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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오전 10시 30분.
성산아트홀 소극장에서 <싸이코패스>의
작가 안하림의 ‘사랑’학 강연이 있었다.
이 강연은 창원문화재단에서 마련한 수요문화대학의
한 커리큘럼으로 진행됐다.
수요문화대학은 사회
저명인사들을 초청해 진행하는 교양강좌로 수강생들이
소극장을 거의 채울 정도로 인기가 있는 프로그램이다.
지난 3월
16일 시작해 현재
5강까지 진행됐다.
첫날은 국립부산국악원장이 ‘21세기
글로벌 시대의 국악’이란 제목으로 강의했고,
3월 23일,
둘째 시간엔 대구가톨릭대학교 의과대 박정한
명예교수가 ‘저출산 고령사회’와 관련해 강의했으며
세번째엔 김정곤 재즈그룹 리더가 밴드와 함께 나와
직접 연주를 하며 재즈의 역사에 대해 강의했다.
4월
6일엔 시인이자 극작가이며
연출가, 교수,
그리고 밀양연극촌 촌장인 이윤택 감독이
‘셰익스피어’에 관해 강연했다.
그리고 4월 13일
선거로 한 주 쉬고 20일
안하림의 사랑학강의가 이어진 것이다.
찢어진 청바지에 검정색
반팔티, ‘TEXAS’라고
적힌 챙이모자를 쓴 그의 옷차림에서 그가 자유분방한
스타일의 사람이라는 것을 바로 느낄 수 있었다.
공공장소에선 예의를 차려야 한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혹은 “건방진
사람이군” 하고 뒷담화를 깔지도 모른다.
사랑하고는 전혀 담을
쌓고 살 표정의 젊은 작가가 수요문화대학의 어르신(?)들
앞에서 ‘사랑이란 이런 거야’하고 너스레를 떠는
모습을 가당찮게 느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랑의 깊이가 나무의 나이테처럼 세월이
정해놓는 것도 아니고 경험을 수없이 했다고 해서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닌지라 설득력 있는 설명이면
공감하는 이야기가 또한 사랑 이야기 아니겠나 싶다.
이날 어르신(ㅋㅋ)
앞에서 떠들어대던,
좋은 말로 설파한 안하림 작가의 명강연을 수첩에
메모한 대로 옮겨 적는다.
굳이 블로그에 옮겨 적어 공개하는 이유는 공감하는
바가 있어 무릇 인간이라고 자처하는 생물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이런
표현 좀 어색하긴 해.)
참,
차림새로 봐서 40대
언저린 줄 알았더니 50대란다.
우~.
거울 앞에 앉아서
립스틱이나 바르지 말고 거울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넌 누구냐?”하고
물어보라.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해”라는 말을 사람들은 너무 쉽게 쓴다.
사랑해 상습범들이다.
사랑은 아픈 것이고 슬픈 것이다.
주는 것? 소유물을
나누는 것? 선물을
주는 것? 무료봉사를
하는 것? 사랑한다는
것을 주는 것이라고 다들 잘못 알고 있다.
대가없이 준다고 해도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에게 내 것을 준다는 것은 그 행위를
통해 스스로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다.
남을 돕고 기뻐하는 것 또한 대가를 얻은 것이기에
사랑이라고 말할 수 없다.
나의 것을 남에게 주고
기뻐해 하지 마라. 내가
아닌 상대를 보고 애통해하고 낮아져라.
그것이 사랑이다.
한국사람만큼 사랑을
모르는 나라는 없다. 한국사람은
사랑을 ‘정’이라고 한다.
아니다. 정은
사랑의 후속편이다.
또한,
한국만큼 가요에 사랑노래가 많은 나라도 없다.
사랑을 이야기하면서 “말 안 해도 알잖아”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사랑에 대해 깊이 있게 질문을
하게 되면 결국 ‘아집’을 드러내고 만다.
사랑을 소유라고 여기는 것이다.
에리히 포럼은 인간을
소유적 인간과 존재적 인간으로 나눴다.
여러분은 소유적 인간인가 존재적 인간인가.
남편이 늦게 들어왔을 때 “어디 갔다 왔어?”하고
묻는다면 소유적 인간이다.
하물며 남편의 친구마저 소유하려고 한다.
“당신 친구 말이야,
그 친구는 왜 그렇게 산대?”
자녀는 말할 것도 없다.
많은 사람이 소유하고자
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런 경우도 있다.
