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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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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4 04:20

지난해 여름 지운 한하균 선생이 경남도민일보에 연재했던 '오동동 야화'를 이 블로그를 통해 연재했다. 이광래, 정진업, 김수돈 선생들의 삶의 궤적을 소개하며 경남연극사를 담았었다. 


오늘 경남연극의 수많은 기록을 남긴 한하균 선생의 귀천 소식을 접하고 잠시 그분을 생각하며 2014년에 발행한 <경남연극 인물사1>에 실린 '지운 한하균론'를 발췌해 소개한다. 많은 사람이 그분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지운 한하균 /경남도민일보 제공


지운(志雲) 한하균론 1

 

이 글은 경남연극협회에서 2014<경남연극 인물사1>을 발간하면서 채록한 기록물이다.

 

경남연극사에서 근대 연극을 정착·발전시킨 인물을 꼽으라면 온재 이광래, 월초 정진업, 화인 김수돈과 함께 지운(志雲) 한하균을 들 수 있다.

 

앞의 세 사람이 문학과 함께 지역의 연극 운동을 이끌었거나 지역을 벗어나 대외적으로 연극 활동을 했다면, 한하균은 대부분을 경남지역에서 오로지 생애를 경남의 연극발전을 위해 애쓴 분이라 하겠다. 그 자체가 경남연극의 역사라 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궤적을 남겼고 경남연극의 산맥이라 할 만큼 많은 연극인들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

 

유치진, 김춘수, 김용기 등과의 만남이 그렇고, 주평과의 만남이 그러하며, 정진업·김수돈과의 만남이 그렇고, 후진 이상용·이종일과의 만남이 그러하다.

 

그의 1970년대까지 꾸준한 연출활동은 그동안 동호인 모임에 다름없었던 경남연극계를 전문화로의 길로 포문을 뚫어줬던 것이다.

 

I. 성장과 연극의 시작

 

지운(志雲) 한하균은 1932년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 면 하노대리 38번지 대유(大有) 한영주(韓永周), 어머니 강맹수(强猛守) 사이에 태어났다 아버지 한영주는 장가를 가 31살이 되도록 후사가 없자 면장의 권유로 없는 자식을 호적에 올렸는데 그해가 1931년이었다.

 

다행히 그 이듬해 그가 탄생한다. 그래서 310110로 시작하는 그의 호적상과의 기록과 다르게 1932628일이 그가 출생한 날이다.

 

그는 통영에서 자라 통영초등학교를 거쳐 통영중학교에 들어간다. 통영중학교 시절은 그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는데 시인 김춘수, 동경예술좌 출신인 김용기, 동랑 유치진 세 분과의 만남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방 되던 해, 시인 김춘수가 통영초등학교에 국어교사로 부임해 오고 그 다음해 1946, 한하균이 4학년이 되던 해 김춘수 연출 <조국>에 조연출로 학예제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그때의 학제는 지금과는 다르다. 해방 전 중학교는 6년제로 지금의 중학교와 고등학 교가 합친 꼴이 었다.)

 

골마루를 지나는데 내를 불러 한 군. 이리로 오라고·자네 연극하라고 난 연극 모른다고 안하려 했는데, 선생님이시잖아. 결국 명령에 못 이겨서 따라갔지. <조국>이라는 유치진 작품이 있어, 김춘수 선생님이 <조국>을 연출하실 때, 내가 조연출을 한기라. 말이 조연출이지 바로 심부름꾼이라. 말로 하자면, 이것 구해오라면 이것 구해오고, 저것 구해오라면 저것 구해오고 이름만 조연출이더라고. 그때 연극을 처음으로 접했는데, 이거 보니까 정말 대단한 기야. 이거 소년기에 해볼만한 거더라고.”

 

이 때, 후에 아동극 문학가가 된 주평 역시 동급생으로 <조국>에 배우로 참여했다. 이후 김춘수는 그해 말 마산중학교로 전근을 가버리면서 그에게는 큰 아쉬움을 남긴다.

 

김춘수를 대신해서 온 국어교사가 바로 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김용기다. 5학년 때 김용기의 연출로 <동승><이차돈의 사>에 배우로 출연하게 되면서 연극에 큰 매력을 느끼게 된다.

