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텔링)신동대전(傳)(해설)
이야기의 배경이 된 양산 영축산 자락 신동대굴을 찾아가다
이번 7회에 걸쳐 연재가 되었던 신동대굴에 얽힌 전설은 원형에서 상당히 벗어난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양산군지 등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이번 전설텔링에서 묘사된 것과는 달리 그렇게 착한 캐릭터는 아닙니다. 전설의 원형을 옮겨봅니다.
“약 400여 년 전 신동대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신불산 중턱에 있는 천연석굴에서 술수 공부를 연마한 후 끝내 도통하여 신비한 행적이 많았으나 그중에도 특히 축지법에 능하여 하루 저녁에 한양을 오고 갔다 한다. 그러다 자신의 실력에 심취한 나머지 사악한 마음에 눈이 멀어 나쁜 쪽으로 그 술수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신동대는 특히 궁녀를 탐하여 희롱하거나 겁탈까지 하는 악행을 계속해서 저질렀고 이에 나라에서는 궁녀들의 몸에 명주끈을 매어 두었다가 이 명주 끈을 단서로 신동대가 있는 곳을 탐지하여 잡아오라 하면, 중국으로 하루 저녁에 도망해 새벽에는 안동 땅에 도착하는 등 축지법 때문에 잡아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동대는 어느 집 앞을 지나고 있었는데 때마침 어느 노파가 마당을 비로 쓸면서 호통을 치며 말하기를 “조선에 있는 신동대는 하루 저녁에 수만리를 왔는데 너희들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뭣들 하느냐”고 고함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신동대는 놀라 당황했고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은 이 세상에 없노라고 오만을 피운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는 길을 멈추고 그 노파에게 자신의 부질없는 짓에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다시 노파에게 “어찌하여 저를 알아보셨습니까?” 하고 물으니 노파는 대답하기를 “고향으로 돌아가시오. 그리고 장날에 만나는 어떠한 사람과도 이야기를 나누지 마시오.”라고 말한 후 안채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그리하여 신동대는 고향에 돌아와 다시 의롭게 도술을 써서 임진왜란 때는 왜놈을 무찌르기도 하였다. 그러다 신동대는 깨우쳐준 노파의 예언을 잊어버리고 어느 날 장날에 우연히 만난 어느 할머니와 얘기를 나누고 말았다. 그러자 신동대는 그날 바드리라는 고개(달음재)에서 넘어오다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뒤 신동대가 살던 동굴에는 어떤 할머니가 들어와서 걸식을 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동굴 한 모퉁이에서 쌀이 흐르기 시작하였고 쌀은 할머니가 먹을 만큼만 흘러나왔다. 그러자 할머니는 욕심이 생겨 쌀이 흐르는 구멍을 크게 넓혔다. 그랬더니 쌀은 영영 흐르지 않고 대신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뒤 할머니는 예전처럼 고생을 하다가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이 굴을 신동대라는 사람의 이름을 따 신동대굴이라고 부르고 있으며 지금도 바위 천장에서는 물방울이 흐르고 있다고 한다.”
1편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신동대와 노파의 이야기가 섞인 전설입니다. 쌀이 나오는 구멍에 대한 전설은 전설의 단골메뉴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인 신동대라는 인물이 탄생한 배경에는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적 환경을 빼놓을 수 없을 듯합니다.
임진년 왜란이 일어나자 피란민들이 배내골 선리로 모여들었습니다. 선리는 신동대굴이 있는 아랫마을입니다. 행정구역상으로 양산시 원동면 선리입니다. 언양 배내와 접경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장선동과 중선동을 병합하여 선리라 일컫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리에서 신동대굴로 가는 길의 출발점은 3곳입니다. 산골이야기라는 펜션 맞은편 임도를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에코뷰리조트 맞은편으로 해서 오르는 길, 그리고 통도밸리를 지나 오르는 길, 이렇게 세 갈래가 있습니다. 에코뷰리조트와 통도밸리 길은 15분 쯤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산골이야기 펜션 길도 느린 걸음으로 1시간 정도 임도를 따라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됩니다. 길이 계곡과 만나는 지점인데 자칫 이곳을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면 반대 방향으로 가게 되니 주의해야 합니다.
통도골, 이 골짜기 이름이 산너머 통도사와 이름이 같습니다. 통도골이라고 이름이 붙여진 것은 이곳에 도통한 도사가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라고 합니다. 아마도 전설 속의 신동대를 두고 이른 게 아닐까 추측됩니다. 하지만, 통도사의 이름 유래와는 연결이 되지 않습니다.
이 통도골은 영화 ‘달마야 놀자’ 촬영지가 있기도 합니다. 이 계곡 옆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40분 정도 걸으면 오른편 물 건너 임도와 만나는 곳이 나옵니다. 이곳에 이정표가 있지요. 이정표에는 ‘도토정’이라고 적혀있습니다만 가리키는 쪽은 ‘도태정골’입니다.
도태정은 문헌에 의하면 ‘도초나들’이란 자연마을인데 ‘도태징이’라고도 불렸습니다. 신동대굴로 가려면 물을 건너지 말고 계속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합니다. 여기서 40분 정도 오르면 가파른 길이 나옵니다. 계곡길이다 보니 막판에 경사가 심합니다.
때론 밧줄을 잡아야 하는 길도 만납니다. 어느 정도 지쳐갈 무렵, 고개를 들면 산 능선을 만났다 싶은 기분이 듭니다. 산 위로 하늘이 닿아있으니까요. 여기서 약간만 더 힘을 내어 오르다 보면 반가운 대형바위가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드디어 신동대굴을 만났습니다. 커다란 바위 아래가 움푹 들어간 형태입니다. 안쪽으로 조금 깊이 들어간 곳이 있긴 하지만 동굴이라고 표현하기엔 적절하지 않다는 느낌이 듭니다. 입구랄 것도 없이 길게 열린 바위 아래로 빛이 들어와 안을 훤히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이곳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습니다. 생활도구로 보아 기껐해야 몇십 년 정도로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보아 이 바위굴이 신동대라는 도사 이야기를 탄생시키는 데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어 보입니다.
바위굴 자체가 웅장한데다 눈비를 피해 생활이 가능한 여건 등이 임진왜란을 피해 아랫마을에 정착했던 사람들에겐 충분한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으리라 봅니다.
신동대굴 안에는 전설에 언급되었던, 바위 틈에서 물이 흐르는 곳이 있었습니다. 이곳에서 노파가 더 많은 쌀을 얻고자 구멍을 넓히려다 물이 흐르게 되었다는 상상력은 어쩌면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입견 때문인지 몰라도 물방울 떨어지는 것이 꼭 쌀알 떨어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신동대굴 안에서 30분 이상을 머물면서 과연 신동대란 인물이 실존하였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상상해보았습니다. 전설텔링 속에서는 홍길동이나 전우치 정도의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었지만 이 험하고 외딴 계곡, 산 중턱에 홀로 오랫동안 도를 닦았다면, 아무래도 봉두난발에 꾀죄죄한 모습의 중늙은이 모습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한 달 넘게 연재하며 멋진 캐릭터로 이어왔던 신동대에 대한 환상이 갑자기 깨어지는 듯한 기분에 머리를 흔들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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