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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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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상상창꼬 김소정 예술감독의 '재미있는 연극이야기' 2강은 1강에서 예고했듯이 양식극에 관해서다. 얼핏 양식극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어려울 수 있겠다. 양식극이란 줄거리를 가진 서사극에 대비되는 극의 표현양식으로 부조리극, 이미지극, 비주얼 연극 등을 일컫는다.


그렇다면 이 양식극의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줄거리가 없으며, 둘째 주인공이 캐릭터는 있으나 배경 설명이 없고, 셋째 결말이 없는 오픈 엔딩이라는 것이다. 해피엔딩도 아니고 언해피엔딩도 아니고... 어? 연극이 끝난 줄도 모르는 가운데 연극이 끝나는... 이러한 엔딩 처리는 소설에서도 많이 나타난다. TV에서도 베스트극장이라든지 TV소설 등에서 써먹기도 한 스토리 양식이다.


2강의 첫 작품은 그 유명한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워낙 유명해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이 작품이 양식극 강좌의 첫 주인공이 된 이유는 부조리극의 고전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보았거나 대본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극의 전개 상황이 정말 재미없다. 몇몇 등장인물이 나와서 별 시덥잖은 이야기를 풀어놓는 수준이다.




무대는 황량한 시골길이고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그들은 누군가를 기다린다. 고도 씨. 에스트라공은 신발을 벗으려 애를 쓰고 블라디미르는 도둑에 관한 얘길 한다. 잠시 후 포조가 노예 러키를 긴 끈을 목에 걸고 등장한다. 이들 역시 별 시덥잖은 이야기로 시간을 보낸다. 그저 별 의미 없는 행동들.


포조와 러키가 떠나고 잠시 후 소년이 나타나 한마디 한다.


"오늘 미스터 고도는 안 온대요."


2막도 별 다르지 않다. 다만 바짝 말라 가지가 앙상했던 나무에 초록색의 잎사귀가 몇 개 달려 있다는 것만 빼고. 역시 1막처럼 소년이 나타나 한다는 말은,


"오늘 미스터 고도는 안 온대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낙담한 나머지 자살을 시도한다. 죽는 게 그리 쉬운가. 자살을 내일로 미룬다. 혹시 내일이라도 고도는 오려나?


정말 재미 없는 이 작품은 수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관련 논문만 하더라도 강의실 한가득이라는 김소정 감독의 설명이다. 학교 다닐 때 한창 연극에 빠졌더랬는데, 그때 고도를 손에 쥔 적이 있었다. 작품 해설을 위한 자료는 도서관 논문 코너에 도서카드 서랍 한통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던 것을 기억한다. 손에서 놓은 이유는 단지 하나, 너무 재미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신 손에 쥔 대본이 유진오닐의 '몽아'였다. 결과적으로 많이 아쉬운 작품이긴 했지만.


그건 그렇고, 그렇게 재미 없는 작품 이 <고도를 기다리며>는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다. 어쩌면 문학사적 전기를 마련했다는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뭐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의 일상.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면서 그걸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하이데거는 '권대'라고 표현했단다. 더해서 까뮈는 일상을 '무의미'라고 했고. 그 이유가 삶의 끝을 '죽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권태로운 일상을 벗어나는 길은 '고도'에서 두 등장인물이 시도했던 그 자살밖에 없는가? 아니다. 까뮈는 "버텨라" 하고 말했다. 버티는 방법 중에 가장 효과적인 것으로 '반항'을 제시했다.


그리스 신화에 보면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존재는 대부분 '영웅'이 된다. 그런데 시지프스는 죽음의 신을 속였다는 죄로 영원히 하데스 언덕에 바위를 올려야하는 형벌을 받는다. 올리면 굴러떨어지고 또 올리면 굴러떨어지고 매일 똑같은 일상의 반복, 고된 노동이 그에게 떨어진 형벌이다. 까뮈는 여기서 시지프스의 자각을 발견했다. 바위가 굴러떨어진 다음 산을 내려오면서 그가 한 생각.


'다시 바위를 산 위로 올려야지.'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고 스스로 행동을 결정하는 자각을 하게 됐단 얘기다. 그것을 까뮈는 반항이라고 했다. 반면 하이데거는 죽음까지 버티기로 '시간죽이기'를 제시했다. 이 시간죽이기가 적나라하게 반영된 작품이 바로 '고도를 기다리며'라고 한다.


