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 재미있었단 표현이 적절한 레몬레이드
오 선생과 정 여사 에피소드 장면./상상창꼬
오 선생과 정 여사 에피소드 중 과거 회상 장면./상상창꼬
연극을 보기 전 닐 사이먼의 희곡 ‘굿 닥터’를 어느 정도 읽었더랬다. 어쩌면 이건 올바른 관극 태도가 아닐 수 있다. 선입견을 만들기 때문이다. 스토리는 장르가 무엇이든 같은 내용이라면 먼저 접한 것에 감동을 느낄 수밖에 없다. 대체로. 유명한 소설이 영화나 다른 장르로 재탄생하게 되었을 때 감동이 반감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기사를 작성해야 하는 처지에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꼭 기사 작성을 위한 핑계로 닐 사이먼의 희곡을 읽은 것은 아니다. 여기엔 한때 연극을 했던 사람으로 몸에 밴 못된 습관이 발휘된 측면이 있다는 걸 무시할 수 없다. 얼마나 어떻게 각색을 했을까?
처음에 희곡을 읽으면서 닐 사이먼은 안톤 체호프의 콩트 9개를 선택했을까 생각했다. 고개가 주억거려지는 이유는 이 여덟 개의 인생 단편이 사람들에게 가장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김소정 감독(Director)은 ‘재채기’와 ‘가정교사’, ‘치과의사’, ‘늦은 행복’, ‘겁탈’, ‘물에 빠진 사나이’, ‘오디션’, ‘의지할 곳 없는 신세’, ‘생일선물’ 중에서 다시 다섯 개를 뽑아냈다.
첫 번째 에피소드, ‘재채기’. 연극 공연을 보러 갔다가 상관을, 그것도 아주 높은 분을 만났는데, 잘만 보이면 출세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재채기 한 번으로 날려버리는 황당하고도 갑갑한 사건을 다뤘다. 장관의 말대로 사람이라면 한 번의 실수는 있는 법. 하지만 소심한 작자 이반은 자기 마음이 내킬 정도의 용서를 장관으로부터 받아야 편히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애면글면하다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든 꼴이 되고 만다.
각색 부분인 장면이 인상 깊다. 이반의 나이트매어. 장관과 장관의 부인이 흡사 드라큘라 차림으로 나타나 이반의 향해 재채기를 하며 괴롭힌다. 기발한 아이디어다.
두 번째 에피소드 ‘오 선생과 정 여사’는 어렸을 때 한 동네 살았던 오빠와 동생의 이야기다. 좋아했지만 결혼할 수 없었던, 그러면서도 잊지 못하고 다 늙어서 옛 사랑이 다시 찾아오는, 그런 이야기. 살다 보면 이런 사연, 꼭 나 아니어도 주변에서 종종 들을 수 있는 소재가 아닐까 싶다. 노래에도 나오는 갑돌이와 갑순이, 걔들이 이런 인생의 표본 아니던가. 또 얼핏 중첩되는 장면이 떠오른다.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오두리, 아니 오말순을 좋아하는 박씨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 장면, 잠든 오 선생을 잠시 내려다 보다 선물 받은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떠나는 정필순의 뒷모습이 너무 아쉽다. 안 될 인연은 어떻게 해서라도 안 되는 것인가.
겁탈 장면들./상상창꼬
세 번째 에피소드. ‘겁탈’. 카사노바 피터의 이야기다. 자신의 유부녀 꼬시기 실력을 보여준답시고 친구의 아내에게 작업을 거는 망나니에게 불어닥친 결말은? 치명적이다. 관객에겐 충격적이다. “쫙~!” 때려도 그렇게 세게 때릴 수가 없다. 진정성이 없는 사랑으로 사람을 농락하는 망나니에게 가해지는 벌칙이라면, 그 정도의 따끔함이 부족하겠지만... 아무튼. 배우 강주성, 되게 아팠겠다.
아, 배우 최지훈 ‘재채기’에서 장관 역을 맡았고 이번 에피소드에선 피터의 친구 닉키 역을 맡아 능청스럽게도 멍청한 역을 제대로 소화했다. 긴장된 표정이 얼굴에서 완전히 지워진 건 아니지만 능글스러울 정도로 관객의 웃음을 자아냈다.
네 번째 에피소드. 오디션. 시골에 사는 열혈 소녀 니나의 이야기다. 모스크바에 있는 극단에 들어가기 위해 니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준비를 해왔다. 그러나 단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대사 한 번 쳐보지 못하고 물러나야 할 상황이다. 마지막으로 애원한다. 대사 한 번만 해보고 돌아가게 해 달라고.
목소리만 나오는 감독은, 줄거리로 보아 감독은 안톤 체호프일 것이다. 워딩 속에서 그걸 느꼈다. 감독은 마지못해 허락하는데, 니나는 감독이 쓴 대본을 제대로 소화하며 연기한다. 그러고 인사하며 나가는데... 뒤늦게 감독의 목소리. “아, 아가씨!” 감독은 뻘 속에서 반짝이는 귀한 진주를 발견한 거겠지.
치과의사 장면들./상상창꼬
마지막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치과의사’다. 이처럼 재미있는 슬랩스틱 코미디를 전에 본 적이 있었던가. 빼빼로 강주성과 뚱뚱이 최지훈의 콤비 플레이가 ‘치과의사’ 원작의 매력을 더욱 상승시킨 듯하다. 다시 말해 원작보다 더 재미있는 각색이었다. 그것은 두 배우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번 공연, 준비 기간이 짧았다는 얘길 들었다. 짧은 준비기간치고는 작품 해석은 잘 된 편이고 관객에게 웃음을 선사하기엔 충분했다. 하지만 대사를 치는 중에 발생한, 눈에 크게 띄지 않지만 그래도 보이는 버벅, 혹은 삐걱거림이 극의 완성도를 낮추는 데 일정 역할을 했다. 프로극단다운 면모를 차츰 갖춰나갈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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