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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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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를 잘 못 탄 건 치명적인 실수였다. 아내도 열차시각, 가는 곳이 다 다른데 어떻게 기차를 잘 못 탈 수가 있느냐며 핀잔이다. 유구무언을 이럴 때 쓰는 말인 것 같다. 평소엔 내가 좀 더 큰소리를 치기도 하는데... 그냥 기분이 '인생반전'된 느낌이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40년 전에 살던 동네를 헤매면서 초등학교 시절 추억에 홈빡 젖어 하루가 지난 아직도 다 말리지 못하고 있다.

부산시 서구 초장동. 산복도로 바로 아랫동네. 새로운 주소가 생기긴 했는데 나에겐 별 의미가 없다.

부산역에 내려 계단 끝에서 5000원 주고 산 우산을 머리 위에 받쳐들고 부산대교로, 남포동으로, 자갈치로, 광복동으로, 국제시장으로, 충무동으로 해서 시간 때우느라 이리 걷고 저리 걸었다. 새벽은, 특히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새벽시간은 참으로 더디게 간다.

포장마차도 하나 둘 형광램프를 끄고 있을 즈음에 큰길로 빠져나오는 골목 끝자락에서 마주보이는 산중턱이 나의 시선 뿐만 아니라 멋릿속 의사결정권까지 빼앗아버렸다.

그 동네가 초장동이다. 초장동으로 가려면 충무동을 지나야 한다. 충무동을 지나 초장동 초입에 들면 길이 거의 등정길이다. 부산역에서 여기까지나 걸어왔는데 다시 산을 오르듯 걸어야 해 추억이고 뭐고 포기하고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다. 1시부터 5시까지 거의 쉬지 않고 걸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가파른 길을 걷게 만든 것은 아직 지하철을 타려면 1시간을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과 어디에도 앉아서 쉴만한 장소가 없다는 현실이었다. 더구나 이렇게 비가 내리는 새벽에.

내 기억이 정확하지 않았다. 아니면 길이 많이 변해버렸든지. 승용차가 다니는 길로 어느 정도만 올라가면 오른쪽으로 초등학교 시절 살던 집이 나온다는 기억은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산복도로까지 올라가야 했다.


산복도로를 따라 아마동 쪽으로 걸어갔다. 왼쪽으로 초장중학교가 나왔다. 초교 3년 중학교 2년, 5년동안  이 길에서 누볐는데도 웬일이었을까? 단 한 번도 초장중학교에 들어가서 놀았던 기억이 없다. 산복도로가 어렸을 적 기억보다 무척 좁아보였다.

오른 편으로 길을 따라 걷다보면 아래쪽으로 눈에 익은 계단이 보인다. 자그마한 운동화 발자국이 계단 아래로 뛰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저 길로 내려가서 왼쪽으로 꺾으면 우리집이 나온다. 그러나 내 기억에 더 익숙한 길은 좀 더 가야 있다.



정확히 38년 전 이집으로 이사왔다. 전세 200만 원이었다. 담장 오른편 너머엔 장독대가 있다. 장독대엔 석류였던가 확실히 기억이 나지 않는데 키가 큰 나무가 있었다. 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으로는 '혹부리 할매'가 사는 방이고 맞은 편에 있는 두칸짜리 방이 우리가 사는 곳이었다.

방 앞에는 한뼘쯤 되는 툇마루가 있었다. 늘 여기 앉아서 신을 신고 했다. 우리 할머니가 워낙 걸레질을 자주 해서 나무가 반질반질했다.

할머니 얘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내가 처음 경찰을 무시무시한 사람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일도 이집에서 일어났다. 일년에 한 번, 아니면 두 번 경찰이 우리집으로 찾아왔다. 아마도 벌써부터 경찰이 우리집을 찾아왔을 테지만 초교 5학년 어느날 그때는 나와 할머니가 집에 있을 때 경찰이 찾아온 것이다.