다음, 두 번째 작품으로 타데우즈 칸토르의 <비에폴 비에폴>을 봤다. 타데우즈 칸토르는 '죽음의 연극'을 주로 다루었다. 그가 죽음에 천착한 데엔 이유가 있다. 그의 성장배경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는 폴란드 사람으로 유대인이다. 그가 겪은 환경, 바로 독일의 나치가 폴란드를 점령해 유대인들을 대량학살한 홀로고스트 사건의 한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다.


나치의 철권통치 아래에서도 그는 지하에서 연극을 통해 저항운동을 했다. <빌로폴 빌로폴>은 그의 유년시절 방이 배경이다. 단검이 장착된 소총을 어깨에 걸친 군인들이 인형처럼 한무리를 지어있고 여자 인형으로 분장한 여성이 등장하는데, 군인 한 사람과 결혼식을 올리는 모양이다. 인형놀이를 하다 주인공은 구형 사진관 카메라로 촬영을 하는데 그것이 대포로 변한다. 대사는 거의 없이주인공의 인형놀이는 한참 진행되고 군인들이 여성을 유린하는 장면도 보여준다. 전쟁의 비극을 보여주려는 의도일 것이다. 극에 나타나는 십자가와 군인이 들고 가는 인형의 모습이 유사하다.


타데우즈 연극의 또다른 특징은 연출인 타데우즈가 무대에 등장해 큐사인을 넣는다는 것이다. 일종의 해설자의 역할이기도 하다. 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구조일터. 그의 무대에 등장하는 오브제, 즉 각종 소품과 인형, 십자가 등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한다.




세 번째로 본 작품은 로버트 윌슨의 <셰익스피어 소네트>다. 로버트 윌슨은 건축가였다고 한다. 무대에 건축미학을 접목시켜 설치하고 원색 조명을 많이 사용하여 이미지극을 창출했다. 역시 극은 줄거리가 없고 사건도 없고 그래서 갈등 구조도 없다.


<셰익스피어 소네트>에선 추상적이고도 큰 무대장치에 배우들의 움직임이 눈에 띈다. 때론 아주 느리게 움직이기도 한다. 연극의 형태에 대한 색다른 체험이었다.


마지막 작품은 필립 장띠의 비주얼극 <표류>와 <나를 잊지 마세요> 두 작품을 봤다. 이 작품들은 연극이라기보다 오히려 무용에 가까웠다. 연극과 무용의 경계를 허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좁은 공간 위 상자 속에 있는 사람들이 상자를 쓰고 상자의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과 파도치는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은 <표류>, 커다란 천을 이용해 독특한 퍼포먼스를 펼치며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는 <나를 잊지 마세요>. 작품들이 너무 무용적 요소들이 강해 글로 묘사하기가 쉽지 않다. 


어쨌든 이미지나 비주얼을 강조한 연극들이었는데, 김소정 감독이 지금까지 보여준 신체극의 몇몇 장면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이러한 극의 양식은 아직 국내에 널리 퍼져 있지 않다. 아방가르드는 그 표현양식이 무궁무진한 것 같다. 미술에서도 어느 정도 구상화가 시대를 장식할 무렵 추상화가 나타나 주류에 도전했던 것처럼 연극 역시 그러한 역사의 매커니즘을 따라갈 것이란 추측을 해본다.


김소정 감독은 이러한 연극의 흐름을 이야기하면서 "한국 연극에서 이러한 양식극을 부분부분 도입하고 있는데, 앞으로 이게 대세가 되지 않을까"하고 점치기도 했다. 다음주는 뮤지컬로 3강이 이어진다.


2017/02/08 - [돌이끼의 문화읽기] - 재미있는 연극 이야기-화요명작예술감상회 1강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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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춤을 추는가?>, 대출한지 벌써 2주가 넘었건만 페이지 수로 보면 별 진척이 없다. 뭔 일들이 그리 많은 건지 읽은 것들을 정리할 여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이렇게 밤 늦게야 책을 다시 펼쳐 눈여겨 보았던 부분을 가려내 옮긴다.


"세계의 대부분 지역에서 그렇듯이 춤은 주술 가무적이고 귀신을 쫓는 벽사 가무적인 내용으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춤들을 보면 그러한 성향이 특히 강하다. 하다못해 오광대라든지 야류 등 각종 탈춤 놀이에도 벽사의 성격이 진하게 배었으니 두말해 무엇하랴. 생각나는 대로 예를 더 들자면, 남해안 별신굿, 사천 적구놀이, 어제가 보름이었군, 지신밟기 놀이도 벽사의 성격이 강한, 제의성을 띤 놀이란 얘기다.


책에 서술된 내용 중에 먼저 처용무를 보자.




