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이미지
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카테고리

분류 전체보기 (1301)
돌이끼의 작은생각 (110)
돌이끼의 문화읽기 (478)
다문화·건강가족 얘기 (20)
경남민속·전통 (15)
경남전설텔링 (74)
미디어 웜홀 (142)
돌이끼의 영화관람 (21)
눈에 띄는 한마디 (8)
이책 읽어보세요 (76)
여기저기 다녀보니 (92)
직사각형 속 세상 (92)
지게차 도전기 (24)
지게차 취업 후기 (13)
헤르테 몽골 (35)
돌이끼의 육아일기 (57)
몽골줌마 한국생활 (15)
국궁(활쏘기)수련기 (16)
Total
Today
Yesterday
04-30 02:42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시간이다. 한하균 선생의 연재가 어제의 그 시점에서 일정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제는 온재 이광래 선생이고 오늘은 화인 김수돈 선생이다. 한국문학을 한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 김수돈. 한하균 선생은 그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자네, 청마 선생댁으로 앞장서게"


그뒤 6·25가 어지고 국립극장이 대구로 피란가고 '신협'이 공군본부 정훈감실에 소속되자 나도 신협 연구생으로 입단하게 되었고, 온재 선생과의 교분은 어느새 사제간의 정분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반부터 진주에서 열리는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때마다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고, 이후 1968년 운명하실 때까지 서울에서 혹은 마산에서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은 것이다.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


두번 째로는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이다. 1946년 늦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큰 아야, 전화가 안되네. 윤선(부둣가) 머리 고모님 댁에 좀 갔다 오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얼마되지 않은 거리지만 귀찮기도 하고 그렇다고 감히 못 가겠다고 짜증도 못 부릴 형편이었다. 수동식 전화기를 자꾸 돌려 보았지만 아무리 돌려도 우체국 교환양은 어디로 갔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 무렵은 전화기 있는 집도 드물었지만 설사 있다해도 어찌된 영문인지 통화하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부득이 부둣가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마산~통영 객선이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보게 학생~."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키에 어울리지 않게 큰 미군 점퍼(당시는 미군 물자가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를 걸치고 머리는 봉두난발로 아무렇게나 뒤로 빗어 넘긴, 얼핏 보아 예술가임에 분명한 사나이(?)가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아주 소중한 보물인 양 옆구리에 끼고 서 있지 않은가.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가까이 갔더니 대뜸 "유치환 선생을 아시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청마 선생님을 왜 찾으시는데요?" "옳아. 선생님 아호를 아는 것 보니까 제법 된 녀석이군. 자네 청마 선생님 댁으로 나를 안내해 주게."


그리하여 고모님 댁 심부름은 깜박 잊고 길 안내에 나선 것이었다. 그 이듬해 출판된 저 유명한 <소연가>라는 시집 원고가 그 소중한 보따리였고 그 시집의 서문을 받기 위하여 청마 선생님을 찾아오셨던 김수돈 선생님이 통영에 내리자마자 부둣가에서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통영에서 탄생한 '문인극회'(유치환 박재성 김용기 김상옥 김춘수 허창언 서성탄 황하수 정명윤 송두영 윤이상 정윤주 전혁림 등 지금 생각해 보아도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었다)가 마산의 '청년문학협회 마산지부'(김수돈 조향 등)의 초청을 받아 박재성 작 <호풍>, 이기영 작 <해방> 등의 레퍼토리로 공연하면서 화인 선생과의 사귐은 화인 선생 말씀대로 '수어지교'로 발전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겪었던 둘만의 이야기, 내가 마산에 살면서 모셨던 가지가지 일들을 아가씨가 수를 놓는 정성으로 하나씩 엮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한하균 선생의 이야기에 덧붙여 <경남연극인물사1>에 실린 화인 선생의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이 책은 김소정 연구와 강주성 보조연구로 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발행했다.)


책 33쪽에 화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기(이 시기라 함은 광복이 되고 마산에서 온재(이광래)가 바로 극단 '민예'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이 활기를 띠던 때를 이른다) 마산지역에서는 김수돈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1947년 창단된 '문인극회'에서 그는 <민족의 태양>(염주용 작)을 연출했다. 


