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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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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 대출한지 벌써 2주가 넘었건만 페이지 수로 보면 별 진척이 없다. 뭔 일들이 그리 많은 건지 읽은 것들을 정리할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렇게 밤 늦게야 책을 다시 펼쳐 눈여겨 보았던 부분을 가려내 옮긴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렇듯이 춤은 주술 가무적이고 귀신을 쫓는 벽사 가무적인 내용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춤들을 보면 그러한 성향이 특히 강하다. 하다못해 오광대라든지 야류 등 각종 탈춤 놀이에도 벽사의 성격이 진하게 배었으니 두말해 무엇하랴. 생각나는 대로 예를 더 들자면, 남해안 별신굿, 사천 적구놀이, 어제가 보름이었군, 지신밟기 놀이도 벽사의 성격이 강한, 제의성을 띤 놀이란 얘기다.


책에 서술된 내용 중에 먼저 처용무를 보자.




1. 한국 처용무


"처용무는 고대 제의로부터 출발했으며, 신라 말엽에는 용왕의 아들인 처용에 관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람이 처용 가면을 쓰고 이 춤을 추었다. 이를 시작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면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성격으로 행해지는 궁중의 나례나 왕의 행차, 중국의 사신 접대 등에서 처용무를 추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에는 궁 안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연락으로 변화되었고 현재와 같이 5인이 추는 정재가 되었다."


'5인이 추는' 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오광대를 이를 때 5와 동일한 의미여서 그렇다. 다섯 명의 처용이나 오광대의 오방신장은 모두 방향을 가리키는 수치다. 중앙과 동서남북. 고대 벽화에도 이런 방향의 주술성은 표현되고 있다. 가운데 황제를 중심으로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이들은 또한 신과 소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재의 처용무는 5명이 무대에 나가 한 줄로 서서 처용가를 부른 다음 노래가 끝나면 음양오행을 의미하는 동작과 대형으로 춤을 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 일본 다이니치 부가쿠


일본의 예술이자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의식 무용이란 설명이다. 근데 이 춤이 5세기니까 400년대부터 800년대 사이 중국과 한국에서 전해진 춤이라고 한다. 지금은 하치만타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매년 1월 2일 다이니치 사당 무대에서 이 춤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른단다.


"일반적으로 부가쿠는 궁중 아악이자 고상한 음악으로 불리는 가가쿠의 하나로 왕족과 귀족 등 상류 사회의 지원을 받아 번성했고 평화롭고 우아한 형태로 천황이 사는 궁정에서 의식을 하거나 여흥이 있을 때 행해졌다."


그리고 이 춤은 모두 신화적 표현과 제의의 하나로 연행되었고 또한 자연물에 신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과 자민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결시키는 토템 사상을 바탕으로 제의적이고 놀이 성격이 강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백마와 새들이 등장한다.




3. 타히티의 상어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 타히티의 대표 아이콘은 '여인'이다. 타이티 신화에 남태평양 바다를 누비는 상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상어가 타히티의 여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상어 이야기는 별 재미 없다. "아름다운 후아인 섬의 여자가 바깥 세상을 동경하여 상어가 되어 떠났다." 이게 책에서 소개한 전설이다.


폴리네시아를 대표하는 상어춤은 남자 게 '파오티' 여자 게 '타무레'인데 남자들은 무릎을 좌우로 재빠르게 흔들며 추고 여자들은 엉덩이를 재빠르게 탄력적으로 흔들며 춘다. 이들은 춤을 추면서 '이미히레'라고 노래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설 속 여인 상어가 사랑한 남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춤에 일가견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가 보기엔 하와이 훌라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이게 어째서 상어춤이라는 걸까. 다행히 궁금했던 부분을 책은 설명하고 있다. 

"상어와 관련된 여인들의 춤에는 상어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나타내는 동작이 있다. 한 팔을 옆으로길게 편 채 다른 팔의 팔꿈치를 뒤쪽 위로 밀어내는 동작은 상어의 지느러미를 상징하고 엉덩이를 양옆으로 천천히 S자 곡선으로 움직이는 동작은 상어의 꼬리 움직임을 상징한다."


음...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겠지. 어쨌든 이쪽 사람들은 이 춤이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한다.


4. 러시아의 춤 '봄의 제전'


러시아에선 민속춤에 따로 제목이 붙었다. 왜? 러시아 신화를 바탕으로 전해오던 것인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꿈을 꾸었다면서 인류학자 로에니치에게 말해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것을 또 니진스키가 러시아 원시 풍습을 토대로 안무한 것이 '봄의 제전'이기 때문이다. 신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자의적 구성으로 작품화되었다는 점에서 토속적 경향은 상당히 빠져나갔으리라 짐작된다.