 

일본 측지소극장 출신의 김용기 선생이 국어선생님으로 오신기라. 일본 축지소극장은 일본 신극운동의 요람지라. 한국 사람이 축지소극장에 들어가기도 힘들어. 이분이 처음으로 우리 학교에 오셔가지고 학예회 연극을 맡았는데 작품이 함세덕 작 <동승>이었어. 거기에 동승, 아이중으로 나오는 친구가 서정화였어. 나중에 내무장관 했어. 또 거기 노티보이로 나오는 사람이, 그러니까 내 아들, 인수 역으로 나오는 사람이 정혜령이었어. 정혜령이는 단장까지 한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노역을 맡았는데 그 때부터서 본격적으로 연극 공부를 한기야. 내 아들인수가 정혜령이지. 어찌나 동승을 놀리던지, 노티브이 짓을 하던지. 내가 그 때 느끼기로 아, 인생은 고독한 사람도 있고, 장난꾸러기도 있고, 순박한 농부도 있고,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깨달은 거야. <동승>에서, 그래서 연극에 대한 관심이 더욱 깊어졌지.”

 

그러나 더 중요한 사건은 그가 연극인생을 살게 된 계기가 이때부터 시자되기 때문이다. 바로 동랑 유치진을 만났기 때문이다. 당시 선조 제사를 모시고자 잠시 통영을 방문한 유치진이 우연히 그가 출연한 연극을 본 것이다.

 

연극이 끝난 후 분장실에 갔는데, 유치진 선생이 기다리고 있더라고 그런데 그 분이 자네는 연극해도 되겠어, 연극해!’ 하며 어께를 툭 치는 것 아니겠어. 당시 친구들답지 않게 키가 크고, 훤칠한 편이어서 그런지 몰라도 좋게 봐주셨나봐.”

 

통영중학교를 수료한 그는 1950년 동국대학교 국문과 예과에 진학한다. 그러나 입학 20일만에 한국전쟁이 발발해 다시 통영으로 돌아오고 만다.

 


2. 연극인으로서 기반 다지기

 

다시 유치 진과의 인연이 이어졌다. 이듬해 유치진의 도움으로 신극협의회’(이하 신협) 연구생으로 들어간 것이다. 연극에 대한 열망이 가득찬 그에게는 둘도 없는 좋은 기회였고 경험이었다. 당시 신협에는 이해랑이 연출가로 있었고, 김동원, 박상익, 최은희, 황정순 등이 이름을 날리던 시기였다. 한하균은 신협에 들어간 것이 자기 일생에서 가장 잘 한 일 중 하나라고 회고한다.

 

한하균은 신협에서 활동을 하면서도 고향을 잊지 않고 어떻게 하면 통영연극을 발전시킬 수 있을까를 늘 고민했다. 통영을 오가며 선생은 통영의 주평, 정창수, 정도수, 김봉환 등과 함께 연극동호인을 구성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립극장 연출부장 허석이 3년간 통영에 체류했는데 국립극장 미술부장으로 있던 강성범을 초청해 통영의 젊고 패기 넘치는 연극동호인과 <뇌우>를 무대에 올렸다.

 

그는 주평, 김봉한과 함께 배우로 출연했다. 극중에 지역 연극 사상 처음으로 키스하는 장면이 나와 교사였던 그가 파면의 위기까지 몰린 역사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다음해인 1954년 그는 1951년 신협에서 공연한 싸르트르 작 <붉은 장갑>을 연출해 공연했는데, 소설가 박경리 가 피난 시절이었는데도 싸르트르의 <붉은 장갑>을 공연할 때 극장 안이 빽빽했다”<한산신문> 307)고 술회할 정도로 흥행뿐만 아니라 연극적으로도 성공한 작품이었다.

 

이후 1955년에 <수난보>(조흔파 작), <반역자>(김영수 작), <햄릿>(셰익스피어 작), 1956년에 <산비둘기>(박재성 작), <혈맥>(김영수 작), <원술랑>(유치진 작)을 연출했다. 1957년에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전근을 가게 되었지만 여전히 통영에서 <역마을 소년>(주평 작)을 연출했고 이 작품으로 전국아동극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는다. 그해 <토막>(유치진 작), 1958<무덤 없는 사자(死者)>(사르트르 작), <전유화(戰有花)>(한로단 작), 1959년에 <눈 먼 동생>(슈네츠라 작), <통곡>(임희재 작)을 무대에 올린다. 몇 년간 통영에서 공연한 작품이 무려 16개에 이른다.

