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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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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8.09.23 학교가 두려운 아이 36
  2. 2008.09.10 새로운 스타일의 주방장 모자를 소개합니다 ^ ^| 1
  3. 2008.09.09 할머니의 잃어버린 6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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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인 한 아이가 결국 학교생활을 접고 말았습니다. 아이의 말로는 같은 학급의 아이들이 계속 괴롭혀서 도저히 학교에 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너무나 내성적인 이 아이는 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이런 고민에 휩싸였지만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전혀 말하지 않고 속으로 삼키며 견디어 왔습니다.

속으로야 엄청난 분노를 일으키며 온갖 상상을 다 했겠지만 겉으로는 아무런 행동으로도 표출하지 않았습니다. 선생님에게나 부모님에게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고자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고자질이 나쁘다는 인식도 그렇지만 결국 나중에 피해를 보는 것은 자신이라는 계산이 섰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의 고통을 발설하지 않았습니다.

성적에 몰입한 공교육

이 아이는 자신이 공부를 잘하면 선생님에게 관심을 얻고 이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듯합니다. 그래서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임에도 학원에 나가 밤 11시까지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남들만큼 공부를 하면 저절로 반에서 성적이 올라갈 거라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아무리 공부를 해도 성적은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이들이 여전히 자신을 괴롭힌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서 공부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앞서나가는 수업 진도를 따라갈 수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선생님의 관심을 얻고자 했던 계획과, 그래서 친구들의 괴롭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던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판단한 아이는 더는 학교에 나갈 수가 없었나 봅니다. 두려움이 얼마나 심했던지 정서불안 증세까지 보이던 그 아이는 하는 수 없이 지난 여름방학 때 부모의 동의로 휴학하고야 말았습니다.

학교가 어떤 곳인가 생각을 다시 하게 됩니다. 나이 7살이 되면 엄마 아빠의 손을 잡고 초등학교에 입학합니다. 공식적으론 이때 처음으로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하기 위한 교육을 받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유치원이나 학원 같은 곳에서 미리 교육을 받고 초등학교에 들어갑니다.

취학 전에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과 동시에 또래 아이들에 비해 뒤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초등학교 1학년 때 기초교육부터 시작해야 하지만 학교에선 대부분 한글과 수셈 등 기초교육이 된 상태라고 여기고 수업진도를 빠르게 나가기 때문입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기초학습이 부진한 아이는 기본학습이 제대로 되지 않은 채 또래 아이들과 수업을 받지만 그냥 공부 못하는 학생 정도로만 치부될 뿐 선생님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세월을 보내게 됩니다. 사실 오늘날 학교에선 선생님이 반 아이들 모두에게 관심을 쏟아 달라고 요구하기 무리한 측면이 있습니다. 각종 행사에 공문서 처리할 것이 좀 많습니까. 오죽하면 선생님들의 가장 큰 요구가 '학급에서 학생과 생활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았으면'하는 것이겠습니까.

꼴찌와 왕따에 관심을

어쩌면 이 때문에 학부모가 공교육에 신뢰를 다 보내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학교 교육이 너무 성과 위주로 흐르는 것도 문제입니다. 서울대에 학생을 많이 진학시키는 고등학교가 좋은 학교로 평가받다보니 인성교육 보다는 아이들의 성적에 집중해 교육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 교육의 현실입니다. 그러다보니 공부를 못하는 아이는 선생님의 관심 밖으로 떨어져나가게 되고 자연히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 보면 공교육에만 의지하다가 손해를 보는 처지에 놓였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대안학교들이 점점 늘고 있는 것을 보면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는 모양입니다.

공교육이 학업성적이 부진하거나 학교에 잘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공교육이라면 이 아이들을 더 챙겨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가만히 놔두어도 공부를 잘 하지만 못하는 아이들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학교의 목적이 올바른 사회인으로 기르는 것이라면 '꼴찌'와 '왕따'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마땅하지요.

부모와 학교의 무관심에서 아이들은 방황하기 시작합니다. 요즘같이 좋지 않은 환경이 세상살이 곳곳에 퍼져 있는 상황에선 더욱 아이들의 성장을 지켜봐야 할 것입니다. 아이가 내색하지 않더라도 어떤 상황에 놓여있는지 살펴보는 게 부모나 선생님의 역할일 것입니다. 공교육은 그늘에 있는 아이를 양지로 불러내 끌어안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아닐까요.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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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스타일의 주방장 모자가 나왔다.

머리 사이즈에 맞춰 조절이 가능하다.

통풍 기능이 뛰어나 머리가 답답하지 않다.

