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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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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할 때 아무리 신속히 받아 적는다 해도 빠트리는 것이 많다. 게다가 사진까지 찍어 작업하면서 강의 내용을 수록하기란 쉽지 않다. 이번 한국화 강좌 경남대 미술교육과 민병권 교수는 강의 자료를 아주 알차게 준비해주어 어쩌면 강의는 그냥 듣고 자료를 한 번 더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복습이 될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나의 게으름을 내가 알기에 한 번 미루기 시작하면 한 없이 미뤄버리는 결과를 막기 위해선 강의 때 놓치는 부분이 있어도 어쩔 수 없다. 즉각 받아쓰기를 해야만 한다. 그러다보니 부족한 부분을 알게 되고 이렇게 복습이라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당일 기록한 원본을 고쳐쓸까 하다 뒤죽박죽될 가능성이 높아 아예 깔끔하게 새로 쓰기로 한다.


이날 공부한 건 선사시대부터 고려 때까지 미술이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다. 


◆ 선사시대의 원시미술

암각화가 대표적이다. "암각화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주술과 의례행위에서 나온 결과이겠지만 농경문 청동기나 청동 잔무늬거울, 동물문 견갑 등과 함께 청동기인들의 재현력과 추상화 능력을 보여준다."(클릭, 한국미술사)


이 시대 미술 역사를 더듬어보면, 기원전 6000~4000년에는 한반도에서 처음으로 토기를 제작했고 남해안에 원시 민무늬토기와 덧띠무늬토기, 아가리무늬토기 등이 발견됐다. 기원전 4000~1000년에는 두만강과 한강, 낙동강 유역에서 빗살무늬토기가 제작됐다. 기원전 2333년에 고조선이 세워졌고 또 이 시기에 반구대 암각화가 새겨진 것으로 보이며 이후 기원전 300년 때에는 청동기 시대로 민무늬토기가 제작됐다. 이후 원삼국시대가 시작된다.


◆ 신석기 말부터 청동기 시대에 걸쳐 암벽이나 청동기에서 동물과 사람 형상을 발견할 수 있다. 또 토기나 골각기의 표면에서도 빗살무늬와 격자무늬 등 기하학적 문양의 선각화가 발견된다. 회화의 원류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하겠다.


반구대 암각화는 사실적인 형상을 재현했던 것에 반해 천진리 암각화는 동물의 교미를 연상시키는 장면, 기하학적 무늬가 석각되어 있는데 상징적이고 기하학적인 동심원이나 방형, 잎 모양은 주술과 의례 같은 복잡한 의미 표현으로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한다. 고령의 개진면 양전동 암각화는 고대인들의 생존과 제례의식에 관련된 염원이 담겨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신석기 시대의 토기에는 최초의 추상미술이 나타난다. 원시민무늬, 덧띠무늬, 빗살무늬, 돌림무늬... 민무늬는 청동기 시대로 알고 있었는데 신석기 전에도 민무늬가 있었군. 원시 민무늬와 청동기 민무늬는 구분돼야 하겠다. 청동기 민무늬는 신석기 유문토기에 상대되는 개념으로 쓰이는 용어다.




◆ 농경문 청동기는 판 형태의 청동기다. 외형은 집 모양 같기도 하고 방패모양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정확한 용도는 알 수 없지만 풍요를 비는 주술적 기물로 추정한다고. 윗 부분에는 여섯개의 구멍이 있고 여기에 끈을 묶어 매달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되고 아래쪽에 둥은 고리가 달려있다. 앞면에는 나뭇가지에 마주앉은 두 마리의 새를 새겨놓았고 뒷면에는 밭 주위로 따비를 들고 있는 농부와 괭이로 땅을 파고 있는 농부, 키같은 들고 있는 사람 등을 새겼다.


◆ 삼국시대 미술 역사를 쭉 훑어보면, 기원후 357년 고구려 안악3호분 벽화 제작, 369년 백제 칠지도 일본에 보냄, 393년 고구려 광개토왕 평양에 아홉 개의 절 건립, 408년 고구려 덕흥리 고분벽화 제작, 414년 광개토대왕비 세움, 498년 고구려 금강사 건립, 525년 백제 무령왕를 건립, 539년 고구려 연가칠년명 금동불입상 제작, 544년 신라 흥륜사 건립, 553년 신라 황룡사 건립, 588년 일본 최초의 절 건립(백제 화공과 목수 파견), 610(?)년 고구려 담징 일본 호류지 금당벽화, 632년 신라 경주 첨성대 건립, 634년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 건립, 639년 백제 미륵사지 석탑 건립, 645년 백제 아비지 신라 경주에 황룡사 구층목탑 건립, 646년 자장 통도사 건립, 660년 백제 멸망, 661년 신라 무열왕릉비 세움. 668년 고구려 멸망.




