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게차 기사 생활 9개월을 마감하면서
작년 5월 지게차 공부를 처음 시작하면서 나머지 인생을 채워줄 직업이라 굳게 믿었더랬다. 그래서 엄청시리 열심히 공부했다. 이론 1개월 공부하고선 시험에서 95점을 받았다. 실기공부도 열심히 했다. 시험에서 82점을 받았다. 높은 점수는 아닌 것 같아도 함께 시험친 동무들 중에선 최고 점수였다. 그렇게 시작은 좋았다. 자격증을 취득하고선 취업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나이 든 초보에겐 재취업의 기회를 주는 곳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전직 언론인 출신이란 게 채용자들에겐 부담이 된 듯도 했다.
한 달 가까이 취업이 안 돼 속을 끓이던 중 학원에서 가보라고 한 곳이 지금 다니고 있는 함안 칠서에 있는 '매일중기'다. 신문사에 있을 때보다 훨씬 많을 월급을 생각하면서 기대를 한껏 보듬고 일을 시작했다. 처음엔 여느 초보들이 그렇듯 기초생활비에도 못미치는 돈으로 생활을 해야 했다. 130만원. 차량을 운행해야 했으므로 한달에 20만원의 유류비는 도저히 아낄 수 없는 지출항목이었고, 쥐꼬리보다도 적은 월급에서도 국민연금, 건강보험, 근소세... 뗄 것 떼고 나니 한 달에 우리 다섯 식구가 순수하게 운용할 수 있는 예산은 100만 원에 불과했다.
그래도 수습이 끝나면 30퍼센트 더해서 180은 될 것이라 기대했다. 3개월이 지나고 4개월째, 회사는 내 통장에 여전히 130만 원을 꽂아주었다. 수습기간이 끝났음에도 임금변화가 없다는 것은 약속 불이행이다. 그 며칠 후 사장과 면담을 했다. 사장 왈, "깜빡했습니다." 말 안 했으면 그냥 지나쳤을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처음으로 사장에 대한 불만이 싹텄다.
어차피 남은 인생의 대부분을 이 직장에서 뿌리내릴 거라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이해하려 했다. 깜빡할 수도 있겠지. 그런데 임금을 어느 정도 인상할 건가에 대해 사장의 대답이 기대 이하다. 이유를 먼저 설명했다. "요즘 경기가 영 안 좋아서 월대 들어간 차들이 많이 빠져 회사 사정이 영 여의치 않아 많이 못 준다"는 것이다. 한마디 더 붙인다. "가족이 많은 정 기사님 생각하면 더 드려야 되는데 안타깝습니다." 뭐 어쩔 수 없다고 자위했다. 조금만 더 참자고. 다음 번 인상 때엔 괜찮아지겠지.
내가 일하는 곳은 삼성중공업 칠서공장 엘엔지 족장 적치장이다. 회사는 그곳에 기사와 7톤짜리 지게차를 투입해 월 380만 원을 받는다. 거기서 기사 임금으로 월 150만 원 빼고 지게차 감가상각비를 얼마 제한다고 하더라도 220만 원은 순수익으로 회사에 들어간다.
지난 4월 12일에 받은 3월 임금부터 금액이 조정됐다. 올해들면서 경기도 좀 풀렸다. 지게차 기사들을 두어 명 더 뽑아야 할 만큼 일도 늘었다. 그래서 기대를 잔뜩했다. 아마 너무 잔뜩해서 실망이 컸을 것이다. 10만 원 올랐다. 160만 원. 그동안 지게차 청소를 하면서 추가로 벌어들인 3만 원이 이젠 없어졌으므로 실제로 오른 임금은 7만 원이다. 그래도 생활이 안 된다. 기름값도 올랐지. 차도 이젠 20만 킬로 넘게 달렸으니 밥도 많이 먹는다. 기름만 많이 먹는 게 아니라 엔진오일도 퍼먹어서 이래저래 돈 달라는 소리가 아우성이다.
그래, 우리 다섯 식구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외식을 하고, 학교 다니는 아이들 참고서라도 한 권씩 더 사고, 막내 어린이집 교재비 안 밀리고 줄 수 있으려면 최소한 180만 원은 되어야 했다. 사장은 그렇게 줄 수 없다 한다. 왜냐면 내 실력이 그만큼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장이 내 실력을 측정한 것은 내게 "정 기사님, 바깥에서 일할 수 있겠어요?"하고 묻는 말에 "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내가 겸손하지 못한 말일 것입니다."로 답한 것에 대한 판단이다.
사장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한 달에 두세 번 결근하기도 하고 툭하면 이유 없이 잠수 타는 사람이나 지금껏 한 번도 결근하지 않고 사고도 한 번도 내지 않고 열심히 안전하게 일한 나나 평가가 똑같다는 게 은근히 기분 나빴다. 따지고 보면 실력이 좋은 사람도 한 달에 벌어들이는 금액이 일정하고 나 역시 월대로 들어가 있으니 매월 일정 금액의 수익을 내는 것 아닌가. 내가 실력이 없다고 해서 수익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사장님, 아무래도 이번 달 말까지만 하고 더 일을 못할 것 같습니다."
"정 기사님,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했습니까?"
"사나흘 됐지요.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느낀 것은 벌써 몇 달 됐고요."
"제가 한 말씀 드릴게요. 제가 그래서 초보는 쓰지 않는다...."
"그 말씀은 전에도 사장님이 여러 번 하셨습니다. 물론 저도 여러 번 지금의 임금으론 생활이 벅차다는 말씀을 드렸고요."
사장은 내가 임금을 더 올려다라는 직설법을 쓰지 않았음에도 돈은 더 못 올려준다는 사실에 못을 박았다. 그래서 예전에 다니던 신문사에서 프리랜서 활동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아 아주 조금이라도 지금보다는 생활이 나아질 것이란 설명을 덧붙였다. 솔직히 임금을 180정도라도 책정해주겠단 결정을 내비쳤어도 갈등을 했을 수 있다. 내가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엔 앞으로 1년의 공백이 있기 때문에.
내가 지게차 기사로서 회사에서 별 필요치 않은 사람이란 걸 느끼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사장은 한참을 나에게 응시를 했지만 나는 순간적으로 이 사람이 나를 오랫동안 필요로 하는 사람이 아니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역시 이 사장은 내가 나머지 인생을 충성할 주군으로 모시기엔 그릇이 너무 작은 사람이란 것도 오래 전부터 느껴왔던 것이기에 미련을 유지하는데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제 남은 시간은 2주다. 월화수목금토, 월화수목금. 예전 신문사를 그만 둘 때 무덤덤했던 기분. 매일 매일 정신없이 작업하고 녹초가 되어 집에 들어가던 잔여일. 아마도 앞으로의 2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지난주까지 하루 열두 대씩 하차한 자재들을 종류별로 정리하고 따로 칠서공장 측에서 주문했던 벽돌 정리까지 1주일 꼬박 채우고 나머지 1주는 후임자에게 인계하다 보면 금세 4월 끝자락에 도달할 것이다.
인생을 물길로 치면 지금쯤 중류에서 하류에 접어든 순간이다. 하류에선 멀리 물길이 훤히 보이고 종착점인 바다에 언제쯤 도착할 거란 것도 감 잡을 수 있으니 지천명이라 하지 않았겠나. 지천명이 얼마 남지 않은 내 나이에 샛강을 거쳐 다시 원래의 물길로 궤도를 잡았으니 나머지 인생은 더욱 알차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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