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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현재와 과거, 경남의 문화와 전설... 익숙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애착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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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견 '몽유도원도'


안평의 남자 '안견'. 딱 하나 남아 있는 그림 '몽유도원도'. 안평의 총애를 받으며 화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음직하지만 그가 남긴 그림은 딱 이거 하나다. 안견이 그렸을 것으로 보이는 그림은 몇 점 있다. 그런데 이게 일본의 국보다. 나참... 보자, 일본의 문화예술품이 한국의 국보인 게 있나? 있을 리가 없지. 일본 쳐들어가 문화약탈을 한 적이 없으니까. 그냥 팍 몽골 일본 원정 때 태풍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함락해버리는 긴데. 오늘 또 뉴스에 보니 일본군 위안부가 자발적이었다고 일본 고위공직자가 망언을 쏟아냈다더만.


어쨌거나, 이 그림을 보면 왼쪽 현실세계에서 오른쪽 이상세계로 표현했다.기울기도 상승곡선을 이루고 있다. 민병권 교수는 이 그림에 대해 여섯 가지로 분석했다.


1. 침형세수, 치형돌기의 표현방법을 기반으로 한 이곽파 화풍을 계승.

2. 도연명의 도화원기를 바탕으로 한 안평대군의 꿈을 그린 '관념산수'.

3. 북송시대 임천고치를 지은 곽희가 개발한 평원, 고원, 심원법의 삼원법으로 이루어진 구도법.

4. 횡권산수(가로로 긴 두루마리에 그린 산수화).

5. 무릉도원을 표현한 오른쪽 도원 세계는 조감도법을 사용함.

6. 안평대군의 발문에는 송설체로 쓰여짐.


강희안 '고사관수도'


세종 때 유명한 선비화가 강희안은 절파 화풍을 도입한 주인공이다. 이 그림은 수묵화로 세로 23.4센티, 가로 15.7센티 크기다. 그다지 크지 않다. 고사관수(高士觀水). 학식 높은 선비가 물을 바라보다. 물을 보면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는 화두를 던진 그림이랄 수 있겠다. 이 그림에 대한 여러 해설 중에 민족문화대백과 것을 일부 옮겨 본다.


"이 그림은 덩굴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에 두고 바위에 기대어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중국 북송대 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파 화풍이 크게 풍미하고 있던 당시로는 색다른 경향의 화풍을 보인다."


"산수의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배경으로 한 인물 중심의 구성이라든가 근경 위주의 대담한 변각 구도와 공간감의 결여 등은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 소경산수인물 화풍의 선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흑백 대비가 심한 묵법과 자유분방하게 가해진 준찰(皴擦:입체감이 있도록 주름을 그리는 일), 날카롭고 간결하게 처리된 옷주름 선과 헝클어진 모습의 덩굴 등도 원대의 선종수묵화풍과 더불어 절파 양식의 경향과 상통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은 활당하면서도 세련미 넘치는 필치와 더불어 짙은 문기(文氣)를 풍기고 있다. 그래서 화원이나 직업화가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중국 절파풍의 작품과는 격조를 달리하는 화격을 보이고 있다."


김시 '동자견려도' 보물 제873호. 비단에 담채.


동자견려도 당겨서 본 그림.


양송당 김시는 김지라고도 읽힌다. 조선 중기 가장 유행했던 화풍이 절파풍인데 주목받았던 화가가 바로 김시다. 김시란 인물, 조선 중기 대단한 집안 이력이 있네. 아버지가 중종대 좌의정 김안로다. 그런 집안에서 그림을? 의아해하겠지만 조선시대 잘나가던 집안 한방에 훅가는 사례야 비일비재한 터. 김안로가 정유삼흉으로 지목받고 사약을 받으니 김시의 인생도 가시밭길이 펼쳐졌겠지. 집안이 망했는데 뭘 할 수 있겠어. 그림이나 그려야지.


