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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시간이다. 한하균 선생의 연재가 어제의 그 시점에서 일정한 타임라인을 가지고 진행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여지없이 빗나갔다. 어제는 온재 이광래 선생이고 오늘은 화인 김수돈 선생이다. 한국문학을 한 사람이라면 한두 번쯤 들어봤음직한 이름 김수돈. 한하균 선생은 그와 어떤 인연을 맺었을까.
"자네, 청마 선생댁으로 앞장서게"
그뒤 6·25가 어지고 국립극장이 대구로 피란가고 '신협'이 공군본부 정훈감실에 소속되자 나도 신협 연구생으로 입단하게 되었고, 온재 선생과의 교분은 어느새 사제간의 정분으로 발전되었다.
그리하여 1950년대 초반부터 진주에서 열리는 영남예술제(지금의 개천예술제) 때마다 선생님을 모시게 되었고, 이후 1968년 운명하실 때까지 서울에서 혹은 마산에서 선생님과의 사이에서 여러가지 일을 겪은 것이다.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
두번 째로는 화인 김수돈 선생과의 만남이다. 1946년 늦가을이었다고 기억된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큰 아야, 전화가 안되네. 윤선(부둣가) 머리 고모님 댁에 좀 갔다 오이라"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얼마되지 않은 거리지만 귀찮기도 하고 그렇다고 감히 못 가겠다고 짜증도 못 부릴 형편이었다. 수동식 전화기를 자꾸 돌려 보았지만 아무리 돌려도 우체국 교환양은 어디로 갔는지 묵묵부답이었다.
그 무렵은 전화기 있는 집도 드물었지만 설사 있다해도 어찌된 영문인지 통화하기가 요즘처럼 쉽지 않았다. 부득이 부둣가로 걸어가는데 때마침 마산~통영 객선이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여보게 학생~." 나를 부르는 것 같아 돌아보니 키에 어울리지 않게 큰 미군 점퍼(당시는 미군 물자가 많이 유통되고 있었다)를 걸치고 머리는 봉두난발로 아무렇게나 뒤로 빗어 넘긴, 얼핏 보아 예술가임에 분명한 사나이(?)가 조그마한 보따리 하나를 아주 소중한 보물인 양 옆구리에 끼고 서 있지 않은가.
"저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가까이 갔더니 대뜸 "유치환 선생을 아시는가?" 하고 묻는 것이었다. "청마 선생님을 왜 찾으시는데요?" "옳아. 선생님 아호를 아는 것 보니까 제법 된 녀석이군. 자네 청마 선생님 댁으로 나를 안내해 주게."
그리하여 고모님 댁 심부름은 깜박 잊고 길 안내에 나선 것이었다. 그 이듬해 출판된 저 유명한 <소연가>라는 시집 원고가 그 소중한 보따리였고 그 시집의 서문을 받기 위하여 청마 선생님을 찾아오셨던 김수돈 선생님이 통영에 내리자마자 부둣가에서 이렇게 나와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 뒤로 통영에서 탄생한 '문인극회'(유치환 박재성 김용기 김상옥 김춘수 허창언 서성탄 황하수 정명윤 송두영 윤이상 정윤주 전혁림 등 지금 생각해 보아도 기라성 같은 멤버들이었다)가 마산의 '청년문학협회 마산지부'(김수돈 조향 등)의 초청을 받아 박재성 작 <호풍>, 이기영 작 <해방> 등의 레퍼토리로 공연하면서 화인 선생과의 사귐은 화인 선생 말씀대로 '수어지교'로 발전된 것이다.
그래서 부산에서 겪었던 둘만의 이야기, 내가 마산에 살면서 모셨던 가지가지 일들을 아가씨가 수를 놓는 정성으로 하나씩 엮어가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한하균 선생의 이야기에 덧붙여 <경남연극인물사1>에 실린 화인 선생의 이야기를 이어나가 보자.
(이 책은 김소정 연구와 강주성 보조연구로 연극협회 경남도지회가 발행했다.)
책 33쪽에 화인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시기(이 시기라 함은 광복이 되고 마산에서 온재(이광래)가 바로 극단 '민예'를 조직해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연극이 활기를 띠던 때를 이른다) 마산지역에서는 김수돈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1947년 창단된 '문인극회'에서 그는 <민족의 태양>(염주용 작)을 연출했다.
다음 해에 <동래성 함락의 날>(염주용 작)과 <무의도 기행>(함세덕 작), <낙화암>(함세덕 작), <견우직녀>(서항석 작), <단층>(김영수 작) 등을 연출하며 지역 연극계의 선도적인 역할을 맡았다.
한국전쟁 직후 1950년 9월 거주지를 부산에서 마산으로 옮긴 김수돈은 문총 마산지부에서 종합예술제를 개최했을 때, <군상>(서항석 작, 정진업 임향 복헤숙 김영옥 출연)을 연출하여 국제극장에서 공연했다.
1954년 6월에는 '청문극회' 창립공연으로 <구원의 곡>(이주홍 작)을 연출하기도 했다. 또한 그 무렵 그는 마산문화협의회의 사무국장을 맡으면서 향토연극운동의 전위대로서 극예술연구회(회장 김수돈 기획 강형순 총무 최익배)를 창립했다.
창립 기념공연으로 <닭의 의미>(오학영 작)를 강남극장에서 공연함으로써 전쟁으로 침체했던 마산연극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196년 7월 그는 예총 마산시지부 창립총회에서 부지부장에 피서되었고 12월에는 3·15기념회관 개관출하문화제 행사때 연극 <고래>(임희재 원작)의 기획 무대감독을 맡아 공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1963년 11월에는 연극 <태양의 아들>(진풍선 작 정진업 이백화 출연)을 연출해 3·15회관에서 공연하였다.
화인 김수돈에 대해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됐다. 시인이면서 연출가. 문학과 연극이 그렇게 가까운 사이라는 것.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