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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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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11일 화요일. 경남도민일보 창간호가 발행됐다. 1998년 외환 위기로 수많은 기업이 연쇄부도를 맞을 때 동성종합건설의 손에 있던 경남매일 역시 부도를 피하지 못하고 그해 10월 31일 3000호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았다. 1988년 남도일보로 시작한 10년의 수명을 다했다.


그후 6개월 여 동안 옛경남매일 구성원 중에서 언론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는 형태의 신문 만들기에 동조한 30명이 동분서주하며 준비했던 신문이 경남도민일보다. 시작할 때 신문의 이름을 내부 공모하기도 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해오름도 있었던 것 같고.. 어디 기록이 있을 텐데... 다양한 이름이 나왔다. 그중에서 신문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할 수 있는 이름이 '경남도민일보'라고 공감을 많이 했다. 나도 이 이름을 지지했구.


경남도민일보가 처음으로 살림을 차린 곳이 마산역 앞 당시 삼성AS 지하와 3층이었다. 지하는 경영국이었고 3층은 편집국이었다. 도시락을 싸서 옥상에서 종종 먹었더랬다. 이 건물은 지금 동도센트리움으로 바뀌었다. 맞은편 양덕성당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 있다. 양덕성당은 오랜 세월 보존되었으면 좋겠다.


내서 윤전공장에서 첫 신문이 인쇄되어 나올 때 모두 환호성을 질렀다. 아직 그 기억이 생생하다. 벌써 20년 전의 일이다. 자료정리를 하다가 우연히 창간호 파일을 봤다. 그땐 몰랐는데 이선관 시인이 축시를 썼다. 경남매일, 내가 문화부 기자일 때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썩 친하게 지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희한하게도 책사랑에서 만나거나 선생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병문안 가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 기억 때문인지 파일을 넘기다가 시인의 글에 잠시멈춤했다.


<축시> 


오늘 태어난 도민신문은 투박한 질그릇이어야 하느니

이선관


그래 그래서 다시 시작하자고

다짐한 그대들은

마치 산모의 진통을 참아내는 양

기다림에서 보람으로 마침내 태어났으니

이름은 도민일보

바다 건너에서 수입한 대리석으로 만든 화려한 그릇이 아니라

이 고장에서 나는 흙으로 빚은 투박한

질그릇이어야 하느니

지나간 날날 허무한 날날

중앙지나 지방지나

힘있는 자들 가진 자들에 대변인인 양

경제대국이니

일등국가니 일등정부니 일등국민이니

초일류신문이니 하면서 우습게도

아이엠에프를 맞이하지 않았던가

그러면서도 며칠 전에는 한사나흘

나라를 온통 흔들어 놓은 도적은

도적일 뿐

한심한 건 고백이건 자백이건

횡설수설이듯

한갓 도적을 양심선언자라고

우리를 기만하지 않았던가

각설하고

그리하여 오늘 태어나게 한 그대들은

언론의 본질은 사회의 공기며

지역언론은 그 지역의 공기이기에

도민의 슬픔과 기쁨을 그려내야 하며

공론화해야 할 사명을 잃어서는 

안되느니

정보화시대가 오는 이십일세기를

조심스럽게 맞아히면서

도민의 빠짐없는 식탁마다

이 고장 내음이 불씬 풍기는 투박한

질그릇을

놓아드리며 넉넉한 양식으로 채우리니

작은 것이 아름답다라 하는 말씀과 같이

도민과 함께 도민일보여 지속적으로

이어지게 하라

이어지게 하라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창원에 극단 숲이 새로 생긴다. 연극계 존경하는 선배가 이끄는 극단이라 관심이 크다. 그런데 공연 당일 마산연극협회 총회가 있어 시간이 어찌 될는지, 관람이 가능할지는 미지수다.


공연 소식을 보내왔다. 극단 숲 창단 공연, 연극인생학교 숲 제4회 공연 - 당신의 삶을 웃음으로 치료하는 연극 '굿 닥터'.




극단 숲은 서용수(배우), 류주욱(작곡가) 김수희(연출가) 세 사람이 태봉고에서 연극동아리 '끼모아'를 시작으로 연극과 뮤지컬을 올려왔던 게 인연이 되어 만들어졌다. 단원들은 주로 태봉고 졸업생들이다.


