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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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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대제. 이 명칭을 접한지는 제법 되었다. 아마도 2006년에서 2008년 사이였을지도 모른다. 지역 문화에 관심이 있었던 탓(?)인데다 언론사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본격적으로 취재를 했을 때 느낌. 성신대제는 지금까지 내가 생각했던 그런 것과 많이 다른 그런 민속이었다.


마산 어디 단체에서 성신대제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그것이 마산에서 옛날에 지내던 동제라는 정도였었다.


사실 이번에도 경남이야기 전통을 찾아서란 코너에 한꼭지로 소개할 소재를 찾다가 어시장축제의 한 코너로 별신굿을 한다기에 체크해뒀다가 찾아간 것이었다.


그런데 별신굿은 안 하고 몇 달 전 통영 통제사 안에서 보았던 남해안 별신굿의 하나인 수륙새남굿을 하는 게 아닌가. 그것도 그 일부인 용선놀이. 남해안별신굿 문화재 보유자인 정영만 선생이 직접 무대에 올라 용선놀이를 하고... 아니 어떻게 된 거지?


다음날 출근해 성신대제 자료를 뒤져봤다. 왜 성신대제에 남해안별신굿의 용선놀이가 등장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사진도 구할 겸 마산문화원 임영주 원장을 찾아갔다. 인터뷰를 하면서 새로 얻게 된 사실들... 내겐 큰 충격이었다. 성신대제에 얽힌 이야기는 너무나 방대해서 모두 다를 수는 없다.


줄이고 줄여 정리한 게 이번에 경남이야기에 싣는 3편의 글이다.


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1)

1760년부터 본격화된 별신굿 부침 겪다 중단…마산문화원서 원형 부활


지난 19일 창원시 마산어시장 일대에서 제14회 마산어시장축제가 열렸다. 어시장축제의 한 프로그램으로 ‘성신대제 별신굿’을 한다는 정보를 얻었기에 그것이 어떻게 시연되나 보고 싶었기에 찾아갔다.


무대가 설치된 축제장에는 많은 이들로 자리를 메웠다. 아마도 유명한 초청가수들이 많이 오기 때문에 한 번 앉은 자리 잘 일어서지도 않고 끝까지 지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덕분일지는 몰라도 관객들은 마산성신대제 별신굿이 무대에 올라도 열심히 관람하는 모습을 보였다.


별신굿이 시작되기 전에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이 무대에 올라서서 성신대제 별신굿의 의미와 역사에 대해 설명을 했다. 그런데 하는 말이 이번 무대에 오르는 것은 성신대제의 마지막 굿판으로 용선굿을 한다는 것이다.


이제 축제를 막 시작했는데 성신대제의 마지막 순서라니? 의아해하며 듣고 있자니 벌써 며칠 전부터 성신대제를 진행해왔다는 것이다. 자산동 산에 있는 나무 중에서 신목을 지정해 거기서 굿도 하고 어시장 활어센터 옥상에 있는 제당에서 제의를 지내고 선창에서 굿도 했단다.


그때 느낀 것이 성신대제가 간단한 전통민속행사가 아니구나 하는 거였다. 성신대제, 한자로 星神大祭라고 쓴다. 풀이하자면 별신에게 지내는 큰 제사라는 뜻이다. 국내 여러 곳, 특히 바닷가에는 많은 곳에서 별신굿을 한다.


별신굿 안에는 여러 굿들이 있다. 당맞이굿, 성주굿, 천왕굿, 군웅굿, 용왕굿…. 그런데 왜 바닷가 마을에서 별신굿을 많이 할까? 별신이 하늘에 떠있는 별을 신으로 숭상하여 지내는 것이므로 추측이 가능했다.





바닷가 사람들은 뱃사람들이 많으므로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갔다가 어두워지면 별빛에 의지해 방향을 잡고 돌아와야 하므로 별신굿을 지냈으리라. 그런데 이 추측이 얼마나 편협한 것이었나를 1주일 지나 임영주 마산문화원장을 다시 만나면서 깨닫게 되었다.


별신이라고 해서 ‘성신(星神)’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산 이외 대부분 지역에선 별신을 한자로 ‘別神’이라고 쓴다. 직역하자면 ‘특별한 신’이고 ‘별이별 신’이다. 그제야 왜 별신굿 안에 성주굿, 청왕굿, 용왕굿 등 온갖 굿이 다 있는지 이해가 되었다. 별신굿이 토템에서 비롯됐다는 추측은 누구라도 틀렸다 할 수 없겠다.


그러면 왜 마산에선 별신(別神)이라 하지 않고 성신(星神)이라 하였을까? 성신을 역사적으로 고증하면 1905년까지 올라간다. 이 해에 별신제가 크게 열렸는데, 별신대를 세우는 대신에 제당을 지어 신위를 모시면서 그 신위에 ‘星神位’라고 적은 것이 계기가 됐다.