주말 Tv만 보고
있는 남편에게 “맨날 Tv야,
나도 좀 봐라!”고
하고선 남편이 자기를 보면 보기 싫다며 고개를 돌리는
아내들. 이런 사람은
결핍의 존재다.
존재적 인간은 남편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 한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가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백세인생 시대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인문학적 성찰을 나누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공자 이야기는 좋아하지
않지만 공자는 좋아한다.
공자가 길을 걷다가 엄마젖을 빨고 있는 돼지새끼들을
보았다. 한동안 그렇게
젖을 빨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돼지새끼들이 놀라
뿔뿔이 흩어졌다. 왜일까?
여러 사람에게 질물을
던졌는데,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나도
전혀 모르겠다. 자연과학적으로
사고했기 때문이다. 정답은
‘사랑’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표현하면 아무도 알아듣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알아차렸다면
당신은 천재다.
엄마돼지의 젖에는
젖만 아기돼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사랑도 함께
전달된다. 그런데
엄마돼지가 죽음으로써 아기돼지들은 엄마돼지의
사망을 직감하게 되고 젖은 나오지만 사랑이 끊긴 순간
불길한 감정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자궁은 완벽한
에덴동산이다. 인간의
고향이다. 엄마의
사랑이 온전히 전달되는 곳이기도 하다.
아이가 태어날 때 그렇게 울어대는 것은 탯줄로
연결된 사랑의 통로가 끊겼기 때문이다.
그럴 때 엄마가 아기를 가슴에 안으면 금세 울음을
그친다. 익숙한 심장소리를
듣고 사랑이 멀리 가지 않았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책임,
희생, 만족,
이 세 가지를 체득하지 못하면 사랑을 알았다
말할 수 없다.
사랑은 어디서 왔을까?
형이상학에서 나와 형이하학을 살면서 다시
형이상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죽음, 즉 형이상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중요하다.
천상병 시인은 ‘귀천’에서 세상 소풍 마치고
돌아가 즐거웠노라고 한다 했다.
톨스토이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결혼을 해서 13명의
자녀를 낳았다. 그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는 내용은 그가 열심히 아내와
싸우면서 산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녀가 열셋이라니.
모자람 없이 살았던 그는 행복했을까?
톨스토이가 50먹던
해에 길을 걷다가 자신의 하녀가 사는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창문으로 다가가 안을 들여다 보니 하녀의 가족이 빵
한 조각을 식탁에 올려놓고 감사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여기서 톨스토이는 충격을 먹었다.
비로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이고 행복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것이다.
안하림,
자신도 톨스토이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마흔다섯 살까지 오렌지족으로 살다가 어느 날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죽음에 직면하는 순간 깨달았단다.
밤새 울면서 다시는 돼지우리(IT기업
사업가)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지금의 생활을 시작한 거라고 한다.
사명을 다하고 살았나?
그는 며칠 전 죽을 것 같은 뇌압을 느꼈다고 했다.
세사 일절 병원이라곤 모르던 사람인데 응급실을
찾아갔더란다. 초음파에
CT에,
MRI까지 찍고 밝혀진 병명은 ‘과로’란다.
주변 응급실 환자에 비하면 명함도 못 내밀
병명이다. 쪽팔려서
더는 못 있고 9시간
만에 퇴원했단다.
곧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을 때 그가 떠올린 말이 사명이었다.
사명을 다하고 죽어야 하는데 아직 초등학교
다니는 아이가 있으니 사명을 다했다고 할 수 없다.
이 순간 몰입에서 벗어났다.
그가 뭐라고 했는지 알지 못한다.
왜냐면, 바로 그
순간 나는 나의 세상에 몰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명을 다한다는 것은 어떤 상태가 되는 것일까?
다들 자식 새끼 성장해서 혼인을 시키면,
즉 애들 치우고 나면 이제 할 일 다했다고 하면서
여한이 없다고 하니 그때가 사명을 다하는 때인가?
아니면 내가 세상에 별 미련이 없어질 때가 사명을
다한 때인가? 화두로다.”
그러는 사이 1시간
30분이 다 흘렀다.
정신을 차리자 안하림 작가는 다음에 또 불러주면
또 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창원을 처음 왔다고 했다.
아,
뜻밖의 선물을 받았다.
수강생 모두 받은 거지만.
안하림 작가가 쓴 <스토리텔링으로
힐링하라>라는
책이다. 카드 체크하고
소극장에 들어설 때 관계자가 불쑥 내민 책을 엉겁결에
받았는데, 내용이
괜찮다. 한 번씩 아무
페이지나 열어서 읽어도 상관없을 만큼 부담없는
책이다. 땡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