경찰은 할아버지를 찾았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고 우리는 제사를 지내는 판에 어디있냐니? 맞아! 처음 경찰이 내게 할아버지한테서 편지 온 거 없냐고 했었다. 참 순진하게도, "할아버지 돌아가셨는데요." 할머니와 경찰이 나를 밖에 두고 방문앞에서 한참을 옥신각신하더니 경찰이 대문을 열고 나갔다.

할머니 기분은 이때부터 일주일 동안 장마전선을 형성했다. 나중에 들은 얘긴데, 할아버지는 독립운동이 끝나는 시점에서 '빨간물'이 들어 진주를 바탕으로 전국에서 활동하다가(열차 기관사였기에 전국활동이 가능했다는 분석) 전쟁이 나기 이태전에 서대문에 갇혔다.

전쟁이 나면서 서대문 감옥 자물쇠가 깨어지는 통에 빛을 보긴 했으나 고향으로 발길을 옮기기 않고 북으로 향했단다. 그 일이 두고두고 우리 가족을 괴롭힌 장본이 되었다. 삼촌이 군대에서 말뚝을 박지 못한 이유도 그것 때문이었고 내가 일찌감치 교직을 마음에서 떼어낸 이유도 거기에 있었다.


참, 너무 곁가지 이야기를 오래 끌었다. 이러다가 설을 다 풀려면 밤을 새겄다. 암튼 이 집의 주인은 '혹부리 할매'다. 할아버지는 땅콩장사를 했다. 집에서 사흘에 한 번 쯤 땅콩을 볶았는데 그때마다 우리뿐만 아니라 온동네 사람을 고소한 향기로 괴롭히곤 했다.

이 할머니에겐 딸이 둘 있었다. 하나는 공장에 다녔고 동생은 대학교 다녔다. 내가 중학교 들어간다고 할 때 작은 누나가 나에게 영어를 가르쳐주었다. '마린보이' 만화영화를 보고 친구들에게 영어 자랑을 했던 기억이 난다. 보이는 우리말로 소년이란 걸 알았는데 마린이 무슨 말인지 몰라, "야, 야, 마린보이를 우리말로 번역하면 뭔지 아나? 잘들어라. '마린소년'이라 안 카나!" 초등학교 6학년, 보이가 우리말로 소년이란 것도 대부분 모르던 때에 그래도 친구들은 어리석지는 않았나보다. "그라모, 마린은 무슨 말인데?"


'보이'만 배우고 '마린'을 미처 안 배웠던 게 얼마나 쪽팔렸던지... 우리 동네 골목에서 가장 많이 하고 놀았던 것은 구슬치기였다. 당시엔 흙바닥이었다. 어릴땐 구슬치기라 안 했고 일본말로 '다마'치기라고 했다. 내 적수는 바로 맞은 편 집에 사는 만섭이였다. 같은 반이 한 번도 되지 않아 성이 무엇이었는지 퍼뜩 기억이 나지 않는다. 만섭이 동생은 이섭이였다. 이섭이는 화장실 사건 때문에 아직도 기억을 하고 있다.



우리집 화장실은 집 밖에 있었다. 지금도 그대로다. 세월이 근 40년 흘렀는데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골목은 그래서 큰 길에 비해 보존이 잘 되나 보다. 그때 화장실 문은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다. 문틈 사이가 약간 벌어져 있어서 안에서 밖의 정보를 어느정도 감지할 수도 있었다. 당연히 밖에서 안의 정보를 알 정도는 아니었다. 이섭이는 내가 채 문고리를 잡기 전에 문을 활짝 열어제껴버렸다.