1월 26일 토요일 오후 7시 30분. 창원 나비아트홀. 이번 창단공연으로 올리는 작품은 '굿닥터'(연출 김수희)다. 희곡 닐 사이먼. 예전에 봤던 작품이다. 이 미국 작가 닐은 코미디 방면에서 선수다. 사실 닮고 싶은 부분이기도 하다. 대본을 써내려 가면서 순간순간 포복절도할 코믹 장면을 만들어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굿 닥터>란 이 작품은 대본도 읽고 연극도 봤다. 기본적으로 밑바탕에 안톤 체홉의 향기가 밴 느낌도 들었고 미국 식이라기보다는 러시아식의 어떤 늬앙스도 읽혔더랬다. 몇 년 전 극단 상상창꼬에선 <레몬레이드>라는 제목으로 무대화되었었다.





그때 본 것을 바탕으로 다섯 개의 에피소드 줄거리를 읊어보면,


"첫 번째 에피소드는 ‘재채기’. 닐 사이먼의 첫 에피소드와 같다. 이반이라는 인물의 소심함이 점점 일을 더 크게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렸다.


두 번째 에피소드, ‘오 선생과 정 여사’. 닐 사이먼 희곡에선 ‘늦은 행복’이란 제목의 에피소드다. 이 에피소드는 김소정 감독이 상당히 손을 댔다. 원래 내용과 흐름에 차이가 있고 등장인물의 노래도 다른 가사로 구성됐다.


세 번째 에피소드는 ‘겁탈’이다. 희대의 카사노바로 불리는 피터의 이야기다. 그는 친구의 아내를 유혹하는데 그 친구의 아내는 정말로 이 피터를 사랑하게 되어버린다. 결혼 남자로선 경계 대상 1호다.


네 번째 에피소드 ‘오디션’은 배우를 하고 싶어 사흘 밤낮을 걸어서 도시에 와서 오디션을 보는 소녀의 꿈을 그리고 있다. 꿈을 이루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뎌내는 이 당찬 소녀에게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 다섯 번째 에피소드는 ‘치과의사’다. 치통으로 곧 죽을 것 같은 표정의 사제가 치과에 들어서면, 치과 조수가 그를 반긴다. 그런데 의사는 출타 중. 이 선무당 같은 조수에게 치아를 맡겨야 하는 상황. 이런 걸 안 봐도 비디오라고 하던가. 이런 상황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광경이 관객의 배꼽을 잡게 한다."(미디어웜홀, 2016.4.29)


원래 <굿 닥터>는 아홉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열 개로 구성되어 있다는 글도 있다. 이는 작가의 이야기를 포함한 걸로 무시해도 되겠다. 아홉 개의 에피소드 다는 못할 테고.. 어느 에피소드를 선택했는지도 관심이다. 헉! 리플릿을 보니 프롤로그 에필로그 빼고 7개의 에피소드를 담았다. 러닝타임 최소 1시간 반만 해도 엄청난 스피드가 느껴질 공연이 되겠다. (^^)


여튼, 이번 공연을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2019년 1월 20일 네이버 영화 코너에 들어가면 <말모이>가 예매율 31.62%로 1위를 차지하고 있다. 올해 3.1운동 100주년이라는 연초의 집중적 이슈 때문에 상승세를 탔는지 모르나 여튼 개인적으로도 국문학도 출신으로 이런 영화가 1위에 오른 건 반가운 일이다. 문제는 내가 아직 이 영화를 안 봤다는 게 목소리 작아지는 이유다. 이번 주 시간 내서 보긴 봐야겠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윤계상이 맡은 역 류정환의 실제 인물은 이극로라고 한다. 물론 영화이기에 이극로 실제의 삶을 그대로 옮겨놓지 않는다. 어쩌면 당시 한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의 총체적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침 건축사이자 LH상임감사인 허정도 박사의 책 <도시의 얼굴들>을 읽던 중이라 감회가 새롭다. '한글학자 이극로'를 읽으며 그의 열여덟 살 마산 생활이 어땠는지 더 눈에 선하게 들어오는 듯하다.





이극로가 한글학자로 조선어사전을 만들다 일제에 걸려 고초를 겪었다는 얘기는 이미 알고 있었던 터. 하지만 그가 의령 사람으로 인생의 전환기가 되던 시절 마산서 보냈다는 사실은, 사실 몰랐다.


 박사의 책을 보면,  이극로에 대해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중요한 시기 2년을 마산에서 보낸 고루 이극로. 새벽마다 말죽을 끓였고 여관을 드나들며 인단을 팔았던 고학생 이극로. 갓 뚫린 비포장 북성로를 오갔고, 상남동 골목길을 내달렸고, 일에 지치면 교방천에 발을 담갔던 청년 이극로. 때때로 긴 숨을 몰아쉬며 노비산에 올라 마산만을 바라보며 꿈을 키운 물불 이극로. 마산은 그 위대한 생애의 첫 장소였다."