1. 한국 처용무


"처용무는 고대 제의로부터 출발했으며, 신라 말엽에는 용왕의 아들인 처용에 관한 설화를 바탕으로 한 사람이 처용 가면을 쓰고 이 춤을 추었다. 이를 시작으로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면 악귀를 물리치는 벽사의 성격으로 행해지는 궁중의 나례나 왕의 행차, 중국의 사신 접대 등에서 처용무를 추었다. 그러다가 조선 중기에는 궁 안에서 잔치를 베풀고 즐기는 연락으로 변화되었고 현재와 같이 5인이 추는 정재가 되었다."


'5인이 추는' 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오광대를 이를 때 5와 동일한 의미여서 그렇다. 다섯 명의 처용이나 오광대의 오방신장은 모두 방향을 가리키는 수치다. 중앙과 동서남북. 고대 벽화에도 이런 방향의 주술성은 표현되고 있다. 가운데 황제를 중심으로 동청룡, 서백호, 남주작, 북현무. 이들은 또한 신과 소통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현재의 처용무는 5명이 무대에 나가 한 줄로 서서 처용가를 부른 다음 노래가 끝나면 음양오행을 의미하는 동작과 대형으로 춤을 추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2. 일본 다이니치 부가쿠


일본의 예술이자 사회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의식 무용이란 설명이다. 근데 이 춤이 5세기니까 400년대부터 800년대 사이 중국과 한국에서 전해진 춤이라고 한다. 지금은 하치만타 지역의 무형문화재로 매년 1월 2일 다이니치 사당 무대에서 이 춤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을 치른단다.


"일반적으로 부가쿠는 궁중 아악이자 고상한 음악으로 불리는 가가쿠의 하나로 왕족과 귀족 등 상류 사회의 지원을 받아 번성했고 평화롭고 우아한 형태로 천황이 사는 궁정에서 의식을 하거나 여흥이 있을 때 행해졌다."


그리고 이 춤은 모두 신화적 표현과 제의의 하나로 연행되었고 또한 자연물에 신이 있다고 믿는 애니미즘과 자민족의 기원을 특정 동식물과 연결시키는 토템 사상을 바탕으로 제의적이고 놀이 성격이 강한 게 특징이라고 한다. 사진을 보니 백마와 새들이 등장한다.




3. 타히티의 상어춤


남태평양 폴리네시아 섬들 중에서 가장 큰 섬. 타히티의 대표 아이콘은 '여인'이다. 타이티 신화에 남태평양 바다를 누비는 상어 이야기가 나오는데 이 상어가 타히티의 여인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상어 이야기는 별 재미 없다. "아름다운 후아인 섬의 여자가 바깥 세상을 동경하여 상어가 되어 떠났다." 이게 책에서 소개한 전설이다.


폴리네시아를 대표하는 상어춤은 남자 게 '파오티' 여자 게 '타무레'인데 남자들은 무릎을 좌우로 재빠르게 흔들며 추고 여자들은 엉덩이를 재빠르게 탄력적으로 흔들며 춘다. 이들은 춤을 추면서 '이미히레'라고 노래하기도 하는데 이는 전설 속 여인 상어가 사랑한 남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춤에 일가견이라고는 전혀 없는 우리가 보기엔 하와이 훌라춤과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이게 어째서 상어춤이라는 걸까. 다행히 궁금했던 부분을 책은 설명하고 있다. 

"상어와 관련된 여인들의 춤에는 상어의 지느러미와 꼬리를 나타내는 동작이 있다. 한 팔을 옆으로길게 편 채 다른 팔의 팔꿈치를 뒤쪽 위로 밀어내는 동작은 상어의 지느러미를 상징하고 엉덩이를 양옆으로 천천히 S자 곡선으로 움직이는 동작은 상어의 꼬리 움직임을 상징한다."


음... 그렇다고 하니 그런 줄 알아야겠지. 어쨌든 이쪽 사람들은 이 춤이 인간의 몸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언어라고 한다.


4. 러시아의 춤 '봄의 제전'


러시아에선 민속춤에 따로 제목이 붙었다. 왜? 러시아 신화를 바탕으로 전해오던 것인데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꿈을 꾸었다면서 인류학자 로에니치에게 말해 시나리오를 만들고 이것을 또 니진스키가 러시아 원시 풍습을 토대로 안무한 것이 '봄의 제전'이기 때문이다. 신화를 바탕으로 했다지만 자의적 구성으로 작품화되었다는 점에서 토속적 경향은 상당히 빠져나갔으리라 짐작된다.