책에선 이외에도 하회별신굿탈놀이, 봉산탈춤놀이극, 아프리카 비위티라는 춤, 그리고 피그미족의 춤과 제의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등등 여러 자료들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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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한다는 말, 쉬운 듯하면서도 정말 성립 가능성 희박한 단어다. 동지끼리야 공감이 뭐 어렵겠냐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공감은 쉬운 게 아니다. 공감이 쉬운 거였다면 우리나라가 벌써 통일하고도 남았겠지.


자녀가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고 부모는 자녀가 왜 엉뚱하고 쓸데 없는 행동을 매번 반복하는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툭하면 어깨를 으쓱거리고 손가락을 이상하게 펴서는 쭉쭉 펴는 행동을 하는, 힙합에 빠져 있는 아이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팸플릿.


또 아이는 구멍난 양말 기워주는 엄마가 이해하기 어렵고 형광등 조금 켜놓았다고 따라다니며 스위치를 내리는 아버지가 이해 안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귀가 시간 조금 늦었다고 자꾸 전화질 해대는 부모가 귀찮기만 하다.


뭐 이 정도 사례뿐이랴. 세대 간의 갈등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때엔 밥숟가락 위에 멸치 얹어주는 것도 갈등이요, 밖에 나가 밤 늦게 어딜 싸돌아 다니는지 먼저 전화 한 통 없는 자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괘씸하기도 하다.


어쩌면 공감할 수 있는 일보다 반감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세대 사이에 더 많이 끼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10년도 안되는 선후배 간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요즘 세대에 하물며 부모자식 간에랴.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를 주제로 한 연극을 보았다. 밀양 메들리의 <세대공감>. 전체 주제가 세대 간의 공감이긴 하나 드라마는 '엄마'와 '차이' 두 에피소드 외에 사회 초년생을 청년실업자로 시작하는 여성의 처지,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일상을 그렸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들도 넓게 보면 공감이 필요한 처지이긴 하다.


극단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패널.


'토로'. 강민지가 연기했다. 그가 닥힌 현실. 밀린 방세를 내야 한다. 수중에 든 돈과 내일 벌어들일 돈을 다 합쳐도 방세는 어림도 없다. 그의 하루 일정은 빡빡하다. 잠잘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도 살려면 게으름을 부려선 얼른없다. 그런데 재수 없고 안 풀리는 사람에겐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몇 푼 되지도 않은 아르바이트 일자리가 출발 몇 분 전에 취소되었다는 통보가 온다. 진절머리가 난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세상의 루저가 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청년실업자가 팝콘 튀듯이 넘쳐나는 오늘날 세태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말이 있다. 반지하 단칸방에 살며 멋들어지게 살아갈 날을 꿈꾸는 그에게 이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그야말로 '개뿔'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 말을 뇌까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개뿔 아프면 병원엘 가야지. 하지만 난 아파도 병원갈 돈도 없다."


두 번째 에피소드 '엄마'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담았다. 엄마의 존재를 되새겨보는 스토리다. 뻔한 스토리여서 이를 새롭게 하려고 관객과 소통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엄마 역을 얼떨결에 맡은 관객은 대본을 받아 연습한 것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잘 타고 연기를 펼쳤다. 여러 공연에서 느낀 것이지만 요즘은 일반 관객의 연기 수준이 장난 아니게 높다. TV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눈에 띄더니.


'엄마'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드라마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바란 적도 없고, 자식에게 희생할 생각도 전혀 없다. 스무 살 넘으면 그때부턴 무조건 독자적 노선을 밟아야 한다. 내가 그랬듯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할 것이다. 당분간 잠자리는 무상대여해 주더라도.


세 번째 에피소드 '잔상'은 좀 독특한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꿈이 진짜인지 진짜가 꿈인지 알 수 없는,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1년 전 생일 때 죽은 아내의 모습이 나타나 일상을 보여준다. 아파도 병원에 갈 생각도 않는, 그러면서 남편이 아프면 온갖 걱정 다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미련퉁이 아내의 모습에서 아내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후회스럽다.


1년 전 생일 때 노래방에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놀면서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그래서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잔상은 남편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아내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내의 방에는 국화 한송이가 꽃혀있고 자신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렇다면 아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남편이 죽은 것인가? 이런 혼란. 아쉽지만 반전이 명쾌하지 못하다. 이해를 잘 하면 줄거리가 풀리는데 이 꿈이라는 장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커다란 미로 속에서 똥이 마려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탈출을 포기해버리는 처지에 빠져버린다. 어쨌든 잔상은 부부 간에 필요한 것은 '애틋한' 관심과 배려다.


