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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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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한국에 온지 만 6년이 되었습니다. 아내는 몽골 출신입니다. 울란바타르 외곽에 살았더랬죠. 어렸을 때엔 울란바타르 도심에서 살았더랬는데 부친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계가 기울어 그리되었답니다. 그래서 대학을 다니지 못했지요.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었는데...

외국어를 배운다는 것 쉬운 일이 아니죠. 내가 영어 공부를 30년 훨씬 넘게 공부했는데, 지금도 아이들이 영어를 물어보면 대답해줘야 하니 공부는 공부이지요. *^^* 그렇게 오랜 기간을 영어와 친하게 진해려고 했는데도 영어를 쓰는 외국인과 말이라도 한마디 하려면 거의 언어장애인이 되어버리니까요.

아내가 한국에 온지 6개월 정도 몽골말만 썼습니다. 내가 몽골어를 쓰면서 대화를 했지요. 한몽사전, 몽한사전을 옆에 끼고 말이죠. 발음이 안되면 사전을 찾아서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대화를 했습니다. 아내는 한국말을 배우려 하지 않았습니다. 나와 대화하는 것 말고는 한국의 모든 것과 담을 쌓고 살 정도였으니까요.

가족이 함께 모여 대화할 때도 알아들을 수 없으니 꾸어다 논 보릿자루였으며 나의 친구들과 만날 때에도 섞이지 못하고 외톨이가 되기 일쑤였지요. 그러니 아내는 사람 만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6개월, 그 때부터 난 몽골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후로 2년 정도는 몽골어를 잊고 살다시피 했습니다. 아내가 한국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창원여성의 전화에 가서 배우기도 하고 경남종합사회복지관에 가서도 배우고 집에선 아이들과 대화를 하면서 점점 한국어 실력을 쌓아갔습니다.

약간 알아듣기 시작했을 때 한국 드라마를 열심히 본 것이 도움이 많이 되었지 싶습니다. 알아듣지 못해도 상황이 이야기를 해주니까 점점 무슨말인지 이해를 하게되더라는군요.

특히 나와 야후 메신저로 혹은 네이트온으로 채팅을 수년동안 한 게 글쓰기 실력을 키우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처음엔 맞춤법이 엉망이더니 이제는 엔간한 학생들보다 더 정확한 맞춤법을 구사합니다. 한국어 맞춤법이 엔간히 어렵습니까.

아내가 초등학교 학생들 앞에 서서 강의를 합니다. 얼마전부터 초등학교 다문화 교육 강사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경남이주민센터에 간사로 취업하면서 여러가지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공부하기 싫어하던 아내가 산재보험관련 법 해설서를 들고 와서는 열심히 번역을 합니다.

법 관련 용어는 어지간히 배웠다는 사람도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그것을 몽골어로 번역하여 몽골출신 이주노동자들에게 강의를 합니다. 경남이주민센터에서 일을 하고부터는 법원, 경찰서 등을 다니며 통역을 해주고 있습니다. 아내의 나이도 어느정도 있는 데다 큰언니같은 성격이라 여러모로 일이 잘 풀리는 것 같습니다.

이곳저곳 많이 다니다보니 몸은 피곤한데 은근히 보람이 있는지 자랑을 많이 합니다. 하루에 몇 사람을 도와줬다면서 말이죠. 동생뻘 되는 몽골출신 노동자 청년이 말을 잘 안들으면 꿀밤도 주곤 한답니다. 한번은 어떤 청년이 하도 말을 안들어서 화를 벌컥 내면서 어떻게 한 모양인데 나중에 경남이주민센터에 무서운 누나가 있다는 소문을 다 낸 모양입니다. ㅎㅎ.

아내가 카카오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왔습니다. 몇 주 전에 교육을 받았던 '다문화 강사 교육' 과정을 이수했다는 증서였습니다.

불과 두어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모텔 청소일을 할까, 휴대폰 회사에 취직할까 하면서 생활 걱정을 했는데 이제는 더욱 많은 사람들을 어떻게 도울까 고민을 하는 사람으로 변해버렸습니다.

이런 때에 아내가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오늘 쉬는 날이라 이것저것 정리하다 아내가 보내온 사진을 보면서 '글쓰고잡이' 기운이 발동하여 후딱 컴퓨터로 달려와 앉아 몇 자 적어봤습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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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은 아빠가 퇴근하면 가장 먼저 내놓는 게 있습니다. 

바로 자신이 그린 그림입니다.

