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향수병에 걸리다
봄, 아파트에 살면서 발코니 창밖으로 제법 따가울법한 햇살을 보면서 추측을 하거나 어쩌다 먹을거리를 사러 마트에 나가다 두터운 외투가 답답하게 느껴질 때 얼핏 봄을 의식한다. 그렇게 봄이 왔건만 떡시루같은 아파트에 살다보니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가 없다.
봄을 감지하고서도 오랜 만에 북면 촌집에 갔다. 촌집 마당엔 봄이 이미 자리잡고 앉아서 우리 식구를 맞이한다. 청매실 나무에 화사하게 핀 매화가 제일 먼저 눈짓을 보낸다. 절로 온몸에 따스함이 배는 듯하다.
소나무 아래 자줏빛 새순을 쫑긋 내민 작약도 손을 흔든다. 작년 봄에 거의 볼 수 없었던 녀석도 보인다. 민들레. 포도나무 밑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군락을 이루어 노란 빛을 뽐내고 있다. 화단 한구석 패랭이녀석도 날숨을 쉬며 인기척을 한다. 앵두꽃도 창고 앞에서 환하게 웃는다. 할미꽃은 어느새 보랏빛 방울소리를 내며 봄의 왈츠를 감상하고 있다. 그 옆에 작년보다 껑충 키가 커버린 천리향은 얼마나 반가우냐 하며 온몸으로 우릴 감싼다. 발아랜 아직도 노란 잔디가 겨울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나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마른 잔디 사이로 초록 머리카락을 제법 내밀었다.
촌에서 살 땐 시시때때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면서 살았는데 아파트로 이사오고 난 후 계절의 변화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산다. 그래서 생활이 더 재미 없고 따분한지 모르겠다. 촌 학교에서 적응을 못한 큰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회지로 이사왔지만 도무지 아파트 생활은 적응하기 어렵다.
어쩌다 막내 아이를 데리고 밖에 나가 산책을 하지만 그 때문에 아이가 감기라도 들면 다시 감옥생활을 시작할 수밖에 없다. 도회지는 공기도 촌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신선함이라곤 전혀 느낄 수 없다. 집 안이든 밖이든 늘 찌든 냄새가 가득하다.
아무리 빨리 돌아간다해도 아파트 전세 2년 계약이 끝나는 날이 되어야 할 테고 큰 아이 고등학교 들어가고 둘째 중학교에 들어가야 하니 2년은 족히 있어야 할 것 같다. 촌에 살 땐 별로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이렇게 떠나와서 간절해질 줄은 미처 몰랐다.
현관만 나서면 늘 보고 향기 맡던 것을 이제 사진으로만 봐야하니 이또한 도회지 생활의 각박함이라. 병될까 걱정이다.
천리향. 온몸을 감싸 안는 향기가 매혹적이다.
할미꽃. 마당 중에서도 햇살이 가장 많이 내려 앉는 곳에 자리잡고 또 가장 먼저 봄을 알리는 전령사.
작약. 처음엔 별 볼품이 없지만 함박꽃이란 또다른 이름처럼 활짝 피었을 땐 마당을 지배한다.
민들레. 작년엔 두어 송이에 불과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번식했는지... 질긴 생명력을 자랑한다더니...
매화. 이제 겨우 4년째 접어드는 청매실 나무를 장식했다. 꽃속에 담은 꿀이 얼마나 단지 벌들이 종일 어슬렁거리며 떠나질 않는다.
앵두꽃. 앵두나무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디다. 뒤늦게 꽃을 피웠는데 매화만큼이나 예쁘다. 물론 열매는 더 예쁘다. 오죽하면 앵두같은 입술이란 말이 생겼을까. 앵두를 입술에 머금고 눈을 감으면 사랑하는 여인의 입술이 그대로 와닿은 듯하니 틀린 말은 아닐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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