공연 끝나고 커튼콜 끝나고.... 기념 사진 촬영을 설명하는 배우들.


잔상을 통해 느낀 것은 한마디로 '있을 때 잘해'다. 오승근의 노래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그래 공연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오승근의 노래가 자꾸 되뇌인 것은 너무 주제 의식에 천착한 결과인데..., 어찌 소리 없이 울리는 그 노래가 오승근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니다. 아내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찔리는 게 있나보다. 그래 이제 술도 좀 줄여야지.


네 번째 에피소드, '차이'. 오브제는 핸드폰. 핸드폰은 세대마다 용도가 모두 다르다. 내 나이 쯤으로 설정된 드라마 속의 엄마는 나보다 훨씬 촌사람이거나 일찍 정신적으로 늙어버린, 시대 변화 부적응 인물일 것이다. 어째 50대 중후반밖에 안될 그 나이에 스마트폰으로 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단 말인가.


뭐 어쨌든 80을 넘기신 어머니와 나의 대화가 비교되는 그런 에피소드이긴 하다. 50대 중반인 내가 밥상머리 앉아서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어머니에게 정상적으로 비치는 장면은 아닐 것이므로. 나역시 아무리 팔십을 넘겼다 하지만 카톡에 사진 하나 올리지 못하는 원시인으로 변해버린 어머니가 이해 안되긴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이점을 이해하고 공감하라고 이야기한다.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이 깨춤을 춰도 되고 영상통화를 누르고서 귀에 갖다 대어도 된다.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고려를 세운 임금이 왕건인지 왕산악인지 몰라도 이해하고 유명한 패션 브랜드 샤넬이 코코샤넬로 불렸고 그 코코란 말은 '직업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또 샤넬이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지은 소설가 알렉상드로 뒤마의 애인 마리 뒤프레시이며 이 여인은 뒤마의 소설 속에서 마르그리트로 나오고 다시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에선 비올레타 발레리였다는 사실, 그리고 동백아가씨로 불린 연유가 직업여성이었던 마리 뒤프레시가 늘 흰 동백꽃을 가슴에 꽃고 있다가 생리 때가 되면 붉은 동백을 달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자는 얘기다.




부모 자식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사회 장년층과 청년층 간에,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계급 간에 서로 이해하는 공감대만 제대로 형성된다면 이 사회는 멋지게 변화할 것이다. 헌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건 인간 세계에선 불가능한 화두일 것이다. '공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란 반론이 바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그래,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낮에 후배에게 말 한 마디 잘못한 것. 그래 그럴 수 있어, 너무 자책하지마! 자기 자신부터 이해해보자.


공연 마지막 장면은 배우와 관객들이 단체사진을 찍는 씬이다. 메들리에서 홍보영상으로 사용할 것이란다. 공연예술의 아이디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끝은 없겠지만 어느 수준까지 발전하면 그게 한계라고 느끼게 될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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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페이스북 상상창꼬 페이지에 올려 공유했던 글이다. 오늘 다녀온 밀양 메들리의 <세대공감>은 상상창꼬에서 단체로 관람한 공연이었다. 공연을 보러가기 전 밀양의 연극 흐름을 알고 싶었다. 메들리의 역사가 50년이다. 25년 전 밀양연극을 취재하기 위해 밀양을 찾았을 때 그때도 변변한 극단은 메들리 뿐이었다. 작년 <다섯손가락>을 봤을 때에도 느낀 것이지만 메들리는 확실히 세대교체가 된 듯했다.


1982년 이동진 작 손경문 연출로 공연된 <배비장 알비장>.


1978년 12월 공연된 몰리에르작 손경문 연출의 <팔자 좋은 의사선생님>. 사진.자료 출처:<경남연극인물사1>



밀양엔 전통이 아주 오래된 극단이 있다. 얼마 전 경남도민일보에도 기사가 난 극단 메들리. 올해로 창단 50주년을 맞았다. 50주년 기념 첫 공연은 <세대공감>(연출 김은민) 창작극이다. 어제와 오늘 총 3차례에 걸쳐 공연되고 있다. 오늘은 오후 4시와 7시 소극장 공간사랑에서 공연된다. 상상창꼬 단원들은 7시 단체관람을 하기로 했다. 공연을 보기 전에 밀양 연극이 어떻게 발전을 이루어왔는지, 대략 밀양연극사라도 알고 관람한다면 도움되지 않을까 하여 짧게나마 정리해 본다.