그 이전에는 별신이라고 써왔다. 그래서 1906년 황성신문엔 ‘別神’이라 표기하였고 이후에야 성신이 제대로 알려져 1928년 중외일보에서 ‘별신(星神)’, 1954년 마산일보가 ‘星神’이란 표현을 썼다.


마산에서 성신대제가 성행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고려시대부터 마산에는 조운제(漕運制)에 의해 지어진 조창이 있었다. 조운제는 지방 군현의 세곡을 받아 모아두었다가 일정 시기에 수도에 있는 경창으로 운송하는 하는 체제다.


그때만 하더라도 세곡을 배에 싣고 수도 경창으로 운반해야 했으므로 배가 사고 없이 무사히 목적지에 당도하도록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그러던 것이 태종 3년인 1403년에 조운제가 폐지되면서 공적으로 지내던 제의가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게 됐다.





이후 영조 36년, 1760년에 조운제가 다시 시행되면서 남성동 일대 조창이 생겼다. 이곳은 주변 8개 읍면의 세곡이 모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장시도 형성되어 사람들이 대거 모여들었다. 예전 같으면 조운선에 실은 공물이 탈 없이 경창까지 운송되도록 순풍제만 지냈을 테지만 장시의 형성으로 규모가 확대되어 제의에서 모시는 신도 다양해졌다.


다시 말해, 조운선의 무사항해뿐만 아니라 풍어, 마을 안녕까지 기원하게 되는 ‘별신’ 성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조창이 있다는 이유로 당시 관청과 민간이 공동으로 제를 올리게 되어 별신제가 성대히 거행되었다. 장시도 계속 번성하여 어시장이 형성되었고 조선후기엔 이 조창을 관리하기 위해 유정당이라는 건물도 지었다.


조창이 설치된 후 135년간 행사가 지속되어 오다 동학혁명이 일어난 다음해인 1895년 고종 32년, 조운제가 폐지되면서 조창도 폐창되고 다시 대제 의례는 희석되고 민간신앙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다 1904년 대폭풍우가 덮쳐 큰 피해를 보게 된다.


이때 민심은 별신제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신들이 노해서 이런 재해를 입게 되었다고 믿었다. 이를 계기로 이듬해인 1905년 지역의 유지들과 어시장 객주집단에서 성신대제를 계승 부활시키게 된다.


그해 음력 3월 28일 어시장에 신당(하당)을 짓고 ‘星神位’ 위패를 모시게 된다. 이것이 ‘성신대제(星神大祭)라는 명칭을 얻게된 계기다. 그래도 넓은 개념에서 보면 성신제도 별신제(別神祭)의 하나라고 보면 되겠다.





이때 이후론 매년 음력 3월 28일 기제를 지내고 5년에 한 번씩 중제, 10년에 한 번씩 대제를 지냈다. 그러다 1954년 크게 지낸 후부터는 대제, 중제가 없어지고 기제와 명절제사, 초하루제사로 축소되어 지내왔다. 1987년부터는 수협중매인협회장이 제관을 맡아 유교식을 기제사를 지내왔으며 2006년 이후 마산문화원에서 성신대제에 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해 대제의 원형을 발굴, 오늘에 이르렀다.


관민일체로 별신제가 크게 흥했던 시기는 1760년 영조때 마산조창이 생기고 이를 관리하는 유정당 낙성, 그리고 조운선이 첫 출항한 그 시점이 아니었을까 싶다. 당시 모습을 시로 나타낸 글이 있다. 김이건이라는 사람이 지은 ‘송조선가(送漕船歌)’다.


“뱃사공 수백 명 불러 모아서/뜰 안에 자리 주어 줄지어 앉히고는/먼저 위로의 음식 내려 마음을 격동하고/포구에서 전별할 때엔 기생들이 춤추었네/기생들이 행선악을 연주하자/가득 모인 사민들 모두 즐거워하네/다음날 아침 깃발이 포구로 나가/모든 배 점검하고는 북과 나팔을 불자/포성 세 발에 일제히 닻을 걸고는/밧줄 풀고 돛을 걸자 바람과 파도 잠잤네/백신이 호송하여 큰 바다로 나서서는/앞 노와 뒤 돛대 서북으로 향하여/무서운 여울을 지나도 끄떡 없었네”(‘마산 성신대제 연구’:마산문화원. 26p)





이 기록으로 보아 성신대제는 당시 제의를 지내고 뱃사람과 백성, 관리가 어우러진 큰 축제를 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이 지금 성신대제와 어시장축제로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계속)


[관련기사]

 조창을 계기로 형성된 ‘마산성신대제’(2)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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