책에선 이외에도 하회별신굿탈놀이, 봉산탈춤놀이극, 아프리카 비위티라는 춤, 그리고 피그미족의 춤과 제의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다. 등등 여러 자료들은 다음 기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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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한다는 말, 쉬운 듯하면서도 정말 성립 가능성 희박한 단어다. 동지끼리야 공감이 뭐 어렵겠냐만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과의 공감은 쉬운 게 아니다. 공감이 쉬운 거였다면 우리나라가 벌써 통일하고도 남았겠지.


자녀가 부모를 이해하기 어렵고 부모는 자녀가 왜 엉뚱하고 쓸데 없는 행동을 매번 반복하는지 상식을 가진 인간으로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길거리를 다니면서 툭하면 어깨를 으쓱거리고 손가락을 이상하게 펴서는 쭉쭉 펴는 행동을 하는, 힙합에 빠져 있는 아이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팸플릿.


또 아이는 구멍난 양말 기워주는 엄마가 이해하기 어렵고 형광등 조금 켜놓았다고 따라다니며 스위치를 내리는 아버지가 이해 안된다. 그 뿐만 아니라 귀가 시간 조금 늦었다고 자꾸 전화질 해대는 부모가 귀찮기만 하다.


뭐 이 정도 사례뿐이랴. 세대 간의 갈등은 아주 다양하게 나타난다. 어떤 때엔 밥숟가락 위에 멸치 얹어주는 것도 갈등이요, 밖에 나가 밤 늦게 어딜 싸돌아 다니는지 먼저 전화 한 통 없는 자식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괘씸하기도 하다.


어쩌면 공감할 수 있는 일보다 반감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세대 사이에 더 많이 끼어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10년도 안되는 선후배 간에도 세대 차이를 느낀다는 요즘 세대에 하물며 부모자식 간에랴.


세대 간의 갈등과 이해를 주제로 한 연극을 보았다. 밀양 메들리의 <세대공감>. 전체 주제가 세대 간의 공감이긴 하나 드라마는 '엄마'와 '차이' 두 에피소드 외에 사회 초년생을 청년실업자로 시작하는 여성의 처지, 아내의 빈자리를 그리워하는 남편의 일상을 그렸다. 물론 이들의 이야기들도 넓게 보면 공감이 필요한 처지이긴 하다.


극단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만들어 놓은 패널.


'토로'. 강민지가 연기했다. 그가 닥힌 현실. 밀린 방세를 내야 한다. 수중에 든 돈과 내일 벌어들일 돈을 다 합쳐도 방세는 어림도 없다. 그의 하루 일정은 빡빡하다. 잠잘 시간이 별로 없다. 그래도 살려면 게으름을 부려선 얼른없다. 그런데 재수 없고 안 풀리는 사람에겐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몇 푼 되지도 않은 아르바이트 일자리가 출발 몇 분 전에 취소되었다는 통보가 온다. 진절머리가 난다. 그렇다고 고향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 그는 세상의 루저가 될 것이라는 걱정이 앞선다. 청년실업자가 팝콘 튀듯이 넘쳐나는 오늘날 세태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에피소드다.


"아프니까 청춘이다"란 말이 있다. 반지하 단칸방에 살며 멋들어지게 살아갈 날을 꿈꾸는 그에게 이 "아프니까 청춘"이란 말은 그야말로 '개뿔'이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이 말을 뇌까린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개뿔 아프면 병원엘 가야지. 하지만 난 아파도 병원갈 돈도 없다."


두 번째 에피소드 '엄마'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을 걱정하는 엄마의 마음을 담았다. 엄마의 존재를 되새겨보는 스토리다. 뻔한 스토리여서 이를 새롭게 하려고 관객과 소통하는 기법을 활용했다. 엄마 역을 얼떨결에 맡은 관객은 대본을 받아 연습한 것처럼 스토리의 흐름을 잘 타고 연기를 펼쳤다. 여러 공연에서 느낀 것이지만 요즘은 일반 관객의 연기 수준이 장난 아니게 높다. TV 개그 프로그램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눈에 띄더니.


'엄마'란 존재의 본질은 무엇일까? 드라마는 '희생'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난, 동의할 수 없다.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희생을 바란 적도 없고, 자식에게 희생할 생각도 전혀 없다. 스무 살 넘으면 그때부턴 무조건 독자적 노선을 밟아야 한다. 내가 그랬듯 자식들에게도 그것을 요구할 것이다. 당분간 잠자리는 무상대여해 주더라도.


세 번째 에피소드 '잔상'은 좀 독특한 구조로 이야기가 진행됐다. 꿈이 진짜인지 진짜가 꿈인지 알 수 없는, 장자의 호접몽을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다. 1년 전 생일 때 죽은 아내의 모습이 나타나 일상을 보여준다. 아파도 병원에 갈 생각도 않는, 그러면서 남편이 아프면 온갖 걱정 다하는,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는 미련퉁이 아내의 모습에서 아내에게 얼마나 못할 짓을 했는지 후회스럽다.