 

그는 통영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교사가 부족한 모교에서 그를 부른 것이다. 그 몇 년 후 그는 인생의 오점을 남기게 되는데, 대학 은사였던 무애(无涯) 양주동 박사가 뜻밖에도 자네 육군사관학교에 (교수로)가 볼 생각 없나?”며 제안 아닌 제안을 한 것이다.

 

그때 그는 덜컥 아이고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양 교수는 육군 사관학교에 추천장을 써주고, 지인을 통해 일을 다 되도록 꾸며 놓았다. 그러나 군 수뇌부의 고위 인사가 자신의 후배를 추천해 그는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 일로 20일 넘게 결근을 한 그는 당장 교사직을 내놓아야 하는 상황에 몰렸지만 당시 금수현(지휘자 금난새 아버지) 교장의 특별 재가로 교사직을 잇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 금 교장은 그에게 교사직을 잇는 대신 수업경진대회 경남대회에 통영 대표로 나갈 것을 명한다. 그런데 덜컥 1등을 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교사들의 로망이었던 부산으로 발령이 난다. 당시 통영과 같은 한지에서 대도시 부산으로의 발령은 돈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육청은 그를 돈 없이도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본보기로 삼았다. 그렇게 그는 1957년 부산공업고등학교로 전근, 소속은 경무청, 근무는 경남여자고등학교에서 하는 특전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달랐다. 고향 통영을 떠나는 일은 좌천과 다름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산에서의 생활은 또 다른 재미가 있었다. 그는 부산 남포동 입구 선술집 대학촌을 자주 찾았는데, 시인 천상병, 동시작가 최계락. 하인두는 물론,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인연도 그곳에서 이뤄 시인과의 재밌는 일화가 있다.

 

하루는 내가 하인두 강파을, 이인영 등 시인과 화인들하고 이야기를 하다가 김춘수 선생 이야기를 했어. 그런데 옆에서 벼락같은 고함 소리가 들리는 거야. ‘당신이 뭔데 김춘수 선생 얘기를 하느냐이거야. 보니까 생면부지의 사람이라 그래서 내가 하인두 보고 저 사람 누고 하니 시인 천상병이라는 거야. 화를 내기 이전에 반가움이 먼저 오데. 그래서 당신은 김춘수 선생 추천으로 문예지에 추천을 받았다고 모시는지 몰라도, 내는 중학교 4학년부터 6학년까지 모셨던 은사요 내가 왜 말을 못한다는 말이요라 했지, 그거를 계기로 상병이하고 친구가 됐어. 그만큼 상병이는 순수했어. 머리는 날카롭게 돌아가면서도 참 순수했어.”

 

1960년대 초, 한하균은 서울로 향한다. 그는 통영에서 성장하고 자신과 젊은 연극의 열정을 함께 나눈 아동극작가 주평이 만든 아동극단 새들과 성인극단 오월극단에서 상임연출로 활동하게 된다. 이때 만든 작품이 <피노키오>(클로디 작), <별주부전>(주평 작), <숲 속의 공주>(주평 작), <에스텔>(라시느 작), <아타리아>(라시느 작) 등이다.

 

이 작품을 함께 한 배우로 임동진, 안성기, 전영록 등이 있다. 네 작품은 명동 국립극장 무대에서 공연됐다. 서울에서도 역시 여러 예술인들과 어울리고 대화했다. 연극 공연이 끝나면 탤런트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은성이라는 술집에 모여 합평회를 가졌는데, 가게의 터줏대감이자 명동백작이라 불렸던 소설가 이봉구는 말할 것도 없고 유치진과 이해랑이 주석을 같이 하고 모더니스트 시인 박인환, 작가 전혜린, 문둥이 시인 한하운, 극작가 김강주 등이 합평회에 참석해 의견을 나눴다.