이극로가 마산에 도착한 것은 1910년 5월 중순. 나라가 망한 해의 봄이었다고 한다. 그해 2월 서울로 가려다 맏형에게 붙잡혀 되돌아 왔고 3개월 지난 5월 60리 마산행은 성공한다. 마산 도착 다음날 길게 땋은 머리를 싹뚝 자르고 창신학교에 들어간다. 맡형 상로가 데리러 왔으나 머리 깎은 극로를 보고 데려가지 못한다.




그때 마산 인구가 1만 7000여 명이었는데 세상에 일본인이 6000여 명이었다니, 당시 마산은 일본이나 다를 바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하긴 일본사람들이 살던 곳을 신마산, 원래 마산 사람이 살던 곳을 구마산이라고 했는데 불과 20~30년 전만 해도 그 이름이 흔히 쓰였다. 하긴 요새도 연세 지긋한 사람들은 신마산이니 구마산이니 하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이극로가 들어간 창신학교는 마산포교회(지금의 문창교회)가 세운 학교였다. 1906년 동서숙(공부방)으로 시작했다가 1908년 창신이라는 이름으로 개교. 초대 교장은 마산포교회 앤드류 애덤슨(한국명 손안로)이 맡았다.




학교의 북동쪽은 노비산이다. 지금은 사람들이 제비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산 이은상의 호가 이 산에서 비롯되었단다. 이극로도 이 인근에 살면서 노비산을 수시로 오르내렸다고 한다. 교방천이 북성로와 만나는 지점 인근에 이은상의 집이 있었는데, 집 옆에 공동우물로 쓰는 용천수 샘물이 있어서 극로는 이곳에서 물을 길러 말죽을 끓이는 일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북성로는 1908년 뚫린 신작로였다. 그때 이 공동우물도 도로가 나면서 사라져버렸다. 그런데 그 우물이 어찌된 일인지 '은상이 샘'이라 하면서 이은상과 관련 지어 인근 자투리 터에 모형을 만들어 놓았는데, 역사 고증이 잘못됐다는 지적을 책에선 남겨놓았다. 워낙 논란이 되었던 사안이라 다른 기록도 많은데 언론을 통해 보도된 내용을 보면 실제로 교방천의 옛이름이 운상천이었고 사람들은 이 하천을 운상이내라 불렀다. 게다가 이 샘을 은새미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단다. 이은상이 태어나기도 훨씬 전부터 이 샘은 은새미였다. 그 은새미를 이은상 샘이라고 갖다붙이다니...




여튼 이극로는 마산서 이은상의 아버지 한의원 이승규의 신세를 지기도 했나 보다. 그의 집에 기거했으니. 이승규는 극로보다 10살 적은 은상에게 극로와 비교하며 야단을 많이 쳤다고 한다. 극로 본 좀 받아라. 뭐 그런. 극로나 은상이 안확에게서 공부를 했다. 창신학교 강사로 온 안확은 수업하기 전 "대한제국 만세! 너희는 대학제국의 국민이다"하면서 학생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이 증언은 이은상의 회고에 나온단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시립추산어린이집 앞에 있던 추산정도 역사가 있는 장소였단다. 이곳에서 1914년 창신학교 개교 기념 집회가 열렸는데 마산 최초의 시국강연회였다고. 또 마산의 3.1운동도 이 추산정에서 시작했단다. 물론 이런 일들은 극로가 마산을 떠난 후에 일어났다.


극로는  교방천과 회원천이 만나는 지점 안쪽에 살았다고 한다. 위성 지도를 보니 일반주택들이 가지런히 모여있다. 창신학교에서 2년을 보낸 극로는 중국 신해혁명 소식을 듣고 구마산 역에서 기차에 몸을 실었다. 1912년 4월.




극로는 서간도로 갔고 상해동제대학을 나와 독일에 가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유학 중 조선어 강좌를 개설해 강의하기도 했다고. 파리대학에서 음성학을 공부하고 미국과 일본을 거쳐 1929년 귀국, 조선어사전 편찬을 주도했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에 터졌다. 극로는 함흥재판소에서 6년형을 선고받았다. 중추적 역할을 했던 최현배는 4년. 창신학교 교사였던 김해 사람 이윤재는 수감 중 옥사했다고.