자료를 보면, 우리나라에 근대연극의 효시로 1911년 임성구가 창단한 혁신단의 <불효천벌>을 꼽고 있다. 숭례문 밖 일본인 극장 어성좌에서 공연한 것이 처음이었다. 경남에서도 이 혁신단의 레퍼토리를 가져와 공연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잠깐, 이 부분. 학교에서 배우기로 우리나라의 신극 효시는 이인직의 <은세계>다. 원각사에서 열린. 그러나 신문 기사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것 외엔 공연을 한 건지, 연극형태였는지, 배우는 누가 출연했는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그래서 임성구가 일본 신파극 <뱁의 집념>을 번안한 <불효천벌> 효시로 삼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에서 처음으로 '신극'이란 이름으로 공연이 이루어진 것은 어떤 작품일까.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드러난 기록으로 보아 1912년 진주사립광림학교에서 올린 연극이라고 하는데 교장 박택이 성극 대본을 썼고 거렬휴가 졸업반 학생들을 지도해 공연했다고 한다. 조웅대의 진주연극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밀양의 연극은 조금 세월이 흐른 후에 본격화한다. 1921년 밀양구락부가 창단되는데 주로 소인극 형식의 공연이 이루어졌다고 한다.(경남연극인물사, 경남연극협회, 김소정) 밀양구락부는 밀양뿐만 아니라 부산과 김해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했다. 연극은 신파연쇄비극 <고학생 성공> <지기> 등이며 이후 양산과 안의, 하동 등에서도 공연을 했다고 한다.


국내 연극 흐름이 그러했듯 밀양의 연극도 광복 이후 활발하게 진행된다. 일제강점기 때 황금좌에서 활동했던 김열이 귀향하면서 안영, 황용우, 박노석, 김원술 등과 함께 <한양극장>에서 <탁류>를 공연하면서 본격화의 테이프를 끊게 되었다.


1945년 12월 기독교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뒤마 원작 <아! 무정>을 순회공연했고 1947년에 열린 제1회 밀양문화제는 밀양 연극활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1957년까지 왕성한 활동이 이어지는데 이 시기 대동예술사란 극단이 창단되었고 학교 중심의 연극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밀양농잠학교의 <해후>(안정 작, 박창숙 연출), 밀양여고 <바보온달>, 밀성고 <푸른성인> 등이 있다.


1964년 연극협회 밀양지부가 결성되고 1967년 손경문을 비롯한 젊은 연극인들에 의해 극단 메들리가 창단된다. 50년 전의 일이다.


메들리는 연극만 하는 단체가 아니었다. 경남도민일보 기사에서 소개한 것처럼 "이름은 '음악(Music)' '예술(Art)' '희곡(Drama)' '문학(Literature)' '젊음(Young)' 앞글자를 따서 만들었다"고 하는데 처음엔 다양한 문화활동을 펼치는 문화조직이었다.


당시 주축 멤버는 손경문을 비롯해 박근원, 박진갑, 이두옥, 안현일, 김용식, 이용주, 조영래, 최차복, 김흥묵, 유나경, 박말분 손무상, 윤성수 등이었다고 한다.


초창기 올린 작품은 <내가 반역자냐>(67.8), <아리랑>(68.8), <원고지>(68.9), <탄갱부>(68.10), <갈색 머리카락>(69.1),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69.2) <우스운 사람들>(70.8) 등이다.


이후 밀양 연극은 한동안 침체기를 겪은 다음 간간이 공연을 이어오다 1978년 메들리 창립멤버였던 손경문이 돌아와 <대왕은 죽기를 거부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산국> 등 수많은 작품을 지도하고 연출하면서 밀양 연극의 활성화를 다시 불러왔다.


메들리는 밀양의 연극사에서 큰 축을 이루고 있다. 메들리의 부침이 밀양 연극의 부침이라고 해도 크게 잘못된 표현이 아닐 것이다. 메들리는 90년대 2000년대 와서 또 침체기를 겪었다.


이 과정을 경남도민일보는 이렇게 전한다.


"1989년 연출가 손경문의 신학대학 입교를 시작으로 잦은 단원 전출과 개인 사정이 겹치면서 침체기를 맞는다. 지난 1993년 경남연극제에 <표류하는 너를 위하여> 출품 후 활동이 끊겼다. 메들리를 뿌리로 두고 각자 활동을 벌이던 단원 등은 2011년 맥을 잇기로 의견을 모은다. 박진갑, 김흥묵, 최차복 등 단원과 연극협회에서 활동하는 김은민, 김정애, 이정미 등이 뜻을 함께했다. 현재 극단 메들리 단원은 30명가량. 주 활동 인원은 10여 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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