다음 해에 <동래성 함락의 날>(염주용 작)과 <무의도 기행>(함세덕 작), <낙화암>(함세덕 작), <견우직녀>(서항석 작), <단층>(김영수 작) 등을 연출하며 지역 연극계의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9월 거주지를 부산에서 마산으로 옮긴 김수돈은 문총 마산지부에서 종합예술제를 개최했을 때, <군상>(서항석 작, 정진업 임향 복헤숙 김영옥 출연)을 연출하여 국제극장에서 공연했다.


1954년 6월에는 '청문극회' 창립공연으로 <구원의 곡>(이주홍 작)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그 무렵 그는 마산문화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향토연극운동의 전위대로서 극예술연구회(회장 김수돈 기획 강형순 총무 최익배)를 창립했다.


창립 기념공연으로 <닭의 의미>(오학영 작)를 강남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전쟁으로 침체했던 마산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년 7월 그는 예총 마산시지부 창립총회에서 부지부장에 피서되었고 12월에는 3·15기념회관 개관출하문화제 행사때 연극 <고래>(임희재 원작)의 기획 무대감독을 맡아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에는 연극 <태양의 아들>(진풍선 작 정진업 이백화 출연)을 연출해 3·15회관에서 공연하였다.


화인 김수돈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됐다. 시인이면서 연출가. 문학과 연극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것.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보도자료 돌렸던 경남청소년연극제 소식 이제야 올린다. 경남연극제와 마찬가지로 한국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주최하고 밀양시지부가 주관을 맡았다. 이번 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팀은 올 8월 광주에서 열리는 전국청소년연극제에 진출한다. 경남의 청소년 연극 수준이 꽤 높은 편이란 건 지난해 대상 팀인 태봉고등학교가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을 받은 것으로도 방증이 된다.




청소년들의 포동포동한 끼 연극무대 달군다

21회 경상남도청소년연극제 12일 밀양아리랑아트센터서 개막


점점 열기를 더해가는 계절, 그 계절의 온도보다 더한 열기로 무대를 달구는 청소년들의 열정이 있다. 한국연극협회경남지회는 오는 12일부터 17일까지 밀양아리랑아트센터 소공연장에서 청소년들의 포동포동한 끼를 맘껏 펼칠 장을 마련한다. 21회 경상남도 청소년연극제.

 

연극협회밀양지부 주관으로 펼쳐질 이번 청소년연극제에는 밀양영화고등학교 등 총 6개 학교 연극반 또는 연극동아리 팀이 참가한다. 경남청소년연극제는 오는 8월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펼쳐질 제21회전국청소년연극제 예선으로 열리는데, 경남연극제처럼 이번 연극제에서 대상을 받은 1개 팀만이 전국대회에 나가 본선 경연을 펼친다. 본선에는 전국 16개 시·도 팀이 참가해 명실상부한 대한민국 최고의 청소년연극팀을 가리게 된다. 지난해에는 창원 태봉고가 경남 대표로 나가 단체 최우수상을 받은 바 있다.



 

오는 12일 개막식과 함께 첫무대를 장식할 팀은 밀양영화고등학교다. 작품명은 , 소금에 찍어먹다’. 재혼한 엄마와 남자친구랑 별 탈 없이 잘 살고 있는 연수네. 하지만 자폐증을 앓고 있는 오빠 희주로 말미암아 행복하다 여겼던 생활에 갈등이 생기고 만다. 장애인이 남일 때와 남이 아닐 때의 인식은 다른가 보다. 장애인에 대한 인식 변화는 지금 시대의 화두이기도 하다.

 

13일엔 거제고등학교 팀이 남매를 공연한다. 시를 쓴다며 사라진 아버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삼순이, 그리고 하나뿐인 동생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난생 처음 시를 쓰겠다는 오빠 삼식이. 연극은 이들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과 만남과 이별, 그리고 일상에서 잠시 잊혔던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14일 작품은 통영 동원고등학교의 방과 후 앨리스. 앨리스는 고현과 남열이 운영하는 청소년 고민상담소다. 어느 날 미피와 두휘, 지은, 희모가 고민을 잔뜩 안고 들어와 차례대로 풀어놓는데. 청소년들의 이 말 못할 고민은 무엇일까.

