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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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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만일까. 진주성을 다시 찾은 것은 최소 못해도 5년은 된 것 같다. 당시엔 공북문을 수리하고 있었던 기억이 있는데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더랬다. 그래서 이번에 진주를 찾은 김에 공북문으로 입장했다.

 

공북문 입구에는 널찍한 주차장이 있다. 1시간에 1100원이다. 그 이상 주차요금은 10분당 200원씩 추가된다.

 

주차요금 때문에 은근히 마음이 급해진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었다. 어른은 2000원이고 유치원 다니는 아이는 무료입장했다.

 

예전에 친척에게서 진주성은 우리 가문이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는 얘길 들은 적이 있어서 매표소 일하는 분에게 툭 던지듯 물어보았다.

 

"예전에 진주 정가 은율공파는 무료입장한다는 얘길 들었는데 지금도 그런가요?" "다음엔 무료로 들여보내 줄게요."

 

공짜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아직 무료입장은 되는 모양이다. 이유는 진주성 안에 우리 가문 재실이 있기 때문이다. 재실에 일이 있어 간 게 아니니 무료입장하면 맞지 않다. 괜히 그랬다가 나 스스로 비겁해지는 느낌이 즐거움을 짓눌렀을 것이다.

 

공북문은 옛날 관찰사 감영과 경상 우병영이 있어서 진주성의 주요 통로로 사용된 문이란다.

 

문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한 바퀴 휘 돌 생각이었다. 맨 처음 눈에 띄는 것이 대포같이 생긴 무기다. 왜란 때 크게 활약한 무기라는데 이것이 어떤 방법으로 무기의 역할을 했을까 궁금했다.

 

일단 옆에 있는 제원을 살펴보았다. 이런 무기를 총통이라 한다. 진주성에는 3개 종류가 전시되어 있다.


천자총통, 길이는 130㎝이고 구경은 13㎝다. 발사물은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쓰고 사거리는 1킬로미터 하고 136미터를 더 날아간다.

천자총통보다 한 단계 아래 제원은 지자총통이다. 길이는 89.5㎝이고 구경은 9.6㎝다. 장군전 조란탄을 쓴다. 사거리는 1킬로미터에 9미터 더 날아간다.

또 맨 아래 제원인 현자총통은 길이 79㎝며 구경은 7.2㎝다. 차대전 조란탄을 쓰며 사거리는 지자총통과 같다.

 

 

 

 총통에 꽂아 쏘는 것은 대장군전 한자에서 보듯 화살이다. 화살을 이 대포같은 총통으로 쏜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화살이라면 시 하나에 한 명이 타깃인데 활에 비해 비용이 너무 많이 드는 것이 아닌가. 백과사전을 보니 이해가 되었다. 천자총통은 적 사살용이라기 보다 적 위협용이란다. 적이 총 공격! 하고 달려올 때 큼직한 화살이 발앞에 꽝하고 내리꽂히면 기겁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래서 이런 무기가 필요했었군.

 

 

총통 3형제를 지나 다음 본 것은 김시민장군 전공비다. 비석에 희미하게 글씨가 남아있었다. 모두가 한자로 쓰여 있으니 이해할 수가 있나 어디. 몇 개 글자 알아본다고 해도 해독은 불가능하다. 옆에 세워져있는 안내판이 반가운 이유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이 비는 임진왜란 3대첨의 하나인 진주성싸움을 승리로 이끈 주장(主將) 김시민 장군의 전공을 새긴 비이다.

 

당시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로서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과 함께 주도면밀한 작전을 펼쳐 왜적을 격퇴하였다.

 

비문에는 1000명 되지 않는 병력으로 10만 명의 군대를 물리쳤다고 했으나, 다른 기록에 는 3800명의 적은 병력으로 2만여 명의 왜적을 격퇴하고 진주성을 지킨 것으로 나타난다. 김시민 장군은 적은 군사로써 파죽지세로 몰려오던 왜적의 예기(銳氣)를 꺾고 승리를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영남에서 호남으로 나아가는 길목인 이곳 진주성을 사수함으로써 왜병의 호남진출을 봉쇄하여 임진왜란 초기에 우리 측에 불리했던 전세를 뒤집고 전열을 가다듬은 계기를 마련했다.

이 비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진주고울 백성들의 열망에 의해 광해군 11년(1619년) 7월에 세워졌는데, 성균관 진사 성여신이 글을 짓고 성균관 생원 한몽인이 글씨를 썼다."

 

김시민 장군 전공비 옆에는 촉석정충단비(矗石旌忠壇碑)가 있다. 글자로만 보아서는 무슨 말인지 가늠하기 어렵다. 촉석이면 돌덩이가 무수히 많다는 얘긴데... 어쨌든 안내판의 설명을 빌릴 수밖에 없다.

 

"이 비는 조선 선조 26년(1593년) 6월 19~29일에 있엇던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장렬하게 순국한 삼장사(三壯士) 김천일, 황진, 최경희 및 군관민의 영령을 제사하기 위해 세운 정충단의 비석이다.