1년 전 생일 때 노래방에서 코가 비틀어지도록 놀면서 아내의 전화를 받지 않았던, 그래서 아내가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날의 잔상은 남편이 생각했던 것과 다르다. 아내는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 일상으로 돌아간다. 아내의 방에는 국화 한송이가 꽃혀있고 자신의 사진이 놓여있다. 그렇다면 아내가 죽은 것이 아니라 남편이 죽은 것인가? 이런 혼란. 아쉽지만 반전이 명쾌하지 못하다. 이해를 잘 하면 줄거리가 풀리는데 이 꿈이라는 장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커다란 미로 속에서 똥이 마려워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탈출을 포기해버리는 처지에 빠져버린다. 어쨌든 잔상은 부부 간에 필요한 것은 '애틋한' 관심과 배려다.


공연 끝나고 커튼콜 끝나고.... 기념 사진 촬영을 설명하는 배우들.


잔상을 통해 느낀 것은 한마디로 '있을 때 잘해'다. 오승근의 노래 '있을 때 잘해, 후회하지 말고'. 그래 공연을 보면서 머릿속에는 오승근의 노래가 자꾸 되뇌인 것은 너무 주제 의식에 천착한 결과인데..., 어찌 소리 없이 울리는 그 노래가 오승근의 목소리가 아니다. 그렇다고 내 목소리도 아니다. 아내의 목소리다. 아무래도 내가 뭔가 찔리는 게 있나보다. 그래 이제 술도 좀 줄여야지.


네 번째 에피소드, '차이'. 오브제는 핸드폰. 핸드폰은 세대마다 용도가 모두 다르다. 내 나이 쯤으로 설정된 드라마 속의 엄마는 나보다 훨씬 촌사람이거나 일찍 정신적으로 늙어버린, 시대 변화 부적응 인물일 것이다. 어째 50대 중후반밖에 안될 그 나이에 스마트폰으로 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는단 말인가.


뭐 어쨌든 80을 넘기신 어머니와 나의 대화가 비교되는 그런 에피소드이긴 하다. 50대 중반인 내가 밥상머리 앉아서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은 어머니에게 정상적으로 비치는 장면은 아닐 것이므로. 나역시 아무리 팔십을 넘겼다 하지만 카톡에 사진 하나 올리지 못하는 원시인으로 변해버린 어머니가 이해 안되긴 마찬가지다.


드라마는 이점을 이해하고 공감하라고 이야기한다. 스마트폰 위에서 손가락이 깨춤을 춰도 되고 영상통화를 누르고서 귀에 갖다 대어도 된다. 그럴 수 있음을 이해하면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 고려를 세운 임금이 왕건인지 왕산악인지 몰라도 이해하고 유명한 패션 브랜드 샤넬이 코코샤넬로 불렸고 그 코코란 말은 '직업여성'을 가리키는 말이었다는 것을, 또 샤넬이 모델로 삼았던 사람이 <몽테 크리스토 백작>을 지은 소설가 알렉상드로 뒤마의 애인 마리 뒤프레시이며 이 여인은 뒤마의 소설 속에서 마르그리트로 나오고 다시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에선 비올레타 발레리였다는 사실, 그리고 동백아가씨로 불린 연유가 직업여성이었던 마리 뒤프레시가 늘 흰 동백꽃을 가슴에 꽃고 있다가 생리 때가 되면 붉은 동백을 달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있더라도 너그러이,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자는 얘기다.




부모 자식 간에, 스승과 제자 간에, 사회 장년층과 청년층 간에,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계층과 계급 간에 서로 이해하는 공감대만 제대로 형성된다면 이 사회는 멋지게 변화할 것이다. 헌데... 말은 이렇게 하지만 이건 인간 세계에선 불가능한 화두일 것이다. '공감 같은 소리 하고 있네'란 반론이 바로 튀어나오는 듯하다.


그래, 아주 작은 것부터 시작해보자. 내가 낮에 후배에게 말 한 마디 잘못한 것. 그래 그럴 수 있어, 너무 자책하지마! 자기 자신부터 이해해보자.


공연 마지막 장면은 배우와 관객들이 단체사진을 찍는 씬이다. 메들리에서 홍보영상으로 사용할 것이란다. 공연예술의 아이디어는 계속 진화하고 있다. 끝은 없겠지만 어느 수준까지 발전하면 그게 한계라고 느끼게 될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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