그리고, 급할 땐 훗훗. ^^;

 

지원이가 많이 컸다. 아직 말은 잘 못해도 다 알아듣는다. 출근할 때 쪼르르 따라 나와 배꼽 인사에 손바닥 부딪혀 '참힘땀'을 외치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다. 그런데 한번씩 어깃장을 낼 때면 오빠를 능가한다. 고집은 오빠보다 급수가 높은 듯한데 오빠 말이라면 잘 듣는다. 오빠가 하는 말이 "지원이를 다루는 데는 비결이 있는 데요, 좋게 말하고 잘 대하면 고집 안 부려요." 녀석, 육아 기술이 아빠보다 낫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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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할머니가 있습니다. 올해 아흔입니다. 치매 증세도 있습니다. 이마와 뺨에 생긴 주름살은 지나온 세월의 풍파를 얘기하는 듯합니다. 젊은 시절 늘 동백기름을 바른 머리를 뒤로 묶어서 비녀를 꽂고 다녔지만, 이제는 증손자보다도 더 짧은 머리로 뒷방에 누워 창밖 구름 따라 흐르는 세월을 물끄러미 지켜만 볼 뿐입니다.

분단으로 생이별 기구한 삶

할머니가 남편과 헤어진 지는 6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아, 올해가 건국 60년이라는군요. 우리나라의 그 60년이란 역사는 이 할머니에겐 상처의 60년인 셈입니다. 그 당시 남편과 헤어지고 지금까지 생사조차 모르는 채 살아왔으니까요. 할머니는 남편이 죽었다고 단정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일찍부터 설·추석이나 음력 구월 구일이 되면 차례상을 올리고 제삿밥을 지었습니다.

할머니의 남편은 일제 강점기 때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일본인 선생에게서 열차 기관사 교육을 받았지만, 전국을 오가며 독립군자금과 정보를 전달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45년 광복이 되기 1년여 전쯤에 왜경에 잡혀 감옥살이했습니다. 광복되기 1주일 전에 풀려났다고 하니 꽤 오랜 기간 할머니의 한숨이 이어졌을 것 같습니다.

할머니는 당시 남편 옥바라지를 하느라 생계를 제대로 잇지도 못했습니다. 남편의 그런 활동 때문에 자식도 달랑 딸 하나밖에 없습니다. 남편이 잡히기 전 독립군 끄나풀이란 게 들통이 나서 그 좋은 직장이었던 기관사도 그만두고 잠적했을 때, 할머니는 총을 들고 집으로 쳐들어온 왜경들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화선지를 얼굴에 올려놓고 물을 부어 숨을 못 쉬게 한 고문도 당하고 매질도 당했습니다.

일본 형사는 남편이 있는 곳을 대라고 하지만 댈 수가 없었습니다. 어디 있는지 알았으면 손을 묶기도 전에 댔겠지요. 그렇잖아도 집안일을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나돈 남편이 밉기만 한데 그 남편 때문에 이런 고초까지 겪어야 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라 여겼겠습니까. 거의 초주검이 되어서야 일본 형사는 풀어주었습니다. '진짜 모르는 갑다' 하면서요.

할머니는 광복되자 너무 기뻤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의 속박에서 벗어나서가 아니라, 남편이 이제는 독립운동을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살아갈 날이 눈앞에 펼쳐졌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로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를 불렀습니다. 입에 풀칠하기도 팍팍한 생활에 지친 할머니에겐 남편의 귀가는 천군만마를 얻은 것과 마찬가지였겠지요. 기관사 일을 나가면 집안이 다시 일어서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니까요.

그리움도 원망도 지친 세월

그런데 남편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어디론가 또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통일운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통일운동은 무슨 빨갱이 짓이지." 광복 후 단란한 가정을 꿈꾸었던 할머니에게 다시 닥친 이 사태는 삶의 의욕마저 꺾게 하였습니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남편이 1949년 서대문형무소에 갇혔을 때야 비로소 다시 만났습니다. 또 일년을 옥바라지했습니다.

50년 전쟁이 터지기 1주일 전쯤 남편이 '곧 전쟁이 날 것이니 진주로 가라'고 하여 돌아왔는데 그날 이후로 남편의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했습니다. 60년 세월이 흐르고 있습니다. 80년 연좌제가 없어지기 전까진 매년 경찰이 찾아왔습니다. 경찰은 할머니가 월북한 남편과 혹시 밀통하고 있지는 않나 해서 불쑥 찾아와 남편에 대한 기억을 상기시키곤 했지만, 그런대로 한 세상 살아왔습니다.

할머니의 몸은 정상이 아닙니다. 왜경과 한국경찰에 잡혀가 받은 고문으로 팔이 비틀어졌고 등이 굽었습니다. 제대로 자리에 눕기도 어렵습니다. 그럴 때마다 남편을 원망해왔습니다. "웬수가 따로 있나?" 할머니는 일본이 우리나라를 유린한 일과 남과 북이 전쟁을 일으켜 분단된 데는 원망을 하지 않습니다.

누가 그 책임을 져야 하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지 남편만 원망했을 뿐입니다. 이제는 그 원망의 눈물조차 남아있지 않습니다.

빛바랜 사진 속에 철도기관사 복장을 하고 미소 짓는 남편의 모습도 이제는 잊었습니다. 다시 만나려고, 살아보려고 안간힘을 썼던 세월이 너무나 힘들고 고통스러웠기에 모든 기억을 '망각의 상자'에 집어넣은 듯합니다. 일제의 침략만 아니었어도, 남북전쟁만 아니었어도 평생을 행복하게 살았을 할머니의 일생이, 생의 끝자락인데 건국 60년이라 하니 더욱 측은할 따름입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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