이 골목엔 많은 사람이 오고갔다. 산복도로에서 내려와 충무동으로 가는 길 중 가장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초등학생 아이였다는 게 얼마나 다행스러웠지 모르겠다. 당시 도망간 이섭이 잡는다고 울그락불그락한 기억은 있는데 혼내거나 한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냥 봐줬을 것 같다. 친구 만섭이 얼굴을 봐서라도 말이지. 만섭이는 내게 딱지도 많이 꼴았다.(잃었다)


집 앞 골목을 돌아섰을 때 한꺼번에 밀려오는 말숙이 이모와의 추억 때문에 숨이 가쁠 지경이었다. 이 골목 왼쪽에 말숙이 이모 집이 있다. 대문도 계단을 몇 개 밟고 올라가야 하고 대문을 들어서서도 오른쪽으로 계단 몇 개를 오른 뒤 다시 왼쪽으로 계단을 여남은 개 올라야 현관이 나온다. 중간 계단쯤에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이 개는 나를 정말 싫어했다. 이 개 때문에 이모집이 안 간 적이 많다.


이모는 나보다 한 살 적다. 하지만 같은 학년이다. 4학년 5학년 6학년 지나오면서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못했다. 집에서나 밀양할매 집에선 나보다도 나이 적은 가스나를 '이모'라고 불러야 했다. 아니면 버르장머리 없다고 야단을 맞는다. 애매하게 불러도 우리 할매나 밀양할매나 "이모한테 지금 머라캤노?" 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학교에 가면 사정이 다르다. "미숙아!"하고 부른다. 원래 이름은 말숙인데 학교에서 놀림당할까봐 한자 말(末)과 미(未)가 비슷해서 미숙이라고 이름을 바꾼 것 같다. 이름처럼 미숙이는 막내다. 밀양할매가 오십다섯에 낳았단다. 우리 할머니가 스물에 어머니를 낳고 어머니가 날 스물둘에 낳았으니 이모가 동생벌 되는 것도 그렇게 드문 현상은 아닐 것이다.


말숙이 이모는 우리의 관계를 재미있어 했다. 내게 용돈이라며 10원을 준 적도 있다. 뽀빠이 하나를 사먹을 수 있는 돈이다. 군것질이 흔하지 않던 시기에 그 돈은 적은 게 아니었다. 이모로서 대접을 받으려 했던 것일까? 하지만 산복도로에서 열 명 정도가 패를 지어 '다망구(진놀이)'를 할 때면 그냥 친구 이상 아무 의미가 없기도 했다.


집 앞에서 한 10여 미터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가면 공동상수도가 있었는데 그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상수도 물을 한 번 받으려면 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했다. 물이 나오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때가 되면 온동네 사람이 양동이를 들고 경보걸음을 했다. 이 골목길로 재첩국 장수가 하루에 한 번 지나다녔다. 저녁을 지을 쯤에 꼭 집앞 골목을 지나갔다.

할머니는 내게 "재치꾹 사이소?"하는 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큰 양은냄비를 주면서 "퍼뜩 가서 100원어치 사 오이라. 전번에 적게 받았다꼬 이번에는 마이 달라 캐라."


그렇게 쫓아 다년던 길을 근 사십년 만에 다시 걷는다. 집에서 오른쪽으로 골목을 돌아 경사진 길을 약간 내려오면 다시 산복도로로 향하는 길이 있다. 여기는 계단으로 구성됐다. 아마 계단 수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을 것 같다. 계단을 중간쯤 오르면 오른쪽에 윤수집이 있다. 방이 정말 작다. 아버지와 엄마랑 세식구가 살았던 기억이 난다. 윤수는 싸움을 잘했다. 성질도 급해서 아이들과 잘 다퉜다. 그런데 나와는 한 번도 다툰 적이 없다. 저 위에 산복도로 따라 아미동 쪽으로 가는 길 중간 쯤에 태수, 천태수 집이 있다. 이 태수와 윤수, 나 현수가 유비가 관우, 장비랑 도원결의 하듯 삼총사를 맺고 학교와 동네를 휘젖고 다녔으니 감히 우리를 건들려는 아이들도 없었다. 크리스마스만 되면 성탄카드를 서로 나눴는데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



우리동네에서 대학병원 쪽으로 가려면 아래쪽으로 난 길을 계속 따라 가야 한다. 이 길을 가다보면 아주 잘 사는 집 하나가 있다. 위쪽 판자집 같은 집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집엔 큰 정원이 있다. 안으로 기웃거리기는 몇 번 했지만 한 번도 들어가보지는 못했다. 바로 이 집이 아직도 내가 이름을 잊지않고 있는 우리반 친구 한덕실의 집이다. 한덕실은 참 착했다. 좋아하기엔 너무 다른 세계에 사는 아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지만, 이 아이의 아버지 덕분에 내가 경주 수학여행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잊히지 않는다.