광복 후 조선어학회 회장에 취임했고 백범과 함께 평양에 갔다가 북에 머물면서 고위 공직까지 지냈다고 한다. 1988년 해금 이후 남쪽에서 그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재조명됐다. 그의 호는 '고루'다. 골고루. 평등의 순우리말 아닌가. 그의 호가 마음에 든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금강미술관은 자연스레 자주 가는 곳이 되었다. 전에도 한 번 언급했던 것 같은데, 극단이 창동에 있기 때문이다. 약간만 여유가 생겨도 이 미술관으로, 혹은 창동예술센터 2층 갤러리로 발걸음을 했으니.


엊그제 금강미술관을 찾았다. 연습도 없고 숙제도 없고 해서 합성동 집에서 걷다가 혹은 자전거를 타다가 하면서 회사도 들르고, 도서관도 들르며 시간을 자유롭게 보냈다. 오후 6시 마산의료원 옆 어느 식당으로 정해진 약속에 맞추면 되는 일이었다.


동선 안에 들어온 금강 미술관이었다. 그 며칠 전엔 잠시였겠지만, 문이 닫혀 못 들어갔었기에 길을 지나며, 하나 안 하나 유심히 봤다. 하는군. ㅋㅋ.


들어서는 순간 그림들의 위용이 느껴졌다. 단순하기도 하고 복잡하기도 한 추상 속에 뭔가 예사롭지 않은 의미가 담겼을 것 같았다.


입구에 있는 설명문을 스마트폰으로 찍었다. 그리고는 하나하나 그림 앞에 섰다. 그림을 보다가 폰을 올려 들고 설명문을 읽다가를 반복했다. 그래서인지 그림이 한결 이해되었다.


설명문, 오세영. 


오세영 화백은 1960년 대 중반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실험과 표현기법을 연구해 오고 있다. 그는 1979년 도미하여 20여 년간 뉴욕과 필라델피아에서 창작 활동을 하면서 국내 화단이 세계적인 정체성을 얻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의 회화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뉘는데, 첫째는 토기나 태극의 괘를 연상시키는 '심성의 기호' 시리즈, 둘째는 올오버(화면전체가 무늬로 가득한 천)풍의 '잔상' 시리즈, 셋째로 전체 화면을 색면으로 나눈 '성' 시리즈다.




작품 시리즈인 '심성의 기호'는 인간의 내면의 심상을 마치 화면에 음악적인 율동감이 느껴지듯이 작가만의 조형언어로 재현해 낸 것으로 그 섬세한 감성과 탁월한 심미안을 느낄 수 있다.


오세영 화백은 평면에 유채, 천, 에나멜 등을 사용하여 재료에 대한 천착과 한국의 고유한 형상과 색감을 사용하여 깊이 있는 화면과 실험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해왔다.


'심성의 기호' 시리즈는 사회와 문화, 그리고 예술 사이에서 일어나는 관계를 한국의 정신성을 상징하는 태극의 괘를 소재로 하여 범세계적으로 통용되는 동양철학을 다양한 형상으로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이것은 작가 내면의 심상으로 여느 작품에선 볼 수 없는 독창성을 가진다.



오세영 화백의 그림 중에서도 이 판화는 발걸음을 붙잡고 눈길을 끌었다. 나무의 가지와 뿌리를 대조하면서도 본질은 같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 그림을 뒤집어도 상관없다. 그러니까 차별이 없다. 뿌리든 가지든 똑 같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오세영 화백은 많은 실험작에서도 일관되게 유지해온 것은 존재와 진정성의 관계다. 이렇게 보편적인 주제로 표현하는 작가만의 고유한 형상은 국내외에서도 많은 공감을 얻고 있다. 현재까지 영국 국제판화비엔날레 옥스퍼드 갤러리상, 독일 슈투트가르트 세계 판화 공모전 그랑프리, 필라델피아 판화협회전 금상 등 해외 유수 기관에서 수상한 바를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그리고, 황영성 화백.


70년대 후반과 80년대를 통해 황영성은 '가족도' '가족이 있는 정원' '소와 달과 가족의 마음' '마을' 우리 마을 이야기 등 마을시리즈를 반복적으로 펼쳐보였다. 물론 이 두 시리즈는 굳이 분화할 필요 없는 동일한 내용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가족과 마을은 떼어 놓을 수가 없으며, 그 속에 등장하는 가축과 나무와 달 역시 전체적 풍경을 이루는 인자로서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미술관 2층 전시실 전경.



