선생의 시를 한 수 읊게 되었다. 눈의 휘둥그래진 월초 선생이 '시 낭독만은 내 전매특허인줄 알았는데 이거 정신 바짝 차려야겠는 걸. 그런데 미스터 한, 바이브레이션이 너무 심하면 격조에 이상이 생기니까. 그런 점에서 나를 모델로 삼아 더 연구해야 할 걸"하고 충고해 주시던 그때 일이 바로 어제 일인듯 새롭기만 하다.


정말 우직하리만큼 소박하고 꾸밈이 없는 월초 선생이었다. 이런 월초 선생과 나는 주로 부산과 마산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같이 했기 때문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도 이 글에 빠뜨릴 수 없을 것이다. 어릴 적 그 맑고 순수하고 미소로운 사랑(?)이 고희를 맞은 지금까지도 아련히 가슴에 남아 있듯이, 이제 세 분 선배님의 발자취를 더듬으면서, 그리고 지난 날을 반추하면서 오늘의 의미를 모색해 보고자 한다.


먼저 언급하기를 정진업 선생이 언론인이었다는 말이 있었는데, 자료를 쭉 읽어내려가니 1951년 부산일부 문화부장으로 일을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한때 용공기자로(용공이란 말은 쉽게 말해 당시 빨갱이로 인식되는 용어다)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는 기록과 함께. 그의 시 '갈대'가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에 시비로 세워져 있다.


월초 정진업 선생의 시 '갈대' 시비. 마산 산호공원 시의 거리.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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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은 통하기 나름이고 그림은 느끼기 나름이다. 예술을 두고 어렵다고 느끼는 것은  말처럼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구름을 보고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는 사람 없고 바다를 보고 무슨 의미인지 따지는 사람 없듯이 예술 중에서도 추상의 영역은 그런 감상이 필요한 분야다. 그저 보고 느끼는 것. 그것이면 되는 것이다.


설치미술은 작가가 의도하는 기호가 분명하게 깃들어 있다. 그래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지 않고 무리한 이해를 요구하게 되면 감흥은 반감된다. 추상은 대부분 기호를 품고 있지 않다. 아주 은밀하게 숨겨놓았을 수는 있다. 때론 오브제 자체가 화두 역할을 해 보는 이에게 고뇌의 행복을 안겨다 주기도 한다. 뭐 아닐 경우가 더 많긴 하겠지만.


오늘 경남도립미술관에 갔다. 정말 오랜 만에. 20년도 훨씬 전에 기자생활을 함께 했던 동기와 함께. 경남도립미술관은 입장료가 있다. 도립이지만 무료가 아니다. 1000원. 무료나 진배없지만 유료라는 전제조건이 갖는 효과는 무료일 때와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관람태도에서.


1000원을 내는 순간 눈에 보이는 얇은 작품설명서를 챙기게 되고 손에 쥐고 있다가 전시실에서 작품을 만나면 책자를 펼치게 된다. 비로소 작품을 감상할 태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유료정책의 장점이다.



별별과 별별. 전시장에 들어서니 단지 언어유희만은 아니었다. 별의별 별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었다. 온갖 별들의 형상은 다양하게 드러난다. 지금은 이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에서 탄생하는 아기가 맨 먼저 보는 것은...음... 산부인과 의사의 얼굴이거나 천장에 붙박혀있는 형광등일 터이다.


하지만 아주 옛날, 그러니까 공룡이 발톱을 세우고 뛰어다닐 때보단 훨씬 후에 살았던 원시인들은 뭐 춥지 않은 곳이라면, 태어나면서 밤하늘의 수없이 많은 별들을 보았을 것이다. 아마도 당시에 펑하고 터지며 불꽃을 피웠던 별이 오늘날 미세먼지 속에 희미해진 밤하늘 가운데서 어찌어찌 용캐도 관측될 수 있기도 하겠다.


에고.. 참나.. 별의별 이야기를 다한다. 안내 책자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있다. 


"수많은 문학과 미술, 신화와 역사에 별은 우주의 신비와 미지의 반짝임 속에서 염감이 원천이었다. 하나의 성좌를 구성하는 별들은 상상이 맺어놓은 관계 외에는 서로 무관하고 거리상 이웃도 아니며 시서능르 ㄶ아주지 않는 반짝임들은 우주 어디엔가 존재하며 우리를 마주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수십광년 전의 잔영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천문학적 지식은 천체에 대한 몽상을 깨기는커녕 시간과 무한, 존재와 환상으로 우리의 상상을 유도한다."




권부문 작가와 강소영릴릴 작가, 정성윤 작가, 안경수 작가, 그리고 이우성 작가, 김도경 작가가  별을 소재로 설치 작품을 내놓았다. 









두 개의 큰 원이 만났다. 무슨 의미일까. 개기일식이다. 물론 설득력은 떨어진다.



약간 독특하게 봤던 작품이다. 안경수 작가의 작품. 어두운 공간의 벽에 작품을 걸고 블랙라이트를 비춘다. 단순한 테크놀로지를 활용했지만 묘한 감흥을 준다.



스님의 작품이어서 그런지 한자성 제목이 많다. 피안으로, 무제, 볍계, 본래면목 등등.



칠. 스케치 된 것에 색을 입히는 작업이 칠이다. 색칠. 정해진 대로 칠하지 않고 어깃장 놓아 칠하는 것은 황칠이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 치매 상태에 든 상황에서 장난기 가득한 외계인의 조종을 받아 벽에다 독특한 향이 밴 누런 색을 칠하는 것을 두고는 우리 조상들이 '똥칠'이라고 했다.



성파스님은 그 어느칠도 아닌 옻칠을 해서 작품을 만들었다. 옻칠의 가장 큰 특징이 무엇일까? 영구성이다. 성파의 작품 중에서도 내는 피안으로 혹은 민화 호랑이가 맘에 든다. 






아... 잠이 와서 다음에 보충 설명...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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