 

15일에는 김해 상방고등학교가 꿈을 꾸다, 꿈을 쓰다라는 제목으로 청소년들의 꿈과 현실을 다룬다. 주인공은 시인이 되는 게 꿈이다. 하지만 진로는 현실에 따른다. 대기업 인턴으로 들어가지만 일이 자신의 성격과 맞지 않아 괴롭다. 결국 회사에서 쫓겨나고 다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한다. 원하는 꿈의 실현을 위해 살아갈 순 없을까. 청소년들의 발등에 떨어진 고민을 담았다.

 

16일 공연 팀은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다. 제목은 익숙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다.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문열의 동명 소설을 닮았다. 절대 권력의 허구성, 그리고 부조리한 현실에 순응하는 소시민적 근성. 이러한 여건에서 작품은 학생들이 사회 변화에 적극 참여하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17일은 마지막 팀 공연과 폐막식이 있는 날이다. 마지막 참가작은 합천 원경고등학교의 우리읍내. 텅 빈 무대, 이것만으로도 작품이 전통사실주의 극이 아니란 점을 암시한다. 배우들은 상징적 표현을 담은 마임을 통해 관객에게 끊임없이 극 속으로 빨려들지 않도록 결계를 친다. 관객이 극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작품은 이러한 기법을 통해 하루하루의 중요성을 애기하고자 한다.

 

폐막 및 시상식은 공연이 끝남과 함께 같은 장소에서 진행된다. ‘청소년들의 포동포동한 끼로 도도하고 당당한 세상을 만들자는 이번 대회 슬로건처럼 청소년들의 거침없는 열정이 마음껏 자유롭게 펼쳐지길 기대한다. 이번 행사에 경상남도와 밀양시, 한국연극협회, 한국예총경남도연합회,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경남도교육청, 밀양교육지원청이 후원했다.

 

문의 : 010-6298-1228.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
336x280(권장), 300x250(권장), 250x250, 200x200 크기의 광고 코드만 넣을 수 있습니다.

연극을 다시 시작하면서 경남의 초창기 연극은 어땠을까 궁금했다. 15년 전쯤 월간지 한국연극처럼 경남연극이 발행되기도 했기에 뒤져볼까 하다가 먼저 <경남도민일보>에 한동안 연재됐던 한하균 선생의 '오동동야화'가 떠올랐다.


그런데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봐도 선생의 글이 나오지 않았다. 인터넷 사이트가 개편되면서 이전의 많은 기사들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란 게 참. 찾고자 하는 게 없다 보니 더 찾게 되더라고. 전산부에 물어보니 다행히 과거 신문을 PDF판으로 제작해 놓은 게 있다고 했다.


2000년 6월 7일부터 매주 수요일 연재를 했기에 자료는 어렵지 않게 뽑아낼 수 있었다.2001년 2월 28일 건강 악화로 연재를 중단할 때까지 36편이 나왔다. 지금부터 마산의 연극사를 되짚어본다 생각하고 베껴쓰볼까 싶다. 중간중간 경남연극협회에서 발행한 <경남연극사> 자료도 참고하고 예전에 발행되었던 <경남연극>도 참고하면서...


참고로 베껴쓴 '오동동 야화'는 경남도민일보의 콘텐츠임을 밝힌다.




한하균의 오동동 야화 - 내가 만난 연극인들

1. 이광래 선생과의 인연


내가 합포성에 입성한지도 어언 반세기가 거의 다 되어 간다. 그동안 참 많이도 바뀌었다. 어떤 것은 사위다 못해 사라져가고 있는 중이고 어떤 경우는 깡그리 없어져버리기도 했다.


지금 오동동 거리에 나서서 "목발 김형윤 선생을 아는가? 아니, 영화배우 이수련 씨를 아는가?" 하고 묻는다면 아마 여에 아홉 사람은 모른다고 할 것이다. 그만큼 변한 것이다.


우리는 어제의 마산을 너무도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나는 내가 관여한 연극을 통해서, 또 연극계 대 선배 세 분의 활동을 거울삼아, 예술을 위한 순수한 정열과 낭만과 또 좌절감에서 빚어지는 절망의 몸부림과 아우성을 가능한한 생생하게 전달, 당시 사회상의 일단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원술랑> 상연극장 앞 운명의 만남


내가 온재 이광래 선생을 처음으로 뵌 것은 민족상잔의 비극인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4월 29일이다. 이날은 대한민국 국립국장이 창설되고 그 개관 기념프로로 유치진 원작 이화삼·허석(남실) 공동 연출의 '원술랑'을 보기 위해서 국립극장(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의 일부가 된 구 부민관 자리) 앞에서 입장하려고 바둥거리고 있을 때였다.