그런데 김시, 그림에 일가견이 있었나보다. 전혀 새로운 화풍을 개척한다. 이런 그림을 대경산수인물화라고 한다. 그림을 확대해서 보면 코믹한 장면이 있다. 아이가 나귀의 고삐를 잡아당기는데 나귀는 못가겠다고 버틴다. 둘의 표정이 재미있다. 


인물 중심의 주제에 기울어진 주산의 형태, 흑백의 대조가 현저한 산 묘사, 굴곡이 심한 소나무, 강한 필묵법. 이러한 것들은 절파풍의 영향을 보여주는 사례다.


덧붙인 해석을 보면, "전체적인 구도면에서 보았을 때 왼편에 무게가 실려 있으며, 해조묘(蟹爪描)의 소나무는 중경의 여백을 메워줄 뿐만 아니라 화면 전체를 대각선으로 이분하여 화면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또한 산수가 주된 표현 요소로 나타나지만 점경인물의 옷을 호분(얼굴에 곱게 화장하기 위해 쓰는 분)으로 칠해 화면의 주제를 더욱 부각시키고 있다.


김시 '한림제설도'


역시 김시의 그림이다. 안견파 계통의 작품이다. 몽유도원도 비슷한 느낌이 나네. 김시가 환갑 때 안사확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렸단다. 근데 안사확이 누군지 알수 없다고. 그림을 보면, 눈이 온 뒤 설경을 담았는데, 동자견려도에서 보여준 절파풍과 안견화풍이 섞여있음을 발견할 수 있단다. 난 어떤 부분에서 절파와 안견파를 유추해낼 수 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


김명국 '달마도'


여느 산수화에서 볼 수 없는 날렵하고 강한 필체를 느낄 수 있다. 꼼꼼한 화원이라면 이렇게 그릴 수 없다. 술한 잔 걸치고 휙휙! 김명국은 1636년과 1643년 일본에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다녀온 사람이다. 일본에 갔을 때 김명국의 일화가 재미있다. '한국미술산책'이란 인터넷 자료에 보면, "한 왜인이 김명국의 그림을 얻기 위해 많은 돈을 들여 건물을 장식한 뒤 천금의 사례비를 준비해 벽화를 그려달랬다. 그러나 주광 김명국은 술부터 찾았고 취기가 올라 붓을 들었더니 왜인은 그림 그릴 때 쓰는 금가루 즙을 한사발 내놓았다. 김명국은 그것을 한 번에 들이킨 후 새로 단장한 벽에 뿜었다. 왜인이 깜짝 놀라 화가 나서 칼을 뽑아죽이려 하자 김명국, 껄껄 웃으며 벽에 뿌려진 금물가루로 그림을 그렸다. 손놀림이 자연스럽고 붓길이 힘차니 순식간에 어떤 모퉁이는 산수가 되고 인물이 되었다. 그림이 환성된 후 아까 뿜었던 금물가루의 흔적은 간데없고 모든 형상이 마치 살아있는 듯 생생했다. 놀란 왜인이 기뻐서 머리를 조아리고 감사함을 표시했고 벽화가 훼손될까봐 기름막으로 덮어 보호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자랑했다." 김명국은 술을 좋아해 '취옹'이라 불리기도 한단다. 절파 후기 광태파에 속하는 인물이다.


김명국 '설중귀려도'


사진을 제대로 못찍었다. 전혀 눈쌓인 느낌이 안 난다. 이 그림은 삼베에 수묵으로 그린 것인데 추운 겨울밤 친구를 방문했던 선비가 작별을 고하고 길을 나서는 모습을 담았다. 발걸음을 재촉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는 선비의 모습에서 이별의 아쉬움을 느낄 수 있다.시동은 또 시동끼리 통하는가 보다. 아이들도 서로 헤어지는 게 아쉬워 서로 바라보는 모습이다.


그림의 특징을 보면, 화면 오른쪽에 앞으로 약간 기울어진 절벽을 배경으로 집 뒤에서 시작되는 계곡이 사선방향으로 전개되고 그 왼쪽은 여백으로 처리하며 전경 오른쪽에는 바위로 막아서는 구성이다. 이러한 공간구조는 16세기 후반 김시로부터 18세기 초 윤두서에 이르기까지 유행했다. 