 

틈만 나면 명동극장 앞 선술집 은성에서 합평회를 했어,'은성은 배우 최불암 씨의 어머니 이 여사가 운영하는 가게였지. 여기서 유치진 이해랑 소설가 이봉구, 시인 박인환, 작가 전혜린, 문둥이 시인 한하운 등과 이야기를 나눴지.”

 

특히, 한하운 시인과는 이름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자주 어울렸는데, 한센병에 대한 편견으로 평소 아무에게도 악수를 않는 한하운 시인은 유독 그 하고만 악수를 나눌 정도였다.

 

연극인이든 문학인이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른 장르에 있는 사람들과 많이 만나고 교류를 해야 자신의 예술적 깊이를 더 할 수 있었어, 내 인생에 그때가 가장 좋은 날이었어.”


 

3. 마산에서의 활동

 

1961년 화인 김수돈으로부터 급박한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때 부산 경남여자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부산으로 시외 전화가 걸려올 만큼 사태가 심각했다. 전화를 받고 급히 마산으로 내려온 그는 졸지에 갈등의 한 가운데 놓이게 된다. 이즈음 해서는 <문장지>에 소설가로 등단했던 정진업과 시로 등단한 김수돈이 마산연극을 이끌고 있었다. 그 당시 월초와 화인은 196133·15의거 1주년 기념 예술제전에 올릴 연극을 두고 의견 충돌을 빚었던 것이다. 월초는 지역의 사건이 제전의 중심인 만큼 지역 사람인 자신이 쓴 작품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을 폈고, 반면 화인은 공연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마당에 새 작품을 쓸 시간이 없다. 그리고 월초는 이미 이전에 두 작품을 했지만 작품성을 망치지 않았느냐고 맞섰던 것이다. 이렇게 서로에게 마음이 상한 채 두 사람은 갈등 상태에 있었다.

 

이에 그는 수습책으로 마산 출신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이광래를 초빙하자는 중재안을 내어 두 사람의 타협을 이끌어냈다. 결국, 유치진의 <조국>을 이광래 연출로 강남극장 무대에 올리기로 하고는 사태는 일단락됐다.하지만 이일로 그는 부산에서의 교사생활을 접고 마산으로 와서 경남대학에 시간강사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채 2개월도 안 되어 5·16을 맞는다.

 

병력미필자는 전부 직장을 떠나라고 하는기라. 그래서 서울로 갔거든. 서울로 가서 극단 아동극단 새들에서 상임연출가로 활동을 하고 있다가 두 번째로 마산에 온 것이 1962년이야..”

 

서울서 돌아온 그는 196212월에 하유상 작 <고래>를 연출해 3·15회관에서 공연한다. 정진업, 조두이, 윤일재, 이화백 등이 출연했다. <고래>는 표현주의 극양식을 적용한 실험적인 작품이었다. 표현주의가 갖고 있는 환상적인 요소를 최대한 활용하려고 했던 것이다.

 

통영에 있었을 때 그는 이미 사실주의 무대 보다 표현주의 무대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해방 후에도 일본과의 교역이 활발했던 지역이 통영이었는데 그래서 연극과 관련된 책들을 일부러 일본에 사는 친지들에게 부탁해 들여오기도 했다. 이를 통해 그는 해외 연극 사조와 작품을 많이 접하게 됐고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사자>와 같은 실존주의 작품을 서울보다 먼저 통영 무대에서 올렸던 것이다.

 

서울에 가서부터 표현주의를 목표로 했거든. 표현주의 무대를 마산에 처음에 와서 공연한 것이 <고래>인데 표현주의 작품을 했다 이 말이야. 그런데 그 당시 마산에 조명시설이 열악해 가지고 부분 조명이 안 되는 기라. 파트별로 조명이 안 가는 기라. 그러니까 표현주의 무대를 만들 수가 없다 이 말이야. 그래서 완전히 실패하고 말았지.”