요즘 만화 그리기에 빠져 사는데 은근히 대견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아빠 역시 어렸을 때 만화를 곧잘 그리곤 했는데, 아들은 내 당시의 실력에 비하면 훨씬 수준이 높은 편이어서 칭찬을 하지만 한편으론 시험이 며칠 남지도 않았는데 시험공부는 둘째고 만화만 그리고 앉았으니 걱정이 되는 겁니다.

주변에서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도록 내버려 두라고 합니다. 어쩌면 억지로 공부를 하라고 하는 것보다 지금은 공부를 못해도 자신이 언젠가 공부도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을 때가 있겠지 하고 마음을 고쳐먹기도 합니다.

그냥 한 번씩 "시험이 언제지?"하고 약간의 압박은 가합니다만, 오래 가질 않습니다. 공부하는 척하다가 곧바로 공부하는 책에다가 그림을 그리고 말지요.

아, 얼마전에 책에다 낙서한 게 선생님한테 들켜서 혼도 났다네요. 짜슥, 그것을 자랑이라고 아빠한테 얘길하고 말이야....

죽자고 그림만 그리는데 계속 장려를 해야할지 고등학교라도 제대로 들어가게 공부도 좀 하게 구슬러야할지 고민이네요.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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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이란 사회, 어쩌면 너무 딱딱하게 법적인 것을 내세우다 보니 따뜻하게 보듬어도 될 것들을 놓치는 사례가 많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먼저 해봅니다.

어제 우리 식구는 지난 6년 동안 알고 지내던 몽골여성과 이별파티를 열었습니다. 나와 아내, 큰 딸, 아들, 막내딸, 그리고 이날 함께 있던 오가나 이모까지 식탁에 둘러앉아 편지를 썼습니다.

편지 한 장에 각자 글씨로 이별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막내는 뒷장에다 크게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모의 얼굴을 예쁘게 그리고 사인까지 해서 고급 봉투에 넣어 주었습니다.

예전에 쓴 글이 있어서 본명 대신에 그때의 이름으로 하겠습니다. '솔롱고'. 참 솔롱고는 '무지개'란 뜻인데 빨주노초파남보, 다문화사회를 상징하는 이름이지요.

솔롱고는 결혼이민여성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온지 6년만에 다시 몽골로 돌아갈 수밖에 없게 되었을까요? 무엇을 잘못했기에 쫓겨가듯 강제 출국을 당해야 했을까요?

솔롱고는 2005년 말 한국으로 시집온 몽골여성입니다. 몽골에선 공업대학을 나왔지요. 고급인력입니다. 그런데 한국에 오면 그 전문성을 살릴 방법이 거의 없습니다. 단지 한국인 남자의 아내로서 그 역할을 강요당할(?) 뿐이었지요.

솔롱고는 한국에서 일을 하고 싶었던 거지요. 시집온지 3개월 정도 되었을 때 공장에 나가 일을 하게 된 것이 불행의 시작이 된 것입니다. 월급 받은 것을 고향에 있는 어머니께 생활비를 보낸 것이 시어머니나 시누이의 눈에 난 것 때문에 갈등이 시작되었고 한국어를 전혀 모르던 상황에서, 또 갈등이 심한 상황에서 한순간 얼떨결에, 혹은 판단을 잘못하여 서명해버린 합의이혼서.

스물 세살 젊은 나이에 머나먼 한국땅에 시집오자마자 결혼에 실패, 하지만 빈손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자식이 이혼한 줄도 모르는 부모 앞에 이혼녀로 돌아갈 수 없는 사정 때문에 체류연장을 하면서 한국에 머물러야 했던 사정들.

하필이면 위자료 청구소송을 했던 때마저 소멸기한인 3년을 일주일 넘기고 제기하는 바람에 아무 소용없었던 무지.

결국 정해진 세월은 그를 다시 몽골로 돌려보내버리네요. 국제결혼에 대해 비판적 목소리가 점점 커가고 있는 몽골에서 그를 어떻게 받아들일까. 한국에서 살고싶었지만 이혼녀라는 딱지는 그를 일도 못하게 했으니 어쩌면 길다고도 할 수 있는 6년의 세월은 그저 그에게 오랏줄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겨우 아르바이트나 하면서 입에 풀칠이나 할 수밖에 없는 세월을 한국에서 보낸 게 안타깝기만 합니다. 돌아갈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솔롱고는 지난 6년간 길잃은 철새였습니다.

[데스크칼럼]솔롱고의 항소이유서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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