표를 사려는 인파가 한 줄은 광화문 네거리까지, 또 한 줄은 덕수궁까지 뻗쳐 있어 극장 안은 초만원이었다. 그야말로 인산인해였다. 이런 판국에 입장권도 구하지 못한 내가 국립극장에 입장하려고 덤볐으니 반세기가 지난 지금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어이없는 일이다.


오직 향리(통영)에서 청마 선생님의 말씀만 금과옥조로 믿고 무작정 상경했으니 말이다. 청마 선생님의 말씀은 "동랑 형님께 편지로 말씀드렸으니 용산 갈월동 형님 댁으로 가보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갈월동 동랑 유치진 선생 댁으로 찾아뵈었더니 내외분 모두 외출 중이시고(아마 두 분 다 국립극장 개관 때문에 그즈음 무척 바빴을 것이다) 득현(동랑의 장남. 현 서울예술전문대학 재단 이사장. 당시는 중학생) 씨가 말하기를 "극장 현관에 가면 김상호 씨가 있을 테니 그분께 말하면 입장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척이 천리라고 극장 현관문이 저만치 빤히 보이는 거리였지만 하도 사람이 많아 오늘 저녁 입장이 가능할지 그것조차 의심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바로 내 앞에서 키가 조그마한 중년신사 한 분이 자꾸만 팔뚝시계를 쳐다보면서(그 당시는 팔뚝시계가 요즘처럼 지천으로 많지 않았다) "이거 야단났는 걸"하고 중얼거리시는데 분명한 경상도 악센트가 아닌가. 그래서 그분보다는 거의 두 배(?)에 가깝게 키가 큰 내가 넉살좋게 그분께 말을 걸었다.


"선생님 혹시 고향이 경상도 아니십니까"하고 여쭈었더니 "내 고향은 마산이네 자네는?" "저는 토영(통영의 동음생략)입니다. 동랑 선생님이나 서남실 선생님을 뵈올까 하고." "그래 어찌 왔는가?" "원술랑 공연을 보기 위해서 불원천리 달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자네 혹시 동경학생예술좌(동경유학생들이 조직한 연극단체로 이해랑 김동원 이진순 씨 등도 같은 동인이었다) 출신의 김용기 씨를 아는가" "알다뿐이겠습니까? 제 스승이십니다." 


그리하여 온재 선생과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 것이다. 그 뒤에야 안 일이지만 그날의 공연 단체인 '신협'(신극협의회의 약칭 대표 유치진, 간사장 이광래)의 간사장을 맡고 계시던 <촌선생>의 극작가 이광래 선생이 바로 그분이셨던 것이다.


갑자기 이광래라는 인물에 대해 궁금해졌다. 오동동야화 2편에 그 만남 후속편이 나오나 싶었더니 아니다. 온재 선생이야기는 4편에서야 나온다. 그래서 손만 뻗으면 닿는 곳에 꽃혀 있는 <경남연극인물사1>을 꺼냈다. 한국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발간한 책이다. 77쪽에 이광래 선생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경상남도 마산 출신. 사회사업가 이상무의 아들이며 동요작가 이일래의 아우이다. 1928년 배재보통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학교를 거쳐 와세다대학 영문학과를 다녔으나 3학년 때 중퇴했다. 귀국 후에는 <조선일보> <중앙일보> 기자로 있었다.


1932년 마산 최초의 극단 <극예사>를 창단해 연극에 첫발을 디뎠다. 1934년에는 극단 <표현무대>를 창단해 <지하층의 미담>(1막)을 공연했으며 신파극단 <황금좌>에 입단해 전국은 물론 만주까지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1935년 서울 극예술연구회에 가입하였고 같은 해 희곡 <촌선생>(3막)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돼 극작가로 데뷔하였다.


일단 이정도. 이광래 선생이 동요 <산토끼> 작가 이일래의 동생이란 점에서 깜짝 놀란다. 창녕 산토끼 노래동산에 가면 이광래 선생에 대한 이야기도 접할 수 있겠다 싶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