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화 속 코드3-1]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
늘 그림을 보지만 종종 그림을 읽기도 한다. "그림과 대화하라." 지난주와 이번주 마산도서관에서 '명화의 비밀코드'에 관해 강의한 이성희 미학자의 말을 다시 새겨본다. 그림과의 대화는 때론 쉽기도 하고 때론 그림이 꽉 막혔는지 내가 꽉 막혔는지 모를 정도로 대화가 안 되기도 한다. 뭐 사람도 그러하듯이.
오늘은 벌초 가느라 강의를 듣지 못했다. 어제와 지난 두 첫 강의, 두 개를 들었는데 뭔가 포만감이 느껴질 정도의 지식을 많이 섭취한 듯하다. 벌초까지 다녀온 터라 몸이 거의 녹초상태지만 오늘 이것을 정리해놓지 않으면 한동안 기억 속에 머물기야 하겠지만 메모리 한계에 부닥치거나 어느날 재부팅 후 기억에서 사라질 지도 모른다. 그냥 휘~익 날려버리기엔 너무 아까워서 언제든지 꺼내서 써먹을 수 있게 기억의 주소를 하나 마련해 둔다.
1. 벨라스케스의 '실 잣는 여인들'(1655년)
벨라스케스는 스페인 사람이다. 바로크시대 화가. 루벤스와 함께 이름이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벨라스케스 작품 '시녀들'이라는 그림도 제법 유명하다.
이 '실 잣는 여인들'이란 작품은 마드리드에 있는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 속으로 들어가보자.
다섯 여인이 어두운 곳에서 실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햇빛이 드는 안쪽 공간에는 귀족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아... 귀족들의 밝은 생활과 가난한 사람들의 어두운 생활을 그렸나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게 보편적일 것 같다.
그림 속에서, 그런 스토리 말고는 건져낼 만한 어떠한 코드도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나는 무식하니까.
그림에 관한 설명을 듣고 나서는, 제대로 그림을 읽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지식을 습득해야 하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이 그림을 제대로 읽어내기 위해선 우선 밝은 쪽 그림의 상황을 이해해야 한다. 무슨 장면일까?
여인들이 모여있는 곳에 투구를 쓴 사람이 손을 들고 있다. 이 장면을 우선 이해하지 못하면 그림을 읽어낼 수가 없다. 투구 쓴 사람은 대체 누구인가? 오비디우스의 소설 <변신>을 읽었거나 그리스 로마 신화를 유심히 본 이라면 이 상황을 잡아낼 수 있다.
아라크네 이야기다. 그리스 시대 길쌈이 뛰어났던 아라크네는 자신의 직조 기술이 인간이라면 감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의 실력을 지녔다. 어느 누구도 아라크네만큼 빠르고 예쁘게 테피스트리를 만들지 못했다. 그는 점점 거만해졌다. 전쟁의 신이기도 하고 지혜의 신이기도 한 아테나가 내려다 보니 이 애가 가관이거든. 자기가 전쟁, 지혜의 신이기도 하지만 직조술을 관장하는 신이기도 하는데 하찮은 인간의 기술을 가지고 신도 자기만 못할 거라고 떠벌이고 다니니 가만 둬선 안 되겠다 생각한 거지.
아테나가 어떻게 했겠어. 변신은 제우스만 잘 하는 게 아니었지. 당시 신들이라면 변신술이 기본이었거든. 아테나는 노파로 변장해 아라크네 앞에 나타났지. "얘야, 니가 아무리 테피스트리를 잘 짠다 해도 신들보다 나을 거라느니 그딴 소리는 하는 게 아니란다." "무슨 말씀이세요, 할머니? 만약 아테나신께서 여기 나타난다 해도 전 이길 자신이 있어요." "뭐라?"
뽕!!!
아테나가 그 자리에서 원래의 모습을 드러내고 아라크네에게 위엄있는 목소리로 말했어. "건방진 녀석, 감히 나에게 도전을 해?! 오늘 네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주마!"
아테나는 자기가 넵투누스를 이기고 아테네 영유권을 차지하게 되는 광경을 테피스트리로 짜고 아라크네는 에우로페가 황소로 변신한 제우스에게 납치 당하는 테피스트리 등 신들이 인간을 납치하는 모습 6개를 짰지. 아라크네가 신들을 조롱한 게지.
그러니까 아테나는 돌아버리겠는 거야. 인간이 자기보다 훨씬 실력이 뛰어난 거야. 자존심 팍 상해서 아라크네가 짠 융단을 갈갈이 찍어보리고 씩씩거렸어. 그러고는 아라크네를 오만상을 찡그리고 째려보고는 "너, 일루와봐!" 그랬지. 아라크네는 정정당당하게 시합해서 테피스트리를 짠 거고 결과물을 보니 자기 게 아테나 꺼보다 나쁘지 않거든. "왜요?" 하고 갔네.