 

표현주의 연극을 시도하였지만 당시의 열악한 조명기기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배우에게 요구했던 표현주의 연기술도 당시 배우에게는 낯선 양식이었기 때문에 이해되고 체계화되기에는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고래> 주인공을 정진업 선생이 맡았거든. 내보다 더 선배였지. 그 상대역이 누구나면 조두이 여사라. 조두이 여사는 정진업 선생의 성지여고 제자야 리허설을 할 때는 내가 말한 양식대로 잘 표현하다가 이 영감이 무대에 서거나 관객 앞에만 서면 사실적인 연기로 돠돌가는 기라. 그래서 연극이 엉망진창이 된기지 <집주인은 아버지>도 생각난다. 한기환 교수가 무대에 한번 딱 출연한 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집주인은 아버지>. 시체로 나와 막이 끝날 때까지 시체로 2시간을 누워 있자니 그 고통이 보통 고통이야? 꼼짝 못 하니까 시체로 2시간을 무대에 누워 있었다 이 말이다. 꼼짝 안 하고.”

 

이후 196212, 배덕환, 한기환 등과 더불어 <마산예술인극장>을 창립하고 배덕환이 번역한 <집주인은 아버지>를 연출해 제일극장에서 공연했다. 출연진은 윤일재, 조미령 등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19635월에 마산예술인극장한국연극협회 마산지부로 발전, 개편되고 그는 부지부장을 맡게 된다. (지부장 배덕환, 사무국장 송태학)

 

이를 기점으로 그는 배덕환, 정진업, 김수돈과 더불어 마산연극을 주도하게 된다. 그해 11월에 정진업 각색, 김수돈 연출로 마부네 원작 <태양의 아들>3·15회관에서 공연했고 이 작품에는 정진업, 조영자, 이백화, 우양강, 하연기 등이 출연했다. 1964년에는 버나드 쇼 원작 배덕환 번역으로 <영웅과 병사>를 연출했다. 그 때 출연진은 정진업, 윤일재, 이백화 등이었다. 1967년 마산항도예술제에 배덕환 번역 세월의 의미를 연출해 3·15회관에서 공연했다. 윤일재, 조영자, 이백화 등이 출연했다. 1969년에는 배덕환 번역 <나폴레옹과 이발사>를 완월동 경남대학 강당에서 공연하였다. 출연진은 김준철, 정수병, 박윤녀 등이었다.


한하균 선생과 이상용 대표 /경남도민일보 제공

 

4. 1970년 대학극 활성화와 후진 양성

 

19694월 경남대학(구 마산대학)의 영어교육과에 재직 중이던 한기환, 배덕환 교수영문과 3, 4학년을 대상으로 영어 연극 대본 낭독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면서 연출가인 그를 초빙한다.

 

그런데 레파토리가 영어 원어 극이기 때문에 영어를 모르는 내가 연출다운 연출을 할 수 없었다 특히 언어의 뉘앙스를 정확히 포착해야 표정과 동작이 가능한데 그게 되지 않으니 결국 장님 코끼리 만지기가 되어버린 것이야. 이에 부득이 연극의 원형만 지도하였을 뿐이지. 따라서 어떤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어떤 작품은 간접적으로 조언하는 데 그치고 만 거야.”

 

그는 1974년 영문과 학생들과 <안경>을 작업했고, 그 이후 당시 영문과 학생이던 이상용과 영어교육과 학생이었던 이종일이 주축이 되어 영어연극 대본 낭독회는 공연을 이어나갔다 <우리시대>(이종일 연출, 1978. 10), <붉은 카아네이션>(이상용 연출, 1981. 10), <거기 누구 없소>(이상용 연출, 1982, 10), <고래>(이상용 연출, 1984. 10),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이상용 연출, 1985. 11), <햄릿>(이상용 연출, 1984. 11), <황제 죤스(이상용 연출, 1985. 11), <성난 얼굴로 돌아보라)(이상용 연출, 1986, 11), <목격자>(이상용 연출, 1986, 9), <노병>(이상용 연출, 1987. 10), <시련>(이상용 연출, 1987. 11), <맹진사댁 경사>(이상용 연출, 1988. 9), <쥬노와 공장>(이상용 연출, 1988. 9) 등이 올려졌다. 그는 드러나진 않았지만 영어연극 대본 낭독회에 실질적 인 도움을 많이 주었다. 연출노트를 작성해서 한기환 교수에게 주기조차 했다고 한다.