 

임진왜란 초기에 왜적의 기습적 공격에 미처 전열을 정비하지 못한 우리는 한동안 육지의 전투에서 곤경에 처했었다. 그러나 우리 군대가 흐트러진 대오를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왜적을 제압하자, 수세에 몰린 적들은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 아군의 10배에 가까운 병력으로 일대 반격을 펼쳤으나 막대한 피해를 입고 패하여 물러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제1차 진주성싸움(1592년 10월 5~10일)이다.

 

그들은 이에 대한 보복전을 시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특명에 의해 가토 키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이 이끄는 왜군 최정예의 대군을 편성하여 2차로 진주성을 공격해왔다. 이때 삼장사를 중심으로 뭉친 진주성의 군관민은 압도적인 적세에 두려움 없이 맞서 전원이 순국하는 장렬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숙종 12년(1686년)에 나라를 위해 충절을 다한 이들을 위해 촉석루 동쪽에 정충단을 세운 것이다."

 

 

지금까지 진주성을 네 번 정도 찾았을 것이다. 어릴 땐 어른들을 따라 왔을 것인데 기억나는 장면이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학교 다닐 때 한 번, 아버지 칠순 때 한 번, 사오년 전 아내와 왔다. 그런데 아내는 기억이 별로 안 난다고 하는데... 이룬. 의심받기 시작했다. 억울하다.

 

아내는 하이힐을 신었다 얼마 걷지 못하고 앉아 쉰다. 이런 여행이 별로 달갑지 않은 모양이다. 훗날 다시 진주성을 찾아 전에 왔던 거 기억나지? 하고 물으면 아마도 같은 눈썹을 하고선 "어떤 여자랑 왔어?"하고 의심할 것이 틀림없다.

 

이날 진주성을 찾은 것은 말하자면 겸사겸사 세트코스다. 극단 현장이 마련한 '뿌왕뿌왕 할머니와 꼬방 고양이'를 보려고 창원에서 진주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서운하므로 진주성을 찾은 것이다.

 

 

마침 이날 무형문화재 등 공연 행사를 하는 날이었다. 촉석루에 대형 스피거를 설치한 것을 보니 촉석루에서 진행될 모양이다. 두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우리가 여유만 있었더라면 보았을 터인데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하지만 또 다른 일정이 있으니 내려왔다.

 

 

막내 지원이가 성밖의 모습을 궁금해 해다. 몰랐을 터인데 내가 성벽 위로 내려다보니 저도 보게 해달라고 급호기심을 표출하는 바람에 성벽에 올려줬다. "우와!" 아이의 감탄사 하나로 이곳 정경이 설명될 듯하다.

 

 

촉석루는 경상남도가 지정한 문화재자료다. 문화재자료 8호로 나와있다. 엥, 도 문화재가 아니라 문화재자료? 촉석루만큼 유명한 누각이 문화재에 포함 안 됐다는 게 의아스러웠다. 한편으론 문화재가 아니니 누구나 올라가서 쉬기도 할 수 있구나 싶기도 하다. 오히려 더 잘된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밀양의 영남루처럼 말이다.

 

 

촉석루에선 괜찮은 장이 많이 나온다. 기념으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마룻바닥이 상당히 오래된 것 같다. 조심조심 걸으면서 드는 생각이 '이런 델 아이들이 후다닥 뛰어놀기도 하게 어찌 개방해 놓았을까'하는 거였다.

 

 

촉석루를 나왔다. 이정표가 여러 곳을 가리키고 있다. 어디로 갈까. 의암은 지난 번에 봤으니 통과(아내는 기억이 안난다고 하는데, 허걱! 기억났다. 함께 온 사람이 아내가 아니다. 이룬.)하고 내가 안 가본 영남포정사 쪽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아이가 꽃을 보고 탐을 낸다. 요즘 막내의 취미는 꽃을 꺾어 손에 드는 것이다. 아마 반나절은 손에 쥐고 있을 것이다. "지원아, 그냥 가자."

 

 

엥, 쌍충사적비 맞은 편 쪽에 어떤 할아버지가 생리현상을 해소하고 있었다. 할배, 주책이우. 하며 생각했는데 정작 진주성 한바퀴를 돌면서 성내에 화장실을 본 기억이 없다. 그랬다. 진주성 안에는 화장실이 없다. 왜일까? 간혹 만나는 화장실 안내문을 보면 정문 밖과 공북문 밖에 있으니 이용하라는 내용이다. 할아버지의 노상방뇨를 무조건 나무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쌍충각을 들여다봤다. 아마 진주성 안에서도 이곳만큼 인기가 없는 곳은 없을 것이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다. 지나가다 그냥 슬쩍 들여다보는 게 전부일 것이다. 딱 그런 분위기 속에 있었다.

 

촉석루는 문화재자료여도 쌍충비는 도 유형문화재 제3호다. 안내문에 이렇게 적혀있다.

 

"이 비에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아 싸우다가 전사한 제말장군과 그의 조카 제홍록의 공을 새겼다.

 

제말장군은 지이록에 경상도 고성사람으로 의병을 모아 활약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웅천, 김해,의령 등지에서 왜적과 싸워서 전공을 세워 곽재우 장군과 함게 그 공적이 조정에 알려져 성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성주싸움에서 전사했다.