◆ 고구려 고분미술(강의 자료 내용 옮김)


고구려 고분미술의 꽃은 벽화다.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구려 벽화무덤의 수는 집안에 30여 기, 평양과 안악 지방에 60여 기, 모두 90여 기에 이른다. 그중에 왕릉도 있으리라 추정되지만 이 기간에 왕은 10명 뿐이기 때문에 귀족의 무덤이 대종을 이룬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고분벽화는 약 350년 간 계속 만들어지면서 무덤의 형식과 벽화의 내용이 서서히 바뀌어가는 양식사적 자기 발전을 보인다. 


초기(350~450) 안악3호 무덤과 덕흥리 무덤이 대표적이다. 앞칸, 안칸, 복도, 곁칸이 있는 여러칸 무덤이며 점차 곁칸이 앞칸에 흡수되면서 앞칸이 안칸보다 옆으로 긴 두칸 무덤으로 변해간다.


중기(450~550) 중기로 넘어가면서 초상화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부부가 나란히 앉아있는 생전의 모습을 작게 그렸고 얼굴은 드러나지 않는다. 무덤의 구조는 음률 여(呂)자 모양을 한 두 칸 무덤으로 변하여 행렬도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 생활풍속도가 들어선다. 초기의 공적인 행렬도는 사적인 행렬도로 변모했으며 집안 지역의 춤무덤과 씨름무덤은 완전히 생활풍속도로 그려진다.


후기(550~668) 중기와 후기를 가르는 큰 특징은 무덤 공간이 입구 구(口)자 형의 한칸 무덤으로 변하고 생활도가 사라진다는 점이다. 천장의 구조도 정연하게 정리되는데 벽화의 내용은 영혼의 세계를 추상적, 개념적으로 장식했다. 제일 큰 변화는 사신도다. 강서큰무덤, 통구사신무덤, 호남리사신무덤은 영혼을 수호하는 사신도로 장식되면서 벽화무덤의 완벽한 변형을 보여준다.


이처럼 고구려 벽화무덤은 점차 무덤의 구조가 단순해졌으며, 내용상에 있어 개인의 사적인 무덤임을 강조하는 것에서 벗어나 나중에는 영혼이 안주하는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 안악3보분과 고구려 고분벽화의 시원


황해도 안악3호무덤(357년 조성)은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 중 가장 규모가 크고 벽화의 내용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벽화의 조성 연대와 피장자를 알 수 있는 묵서가 쓰여 있어 고구려 벽화의 편년을 세우는데 중요한 고분이 되었다.


피장자의 초상화가 그려진 곁칸의 입구 양쪽에는 수문장이 있는데, 행적과 69세에 죽었음을 적어놓았다. 안악3호 무덤은 피장자에 대해 세 가지 설로 나뉘는데, 첫째 중국에서 귀화한 동수의 무덤, 둘째 묵서명이 명문 아래에 있는 신하의 것으로 보고 왕릉임을 주장하는 점, 셋째 고국원왕이 전사해 묻혔다는 점이다.


묵서의 내용은 무엇일까? 동수(冬壽), 연의 장수다. 336년 고구려로 귀화했다. 관직을 알 수 있는 문구도 있다. "사지절(使持節) 도독제군사(都督諸軍事) 평동장군(平東將軍) 호무이교위(護撫夷校尉) 낙랑상(樂浪相), 창려·현도·대방태수, 도향후(都鄕侯)" 고구려에 귀화했음에도 관직은 전연의 관직이 적혀있다.


이 무덤은 처음에 동수라는 이름 때문에 동수의 묘라고 불렸지만 지금은 왕릉으로 보고 있단다. 이유는 묘의 주인공으로 그려진 초상화에 보면 당시 왕만이 쓸 수 있는 모자인 백라관과 왕을 상징하는 정절(왕을 상징하는 우산처럼 생긴 깃대)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청소년을 위한 한국미술사>(두리미디어)에 이 무덤의 주인공과 부인에 대해 설명한 구절이 있는데 참고한다.