 

사실 대학 동아리에 불과한 이즈음 한기환 교수, 배덕환 교수, 한하균의 움직임은 이후 경남연극사에 있어 큰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영어연극낭독회 공연의 연출을 맡았던 이상용과 이종일은 이 낭독회의 활동을 계기로 후에 경남대학 연극부를 탄생시켰고 그 여파로 마산과 창원의 여러 대학에서 연극동아리가 탄생되었으며 이 대학동아리에서 경남연극계를 이끌고 갈 무수한 차세대들이 탄생되었기 때문이다. 그 기저에 한하균과 배덕환, 한기환의 활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덕환과 그의 제자 한기환 연출가 한하균, 그리고 한기환의 제자 이상용, 이종일 등으로 이어지는 맥은 마산연극의 중흥을 일궈냈다.

 

지금 마산국제연극제 집행위원장인 이상용 회장과 거창국제연극제 이종일 집행위원장 등이 내가 가르친 제자들이야. 어떤 기사에 이종일 씨가 내가 하나의 대사를 100번 씩 하게 했다고 한 적이 있는데, 그게 아니고, 나는 리딩을 할 때 연기자 스스로가 을입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줘야 한다고 생각해. 대사마다 주어가 있는데, 그 주어는 반드시 관객들한테 들려야 한다는 말이지. 이 것을 자꾸 흡트리니까 그것을 터득하도록 되풀이 시킨 거라. 내 딴에는 상당히 장래성이 있다고 봤어.”

 

이상용이 주축이 된 경남대 연극부19735<부부>(이상용 연출), 6월에 <울타리>(이상용 연출)를 공연했고, 1976년에는 이종일 연출로 7월에 <강제결혼>, 11월에는 <하멸태자>를 공연하면서 대학극의 초석을 다져나갔다.

 

1976년에 신용수, 하영화, 신현숙, 강상훈, 김진식 등이 마산학생연극회를 탄생시켰고, 같은 해 5월에는 마산간호전문대학 연극부가 이종일 연출로 <재치를 뽐내는 아가씨들>들을 올림으로써 당시 마산연극계를 대학극이 주도해 나갔다. 1977년에는 이윤도 연출의 <코르자크와 그의 고아들>을 무대에 올리면서 경남대학교 극예술연구회가 탄생되었고 이후 이윤도를 비롯 정석수, 장해근, 현태영, 고춘호, 김윤희, 김윤자, 박유진, 송창호, 최태황, 최현규, 김태성 등이 골수분자로 지속적으로 실험극과 비중 있는 작품을 무대에 올림으로써 마산연극의 중흥을 이루어 나갔다.

 

1970년대 대학극의 움직임은 경남연극에 있어 매우 중요하다. 한하균을 비롯 선각자들은 분명 있었으나 그들이 가진 역량들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은 되질 못 했다.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경남연극은 동호인 모임 정도의 수준에 그쳤던 것이다. 사실 그 전만 하더라도 시대적 현상이지만 대부분의 연극이 초·중학교에서 활성화되었던 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1970년대 대학이 활성화되면서 영미희곡을 전공한 배덕환 교수와 한기환 교수. 오로지 연출만 고집한 한하균이 <영어 연극 대본 낭독회>로 전문화로의 포문을 뚫어줬던 것이다.

 

이미 1963년 한국연극협회가 탄생되어 한국에서의 연극도 하나의 독립적인 장르로 부상된지 오래였다. 희곡을 전공한 사람이 연극의 이해력을 높이고 여타 다른 분야를 섭렵하는 어설픈 연극인이 아니라 현장에서 오로지 연출로 잔뼈가 굵은 장인이 시대의 흐름을 타게 된 것은 당연한 이치였다. 당시 배덕환, 한기환, 한하균이 그 견인차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수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여 경남연극의 중흥을 이뤄냈다.

 

5. 뒤안길에서

 

그에게 시련이 닥쳤다. 1978년 연극 <한강은 흐른다>를 마치고 난 후 중풍을 맞은 것. 이로써 연극 일선에서 한발 뒤로 물러난 그는 몸도 추스르고 일생을 되돌아볼 겸 고성으로 향했다. 그리고 회복기를 거쳐 고성종합고등학교 교장을 역임 한 후 교직에서도 물러났다.