 

조카 제홍록은 숙부를 따르 공을 세운 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있다가 정유재란 때 전사하였다.

 

정조 16년(1792년) 때 왕은 이들의 충의를 기리어 이조판서 서유린에 명하여 비문을 지어 쌍충각을 촉석루 옆에 세웠다.

 

일제 때 일본관헌들에 의해 비각이 헐리고 비가 방치되었던 것을 1961년 지금 자리에 다시 옮겨 세웠다.

 

 

진주성내에 우물을 복원하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아, 우물도 문화재구나. 이런 문화재를 애초 진주성 조성할 땐 왜 파묻었을까? 이제 와서 복원한다고... 그런데 복원이야, 발굴이야. 공사장에 붙여놓은 펼침막 글이 헷갈린다. 복원하는 것도 발굴이란 표현을 쓰는구나.

 

 

우물 복원현장을 지나 영남포정사 쪽으로 향했다. 기울어진 길을 타고 올라갔다. 땀이 속옷을 적신다. 많이 걸었다. 막내가 쪼르르 올라가더니 갑자기 겁먹은 표정을 짓는다.

 

 

손도 만져보고 옷도 만져보고 하더니 하는 말. "엄마, 아빠! 저 아저씨 몸이 딱딱해요." "하하하!" 아이는 정말 사람인줄 알았나보다.

 

 

비석군을 지나면서 궁금증이 생겼다. 모양이 참 다양하다. 갓을 쓴 비석도 있고 용문양을 한 것과 꽃문양을 한 것 등 문양마다 다른 기준이 있는 것일까.

 

 

비석의 머리에는 문야에 따라 이수(용이나 이무기 모양), 하엽(연꽃문양과 보석), 관석(구름과 꽃잎, 해와 달), 그리고 팔작지붕을 얹은 것은 개석이라고 한단다. 따라서, 위의 사진에 나타난 문양은 이수다.

 

 

진주성 안에 전설을 담은 돌무더기가 있다. 용다리전설이다. 용다리 전설을 잠시 감상해볼까. "지금의 동성동 삼성화재 부근에는 예전에 용머리가 양쪽으로 붙어있는 돌다리가 하나 있었는데 이 용다리에는 슬픈 사랑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때는 고려 초 진주의 한 마을 군수 이씨에게 딸이 셋 있었다. 그중 둘째 딸은 불행히도 출가하자마자 남편이 죽어 친정으로 돌아와 지내고 있었다.

 

군수의 집 머슴 돌쇠는 이때부터 아씨를 사모하게 되었고 아씨 역시 돌쇠의 성실하고 충직한 모습에 마음이 끌리게 되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로 인해 서로는 벙어리 냉가슴 앓듯 했으며 둘의 사랑은 이루어질 수가 없었다.

 

그러다 이씨는 상사병으로 그만 목숨을 잃게 되었고 돌쇠는 아씨를 장사지내러 가는 도중 용다리 위에서 무심결에 도랑물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마치 죽은 아씨처럼 보여 "아씨!" 하고 소리치다 그만 미쳐버리고 말았다.

 

이후 이 군수는 딸을 잃은 이곳을 떠나려고 막 용다리를 건너가고 있는데 뒤따라 오던 돌쇠가 보이지 않아 주변을 찾아보니 이미 돌쇠는 다리 옆 고목에서 목을 맨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조용하던 용다리 밑 개천에서 수천마리나 될 듯한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려왔는데 이는 마치 죽은 돌쇠가 우는 소리와 같았다. 그뒤부터 용다리 밑에는 진주에서 개구리가 가장 많이 모여 울게 되었다.

 

짝을 지은 남녀나 부부가 지나가면 울음이 끊겼으며 상사병에 걸린 사람이 용다리를 두번 왔다갔다 하면 씻은 듯이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돌쇠가 이루지 못한 사랑을 남에게라도 이루는 돌쇠의 지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6.25전까지 돌쇠가 목매어 죽은 고목에 아들을 원하던 사람들은 한식에 한번씩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지금은 용다리의 흔적만이 진주성 안에 남아있다.

 

 

한 바퀴 도는 데 한 시간 걸렸다. 물론 박물관까지 가지는 않았다. 그러려면 뒤에 이어질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 아쉽지만 공북문으로 나와야 했다. 나오면서 다시 만난 김시민 장군의 모습. 근데 누굴 향해서 손가락질하는 모습이 위엄은 있어보이나 왜 이런 자세를 취했는지 알 수가 없다.

 

누군가를 호통치는 모습인데 이것이 김시민 장군의 대표할 만한 모습일까 싶기도 하다. 적을 앞에 둔 상황이라면 칼을 뽑아야 더 적절한 것 같은데... 글쎄. 아무 생각 없이 일률적으로 디자인한 것은 아닐까 싶다. 온화한 모습의 장군은 없는 것일까.

 

 

괜한 짓한 걸까. 팔을 벌린 모습이 이렇게 어색할 수 없다. 생각만큼 좋은 장면이 나오질 않네. ㅠㅠ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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