"무덤의 준인공과 부인은 연꽃과 드리개가 장식된 보개(대궐의 용상이나 불전에 보석 등으로 아름답게 꾸민 집 모양의 장식) 안에 있습니다. 주인공과 부인의 모습은 주변이 시종들의 모습에 비해 훨씬 크고 위엄있게 그렸는데 이것은 계급의 서열을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 생각해낸 방식으로 보입니다. 또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무덤 주인공 양옆으로 시종들을 그려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주인공의 모습을 더욱 위압적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부인은 주인공을 향해 몸을 약간 튼 자세로 그렸으나 주인공의 초상과 마찬가지로 시종을 작게 하여 삼각형 구도 안에 그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인의 얼굴이나 옷 주름의 묘사가 주인공에 비해 자연스럽고 세련된 점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화가가 그린 것으로 보이며 이것으로 볼 때 고분벽화는 여려 명의 화가가 각자 영역을 분담해 그렸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강서큰무덤의 현무.



◆ 사신도 벽화(후기) 550년 무렵 고구려 고분벽화는 앞 시대와 확연히 달라진다. 사회 전반의 문화수준이 높아지고 벽화 제작 경험이 많아지면서 대상 묘사에 능숙해졌다. 벽면에 물감을 칠하는 방법도 회벽에 칠하는 프레스코기법에서 고아물성 안료를 돌 벽면에 바로 그려넣는 기법으로 발전했다.


벽화의 내용 역시 더욱 개념화되어 사신도로 귀착되었다. 이 개념은 음양오행사상으로 금수목화토와 방위, 별자리, 계절, 색채, 인간의 도덕률, 신체 구조를 요약해 나타내기도 한다.


◆ 평양 호남리 사신무덤은 한칸 무덤이다. 벽화는 대리석에 사신도가 그려져 있으며 다른 그림은 없다.


◆ 강서큰무덤


강서큰무덤은고구려 고분병화 중 최고 명작이다. 평양 삼묘리에 있으며 이 무덤의 사신도는 고구려 사신도의 전형이라고 볼 수 있다. 청룡과 백호는 가는 허리의 늘씬한 몸매로 유연사고 주작은 날개를 펴고 장쾌히 날아갈 기세이며 현무는 뱀과 거북이 뜨겁게 포홍하는 순간을 담았다. 각 도상은 형상을 최대한 단순화해 그 이미지가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 보인다. 현무의 경우 통구사신무덤 것이 거북과 뱀이 복잡하게 뒤엉킨 반면 강서의 것은 거북 몸체를 휘감은 뱀의 목과 꼬리가 고리처럼 마주 걸려 팽팽한 긴장과 탄력을 느끼게 한다.



◆ 진파리7호분 금동판. 금동판? 머리에 쓰는 것인 줄 알았더니 머리를 베는 베개 장식품이었군. 2006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북한문화재 특별전이 열렸었는데, 북한 문화재인 이 금동판이 전시됐다. 당시 소개된 내용을 옮겨 본다. 


"5-6세기 고구려시대 작품이며, 출토지는 평양시 역포구역 소재 진파리 7호분이다. 현존 길이는 22.0㎝이며 북한 국보로 지정돼 있다. 고구려 금속공예품의 대표작으로 복숭아를 절반으로 잘라 옆으로 약간 눕힌 형태를 한다. 


외곽 테와 내부 문양 사이에는 뒷면에서 두드려 볼록하게 만든 원형 장식을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했다. 중앙에 마련한 두 겹 둥근 테두리 안에는 태양을 상징하는 세발까마귀(삼족오. 三足烏)를 표현했고, 그 위쪽에는 봉황을, 양 옆으로는 용을 각각 표현했다. 

금동판 뒷면에는 나무판을 댔다. 금동판과 이 나무판 사이에는 비단벌레(옥충. 玉蟲)라는 곤충의 날개를 깔아 바탕을 금녹색으로 만듦으로써 금동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끔 했다. 

애초에는 이 장식품이 피장자(묻힌 사람) 머리 부분에서 1쌍이 출토됨으로써 금동관을 구성하던 일부로 보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피장자의 베개(두침) 마구리 장식이라는 견해가 유력하다. 

맞뚫음된 금동제품에 비단벌레 날개를 깔아 장식하는 예는 신라 황남대총에서 출토된 금동제 말안장 가리개에서도 확인되는 것으로, 고구려와의 영향관계를 짐작게 한다."


고려 불화에 대해선 좀 쉬었다가 다시. 복습... 시간이 제법 걸리는군.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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