 

하지만 그의 연극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 몰랐다. 경남연극사 정리에 나선 것이다. 동영 시청의 <통영 연극사>, 마산시청의 <마산연극사>를 집필했다. 이어 2001<경남도민일보>오동동야화를 연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신은 건강을 담보로 한다고 했던가 인물 중심의 경남연극사 재정리 도중 2차 중풍을 맞고 말았다. 의사는 앞으로 정신노동은 가급적 금할 것을 주문했다. 그의 부인(김동주 씨)은 그간 그가 모아놓은 연극 관련 기록물 일체를 불태워 버렸다.

 

내가 마산서 연극을 하다가 여러 가지 사정의 핍박감을 느꼈다고 할까? 소외감을 느꼈다고 할까? 어째든 연극에 대한 회의가 생겨가지고 고성으로 가버렸거든. 고성으로 가서 있었는데,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연극 자료를 다 가지고 있었어. 훗날에 연극사를 쓸 거라 해서 모은 건 아니고, 자료를 다 가지고 있었는데 고성 가가지고 얼마 안되서 내가 따로가 쌓여 중풍이 걸렸거든. 우리 집사람이 노력을 해가지고 북돋아 안 밀어났나. 고성에서 정년퇴임을 하고 마산으로 돠돌아 와가지고 도민일보에서 하도 경남연극사를 정리해 발표해 달라고 해서 원고 청탁을 맡아가지고 그것을 써나가는 과정에연재, 그것이 참 부담이 되대. 그리고 자료를 챙기고 쓰다가 하루는 좀 늦게까지 새벽까지 썼는데, 금요일 날이다. 그날이. 새벽까지 썼는데, 연재 안 밀리기 위해 몇 차례 더 보태가지고 썼는데 쓰고 나서 일어나니까 화장실을 못 가겠는기라. 두 번째 중풍이 온기라. 그래서 요 앞에 있는 신마산병원, 요새 우리병원이다. 거기서 입원을 했다. 입원해 있는데 현태영이 김종찬이 이 사람들이 다 문병을 왔다 가고 이랬다. 그 때, 우리 집사람이 엄청나게 당황한기라 두 번째니까, 그래서 그 연극자료를 전부 불살라 내버렸다 아이가.”

 

이제 그는 80이 넘은 고령과 중풍으로 편치 않은 상태다. 마산연극협회가 <마산연극 49년사>정리를 위해 그를 모시고,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마산연극사에 대한 구술 채록에 나섰다. 제자였던 이상용 극단 마산 대표와 정석수, 최성봉이 질문하고 구술 채록했다. 이상용이 1960년부터 80년 당시의 마산 연극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 그가 이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됐다. 그는 옛날 마산에서 연극 작업을 할 때 적어둔 메모와 당시 기억을 바탕으로 A4용지 12장 분량의 기록물을 만들어 이를 바탕으로 담담히 구술에 나섰다. 마산 연극의 1920년대부터 80년대까지를 정리한 이 자료에는 마산 연극을 풍미했던 이광래, 정진업, 김수돈, 이우철, 오우철, 정미태 배덕환, 한기환, 송태학 등등의 출연작품과 작품세계가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그는 그의 연극 여정을 같이한 놀라운 사람들에 대해서 회고한다.

 

통영에서는 김일도라는 연기자가 있었는데, 내가 절대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야. 옛날 그 당시에 한참 날리던 김희갑이, 코미디언 김희갑이 못지 않은 사람이라김일도가 있었고, 또 이백화라는 여배우가 있었어. 마산 사람인데, 요새 같으면 방송국의 리포터 있제.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이 이백화인데, 이 사람의 연기가 대단히 좋았지. 지금 부산서 시집가서 할매가 되어 있을끼고, 지금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또 마산서는 윤일제라는 경남대학 출신에 사람이 있다. KBS PD도 하고 서울중앙방송국에서도 일하고, 윤일제라는 사람의 연기력이 뛰어났지. 그 다음에 최선창이라고 통영사람인데 영화에도 출연했어. 임권택 감독이 초기에 <사나이답게 싸워라>라고 하는 그런 식의 신파의 영화에 출연을 했거든. <압록강아 잘 있느냐?>하는 그런 것이었을 거야.”

 

그리고 현재 현장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쓴 소리도 놓치지 않았다. 식지 않은 열정으로 말이다.