"야 이노무 시키야! 니가 글케 잘났냐? 이게 오데서 신한테 꺄불고 있어? 엉? 누가 그리 가르치디? 앙! 느그 아부지 누고? 이리 델꼬 올래?"
그리 하면서 치토루스 산 회양목으로 만든 실짜기 북을 가지고 아라크네 마빡을 몇 번이고 쿡쿡 찔렀던 게지. 전쟁의 신 아테나가 빡센대로 빡세어서 찌르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웠겠어. 실짜는 기술 하나 믿고 신한테 덤빈 게 얼마나 큰 잘못인지 그제야 깨닫게 된 거지.
그래서? 난 오비디우스가 지은 <변신>을 읽어보지 않아서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는데, 어처구니없게도 아라크네가 자결을 했다고 하네. 헐. 그 설명을 듣는 순간 신들이란 질투 덩어리구만 하는 생각뿐이더군. 아차 싶었는지 몰라도 아테나는 죽은 아라크네를 거미로 변하게 해 살게 했다는군. 그래서 거미가 거미줄을 잘 치는 건가? 가끔 신화는 막판에 사람을 허탈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지.
어쨌든 그 이야기가 그림의 밝은 쪽 상황이란 거지. 이제야 그 뒤편 벽에 걸린 테피스트리 그림 내용이 이해가겠지. 황소로 변한 제우스가 에우로페를 납치하는 그림.
티치아노의 이 그림. 아라크네가 테피스트리로 짠 그림과 동일하다. 자, 다시 그림을 보자. 투구를 쓴 사람은 전쟁의 신 아테나이고 맞은 편에 있는 여인은 아라크네다. 이 정도면 대충 스토리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그쪽 동네에 있는 한 여인의 시선을 보자. 고개를 돌려 이쪽 실삼는 곳을 쳐다보고 있다. 시대로 치자면 밝은 쪽과 어두운 쪽이 동시대일 수는 없다.
밝은 쪽은 저너머의 세계다. 실 잣는 여인들이 있는 세계는 현실이다. 분업으로 실 잣는 일을 하고 있다. 벨라스케스가 살았던 시절의 직조공 모습일 것이다. 벨라스케스는 이 그림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너머의 세계에서 시작한 빛은 어두운 현실세계로 이어져 있다. 빛은 차원을 달리하면서 앵글의 이동을 보인다. 이쪽에 있는 한 여인에게 빛이 쏟아진다. 다른 쪽은 어둑한데 얼굴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이 여인에게 환히 비추이고 있다. 왜?
여기서부터 그림과 대화를 해야 한다. 빛과 저쪽세계에서 이쪽 세계로 이어졌고 저쪽의 한 여인은 이쪽으로 쳐다보고 있다. 이쪽에서 빛을 한몸에 받고 있는 여인은 저쪽 세계로 향해 앉아 실을 뽑고 있다. 과거와 현재의 연결. 그리스 시대의 아라크네와 근대의 아라크네를 이야기하고 싶은 거다. 그래서 저쪽과 이쪽 사이에 사다리가 있는 것이기도 하고.
자, 그림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듣고 보니 물레를 돌리는 노파가 눈에 들어온다. 이 여인은 또 누구인가? 바로 아테나다. 아테나가 노파로 변장했지만 그가 노파가 아니라는 사실은 다리에서 드러난다. 무릎까지 올린 치마에서 드러난 하얀 다리는 단연 노인의 다리가 아니다. 아테나임을 얼마든지 추리할 수 있다.
그럼 아테나와 이야기하고 있는 저 아이는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 그의 행동을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커튼을 걷고 있다. 아니 직조공장에 웬 커튼? 막을 열 때는 언제일까. 그렇지, 개막!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싶었던 게지. 과거는 현재로 이어지고 연결되어 있지만 아테나도 아라크네와 일을 나눠 분업하고 협조하는 새로운 시대 말이야. 이 부분은 이성희 강사의 얘기가 아니고 내 얘기.
아이가 막을 연다는 것은 이 그림이 액자소설 구조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고. 단계를 보면 막이 열리고 실 잣는 여인은 먼 옛날의 아라크네를 상상하는 그런 구도다. 극 중 극, 꿈 속의 꿈.
강사가 말은 안 했지만 저쪽은 천상이고 이쪽은 지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기호가 또 있다. 창문의 모양이다. 저쪽은 원이고 이쪽은 사각형이다. 원은 하늘이고 사각은 땅이다. 이 상징이 창문으로 표현되었다.
아, 벨라스케스가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 하는 화두에 강사는 이렇게 해석했다.
"벨라스케스가 예술로 신과 맞짱 뜨고 싶었던 거지요. 그의 강렬한 예술적 자부심이 표현된 그림입니다. 자신을 아라크네에 비유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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