인간과 가축과 자연이 분화되지 않은 상태로 있다는 것은 일종의 범신적인 풍경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황영성의 화면은 미분화의 상태가 아니라 확고하게 질서지워진 테두리 속에서 서로 삶을 같이 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가족은 오뚜기처럼 쌓여지지만 부모와 아이들의 모습이 분명한 윤곽으로 표현되며, 소나 초가의 모습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제각기 뚜렷한 영역을 지니면서 하나의 공간 속에 옹기종기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 동등한 공간의 점유는 서로 겹치지 않는 많은 작은 면들의 분절로 나타나면서 평면성을 고양하고 있다. 그 독특한 기호와 공간의 증식 패턴은 이미 배양되고 있는 것이다.



95년 이후의 작품에선 한층 기호적인 요소의 증대를 목격할 수 있으며 공간의 증식은 균질한 면의 분절로 나타나고 있다. 가족도는 단순한 인간 가족이 아니라 자연의 가족, 만물의 가족으로 탈바꿈된다. 인간의 모습이 있는가 하면 말, 개, 닭, 호랑이 같은 동물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며 나비, 벌, 꽃, 물고기, 과일이 등장하기도 한다.



물론 이것뿐이 아니다. 건물과 도시의 거리와 공장의 굴뚝과 비행기 같은 문명의 산물들도 등장한다. 그것들은 똑 같은 면적 속에 극도로 단순화된 형태로 구분된다. 어떤 대상들을 선택하고 표출한다기보다 정해진 상자 속에 모든 것이 무차별하게 끌어들여지고 있는 인상이다. 인간 뿐 아니라, 인간 주변에 있는 이 모든 사물들이 하나의 공간 속에 같이 참여함으로써 마침내 거대한 가족도를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만큼 화면에는 서로 다른 인자들이 내뿜는 색깔이 향기로 인해 풍성한 밀어의 화원이 펼쳐지게 된다. 그러고보면, 그의 화면은 많은 색깔과 향기로 가득히 덮여 있는 꽃밭을 연상시키게 한다. 그러나 같은 시기 그의 또 다른 일련의 작품들에선 극도로 색채가 배제된 모노크롬의 기호들이 등장되고 있다. 여러 색채로 표현되었던 사물들은 이제 동일한 색채를 띠면서 실루엣처럼 윤곽선으로만 개별적 속성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이는 더욱 기호화, 평면화의 밀도를 고양하는 작용을 한다. 단 색조의 변모가 갑작스러운 현상 같으면서도 사실은 이미 그의 초기  작품에서와 80년대로 전개되는 작품의 영역을 통해 암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대단히 풍요로운 색채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실은 대단히 절제된 색체 사용을 지속해온 편이다. 초기의 회색과 청색톤을 기조로 한 작품에서 중도의 짙은 녹색과 청, 황의 바리에이션(변형, 음악에선 변주곡을 뜻함)을 가하던 작품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많은 색채가 사용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대비적은 색채의 사용으로 인해 극적인 색채의 효과를 높였을 뿐이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일단 경남도민일보에 보도된 내용을 중심으로 2018년 12월 한 달간의 연극 역사를 정리해보자.


- 11월 22, 23일 경남문화예술회관 대공연장 진주 극단 현장 <강목발이> 관객 1000명.

- 11월 3~18일 소극장 판 진해 극단 고도 <중평한들> 24~25일 <웅천현 중평리>로 공연.

- 함안 극단 아시랑+광주 극단 푸른연극마을 공동 창작 2인극 <사돈언니>(양수근 작 오성환 연출) 한국국제2인극 페스티벌에서 최우수상과 희곡상 받음(12월 5일 보도)

- 진주 극단 현장 <카툰마임쇼> 전국 순회공연 (12월 5일 보도)

- 14~15일 밀양연극촌 우리동네극장 밀양문화재단 청년K-STAR 밀양연극아카데미 <우리 읍내>

- 20~22일 밀양연극촌 우리동네극장 밀양문화재단 청년K-STAR 밀양연극아카데미 <박무근 일가>

- 15일 창원 성산아트홀 소극장 경남뮤지컬단 <오즈의 마법사>

- 18일 3.15아트센터 아르코공연연습센터 중엽습실 '희비락락' <12인의 성난사람들>

- 20일~1월 6일 나비아트홀 극단 나비 <아내의 서랍>

- 25~29일 진주 동성동 현장아트홀 극단 현장 <타이피스트>


문화예술회관 등에서 초청해 이루어지는 공연은 정리에서 배제했다.




그러고 보니 보도되지 않은 지역 극단의 공연도 몇 개 더 있다.

우선 떠오르는 공연이 

23~25일 창동예술소극장에서 열린 극단 상상창꼬의 <와인>이 있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