절벽과 근경의 바위를 보면 각이 진 필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가운데 움푹 들어간 부분에만 빠른 필치의 부벽준(산수화에서 산이나 바위를 그릴 때 측필을 이용해 도끼로 팬 나무의 표면처럼 나타내는 준법)으로 음영을 표현했다.


빠른 필치의 부벽준 처리와 복잡한 수지법은 표현 등에서 명대 후기 절파양식을 엿볼 수 있다.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구도에 활달한 필치를 보여준 조선 중기 회화의 가작이라는 평이다.


심사정 '방심주산수도'


심사정은 젊어서 정선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웠으나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남종산수화에 심취해 스승인 정선의 진경산수화보다 전통적 중국 화제의 문인화를 즐겨 그렸다. 산수와 인물, 화훼, 초충 등을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은 심사정의 전형적인산수화풍이 나타나는 그림이란다. 화면 왼쪽 상단에 글이 있는데, 이로 나이 52세 때 1758년 가을, 정영년이라는 사람을 위해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당시 다른 그림을 모방해서 많이 그렸다. 완전히 베끼는 것을 임모라고 하고 베끼되 새롭게 창작하는 것을 방작이라고 한다. 이 그림 역시 명나라 문인화가 심주의 화법을 따른 것으로 방작이라 할 수 있겠다.


근경의 선비 모습을 제외하고는 심주의 화법이 크게 드러나지 않고 필법이나 하면 구성 등에서 심사정 특유의 화풍을 보여준다. 심사정은 오파와 절파의 양식을 혼합했는데 나름 창작 정신을 드러내고 있다.


그림을 보면 먼곳의 산가 가까운 언덕은 피마준법(갈필에 의한 약간 물결짓는 필선으로 삼베 섬유를 푼 것 같은 까칠한 감촉을 가지며 이는 산의 겉면을 표현하는데 적용됨)으로 묘사된 데 반해 다리 건너편의 절벽은 부벽준으로 처리됐다.



이경윤 전칭작 '고사탁족도'


전칭작이라 함은 그가 그렸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얘기다. 줄여서 그냥 '전'이라고도 쓴다. 그림의 분위기가 시원하다. 나무 그늘 아래 발을 담글 수 있는 물이 있다면 그곳이 명당이 아니고 어디랴. 그림에서 이 양반의 발을 보면 화가의 세심함을 알 수 있다. 물이 얼마나 차가웠으면 두 발을 서로 꼬아 '앗, 차거'하는 저 찰라를 포착할 수 있었겠나. 그런데 시동의 모습을 보소. 주인의 심정을 잘 헤아리고 있지 않은가. 손에 든 것은 분명 술이렷다. 한여름 무더운 날 계곡물에 발 담그고 술 한 잔 걸치는 것만큼 무릉도원이 어디 있으랴.


이명욱 '어초문답도' 


간송미술관에 보관돼 있다. 자연을 벗삼아 유유자적하는나무꾼과 어부가 만나 대화하는 장면을 포착했다. 그래서 한사람은 신을 신었고 한 사람은 벗었다. 이명욱은 숙종이 많이 아꼈던 화원의 화가라고 한다. 이 그림은 17세기 말과 18세기 초에 그려졌으며 당시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그림을 보면 북송대의 소옹이 지은 <어초문대>를 떠올릴 수 있는데, 어부와 나무꾼이 강가에서 우연히 만나 우주와 세계의 질서에 대해 문답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다. 서인들이 이런 사상에 푹 빠져 있었다는 것. 또 이런 화려한 색채는 원체 화풍의 영향으로 당시 궁중회화의 양상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김정희 '세한도'


앞서 4강 정리에서 깊이 다뤘으므로 대략 생략하고. 세한도에 얽힌 이야기 짧게. 제주도 9년 귀양살이 보낼 때였단다. "1844년 나이 59세에 수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주면서 날이 차가워진 연휴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뒤늦게 시드는 것을 알게 된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적은 것은 유명하다."


Posted by 무한자연돌이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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