 

내 처음에 연극인구의 저변확대를 가장 큰 목표 중에 하나로 삼았지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 그 당시에 연극 인구가 있었나? 없었지 사람 숫자 늘리는 것이 더 큰일이었거든. 연극 작품을 공연하는 것도 큰 목표지만, 그에 못지않게 큰 것이 연극 인구의 저변확대라. 그래서 낮에는 학교생활을 하고, 저녁에는 야간 수업을 하고 그 바쁜 와중에 연출노트를 여러 작품 만들어 가지고 한기환 교수에게 줬던 기라. 연출노트를 만드는 것이 연출하는 것보다 더 힘든기다. 그것을 일일이 만들고 내가 때때로 리허설장에 가서 지도를 한 이유는 연극인구의 저변확대의 목표가 있었기 때문이거든.”

 

우리 경남 연극에서 양적으로는 옛날에 비해서는 많이 발전됐지만 질적으로는 조금 아쉬운 점이 있다. 뭐냐 하면, 어떤 훈음을 놓쳐 버린거야. 가령 예를 들어서 이광래 선생하면 중간극을, 정진업 선생하면 사실주의 연극을, 김수돈 선생하면 표현주의 연극처럼 목표를 갖고 연극을 했는데 오늘날 연극에서는 그런 것이 안 보이는 거야. 고마 사실주의 일변이더라고 거의 대부분이. 부조리 연극을 하는 사람도 있고, 표현주의 연극을 하는 사람도 있고, 사실주의 연극을 하는 사람도 있고, 이렇게 있어야 되는데 없어서 이런 게 아쉽단 말이다. 우리 마산 연극인 중에서 이지훈이라고 있었제? 창원대학 이지훈 교수가 연극을 공부한 사람인데, 이 사람이 처음으로 부조리 연극을 마산서 공연했지. 그 이후에 부조리 연극을 제대로 공연한 적이 없어. 그만큼 사실주의 일변이더라고.



1932 경상남도 통영시 욕지면 하노대리 38번지에서 아버지 대유 한영주, 어머니 강맹수 사이에 태어남.

1945 시인 김춘수 선생과 만남.

1949 동경학생예술좌 출신의 김용기 선생 만남. 유치진 선생과 만남.

1950 동국대학교 국문과 예과에 진학. 20일 만에 한국전쟁 발발로 통영으로 되돌아옴.

1951 유치진 선생의 추진으로 신극협의회연구생으로 들어감.

1952 유치진 작 <까치의 즉음> 출연.

1953 통영의 연극동호인과 당시 통영으로 피난 온 국립극단 연출부장 허석이 합심해 <뇌우>를 무대에 올림. 배우로 출연.

1954 싸르트르 작 <붉은 장갑> 연출.

1955 조흔파 작 <수난보>, 김영수 작 <반역자>, 셰익스피어 작 <햄릿> 연출.

1956 박재성 작 <산비둘기>, 김영수 작 <혈맥>, 유치진 작 <원술랑> 연출.

1957 주평 작 <역마을 소년>, 유치진 작 <토막> 연출, <역마을 소년>으로 전국아동극경연대회 최우수상 수상.

1958 한로단 작 <전유화(戰有花)>, 싸르트르 작 <무덤 없는 사자(死者)> 연출.

1959 슈네츠라 작 <눈 먼 동생>, 유치진 작 <통곡> 연출.

1960 콜로디 작 <피노키오>와 주평 작 <숲 속의 공주> 연출. 명동국립극장에서 공연, 주평 작 <별주부전> 연출.

1962 하유상 작 <고래> 연출.

1963 배덕환 역 <집 주인은 아버지> 연출.

1968 한국연극협회 마산지부장에 당선(12년간 활동).

1970 유치진 작 <까치의 죽음> 연출, 전국연극제 대통령상 수상.

1978 유치진 작 <한강은 흐른다> 연출. 뇌졸중으로 중풍을 맞게 됨. 고성으로 감.

1986 경남연극제 심사위원장.

1988 경상남도 문화상 수상.

1990 경상남도 문화상 심사위원회 공연예술분과위원장 역임.

1991 전국연극제 심사위원 역임.

2001 <경남도민일보>오동동 야화연재 중 2차 중풍 맞음.

2002 시민불교 문화상 예술상 수상.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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