담벼락 위에 창살이 줄지어진 이집. 혹시 아닐 수도 있다. 위쪽으로 두어집이 더 정원이 있는 집이었는데 아파트 두 동이 들어섰다. 이집엔 문패가 없고 한집 아래에 있는 집엔 박 씨 문패가 달려 있었다. 학교를 오갈 때 괜히 이집을 지나칠 때면 한덕실에게 빚진 맘 때문에 친구와의 대화가 끊기기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어렸을 때 속마음 바람둥이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한 번도 여자애들한테 표현한 적은 없지만 말숙이 이모도 좋아했고, 한덕실도 좋아했고, 또 나보다 달리기 빠른 박영희도 좋아했다. 특히 박영희 앞에선 은근히 내 뜀틀이나 낙법 등 체육실력 뽐내고 싶어 더 열심히 했던 기억이 난다. 내 동생에게 거금 100원을 주면서까지 내게 관심을 보였는데(아마, 이 기억은 착각일 수 있다) 나는 용기가 없어 단 한마디 고맙다 인사도 못했다.


집에서 한덕실의 집을 지나 대학병원 쪽으로 가면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이 있었다. 지하철 만드느라 넓은 길이 생기면서 건물이 다 뜯긴 것 같다. 사진에서 보면 내 기억이 맞다면 길 한복판이 사무실 위치였다.

노무현 변호사 사무실은 2층에 있었다. 워낙 바쁜 사람이라 찾아가도 직접 만날 기회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어머니가 노무현 변호사을 찾아갔을 때엔 세월이 좀 지나고 나서였다. 어머니가 한창 고무공장에 다니고 있을 때였으니 노동문제였지 싶은데 나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어머니도 대여섯번 만에 찾아가 만났던 것 같다.

 
내가 토성초등학교 나오고서 토성중학교로 진학하지 않고 뽑기에서 영주동 건국중학교에 걸린 것은 정말 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큰 이유가 토성중학교로 못갔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졸업때까지 토성중학교에서 동생이랑 농구를 했다. 눈 내린 겨울에도 농구공을 탁탁 치면서 운동하러 갔었다.

그런 토성중학교가 경남중학교로 이름이 바뀌어 있었다. 부산에 있으면서 '경남'은 무슨. 싶으면서도 바로 맞은 편이 옛날 경남도청이었던 점을 생각하면 무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40년 만에 새벽, 시간 때우기용이긴 하지만 근 40년 만에 돌아본 어릴 적 고향(?) 골목. 빛바랜 필름처럼 선명하지는 않지만 소중한 추억이기에 가슴속에 커다란 미소가 생긴 듯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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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0일 쓰려고 펼쳤다가 바쁜 일 때문에 미뤘더니 오늘 7월 1일, 우연히 열어보고 무슨 내용을 쓸려고 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으니 이 무슨 조화인고.

지원이는 스티커를 좋아한다. 문방구에만 가면 스티커를 사달라고 조른다. 어디에 붙일 데도 없으면서 산다. 그러다보니 컴퓨터에도 붙이고 거울에도 붙이고 TV에도 붙여야 한다. 붙여서는 안 되는 곳이 붙일 수밖에 없다. 스티커는 붙이는 물건이고 붙일 곳이 없으니 붙여서는 안 되는 곳마저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다.

아마 이런 내용으로 쓸려고 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금은 스티커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글쓰기는 통과!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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