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살난 딸과 가을 들녘을 산책하다
2008년 10월 27일 오전 11시. 마을 앞 들판.
오랜 만에 마을 앞 들판으로 산책을 나갔다. 추수가 끝나고 들판엔 짚더미가 곳곳에 뭉쳐져 있다. 가을 햇살이 따스하다. 그래도 11월을 며칠 앞둔 계절이어서 그런지 찬바람이 제법 옷깃을 파고든다.
집을 나서자 지원이는 평소대로 산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지원아, 오늘은 산에 안 갈 건데... 들판으로 가자! 이리와." 방금 뒷집에서 나와 산쪽으로 어설렁 어설렁 걸어가는 고양이를 보고는 좀체 아빠 말을 듣지 않는다. "지원아, 들판에 재미있는 거 있다. 빨리 와!" 제법 큰소리로 불렀다. 그래도 들은 체 만 체다. 이렇게 제고집도 부릴 줄 아는 지원이는 2돌에 한 달 반 남은 나이다. 세상에 나와서 이제 겨우 22개월 14일을 보냈는데 벌써 주체성이 또렷해진 것인가? ^^
"야웅... 야웅...." 고양이를 따라가자는 요구다. 그런데 벌써 고양이는 사라진 지 오래다. "고양이는 자기 집에 가고 없다. 냇가에 고기 보러 가자. 자, 아빠 손 잡자." 사라진 고양이를 한참 확인하고서야 터벅터벅 걸어내려 온다.
"차가 지나가니까 아빠 손을 잡아야지." 몇 번이고 손을 내밀어도 잡으려고 하지 않더니 도로에서 경운기 소리와 자동차 소리가 크게 지나가자 손을 내민다.
지원이가 아빠의 손을 잡자 바로 "뛰어!" 하고 말한다. 지원이 기억력이 많이 발달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한 일주일 전일까, 산으로 산책을 나갔을 때 손을 잡고 재미삼아 "뛰어!"하고 같이 뛴 적이 있는데 그것을 기억한 모양이다. "그래, 뛰자. 뛰어!" 둘이서 들판길을 달린다. 가을하늘이 무척 맑다. 구름도 눈부시게 하얗고.
길가에 난 버들강아지와 쑥부쟁이, 이름 모를 꽃들에 호기심이 가는 모양이다. 얼마 뛰지 않아 걸음을 멈춘다. 아빠에게 버들강아지 하나를 꺾어 달란다. 몇 번이나 꺾어줬는데 얼마 흔들어 보지도 않고 땅바닥에 내던지고는 다른 것을 또 꺾어달란다. 그러다 개망초 같이 생긴 풀꽃을 꺾어 논도랑에 던지기 시작한다. 그 중에 한 개가 잘 안 꺾였는지 힘껏 잡아당기다 제힘에 풀썩 주저앉고 만다.
"아빠..." 하고 쳐다보는 모습이 가관이다. 어디서 그런 표정연습을 했는지 도저히 일으켜 세워주지 않으면 안될 표정이다. "어이구... 너무 힘껏 잡아당겼어? 옷은 지원이가 털어야지..." 엉덩이까지 손이 닿지 않으니 무릎만 털고 만다. "예진이도 털어줘야지." 곰인형 예진이 팔을 잡고 아래 위로 흔들어 제낀다. 저게 살아있는 생물이라면 팔 하나 떨어져나갔을 법하다. 지원이에게 저런 과격한 모습이 있었던가.
들판 한가운데 흑염소가 보인다. 우리는 그쪽으로 호기심에 끌려 다가갔다. 흑염소 무리는 스무 마리도 넘었는데 겨우 두 명뿐인 우리가 무서워 저리 주춤주춤 물러난다. "지원아, 염소가 우리를 무서워하는 모양이다. 더 천천히 걸어가보자." "메에..." 우리도 염소처럼 "메에..."하고 대답했다. 우리는 무서운 사람이 아니니 피하지 말라는 표현이었는데 염소들은 계속 물러난다. 다만 강아지 한 마리는 자기 책임을 다하는 양 염소 무리 앞을 버티고 지킨다.
지원이와 함께 계속 "메...."하자 염소들도 답변을 보내온다. "메에..." "메에..." 염소들이 제각각 뭔가 할말이 많은 모양이다. 나중엔 시끄러울 정도다. 조금 있자 경계를 푼 듯한 수염소 한 마리가 터벅터벅 걸어온다. 우리 앞 5미터까지 오더니 더는 다가오지 않는다. "메에..."하고 흉내를 냈더니 저도 "메에..."하고 소리를 낸다. 그러다 우리를 다 탐색했는지 15미터 정도 떨어진 무리 속으로 달려간다. "저 놈들 별 거 아니네.. 무서운 사람들인 줄 알았더니 가까이 가도 날 잡으려 하지도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을 보니 안심해도 되겠어."하고 동료들에게 전하는 것 같다.
"지원아, 우리도 가자." 일어서서 돌아서려는 데 지원이가 아쉬운 모양이다. "자, 빠이빠이 해야지." 하니 습관처럼 손을 흔든다. 돌아서서 그들에게서 멀어지자 강아지도 경계를 푸는지 일어서서 염소 쪽으로 돌아간다.
새로난 4차로 찻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 하천으로 갔다. 가뭄이 오랫동안 계속 되다 얼마전 조금 비가 온 것 뿐인데 천주산 달천의 골이 깊어 그런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유영을 할 정도의 물이 흐르고 있었다. 물고기떼를 본 지원이가 신기해 한다. 물속으로 뛰어들 기세다. "가자, 지원아, 저기 둑 위에 재미나는 것 있다." 손을 내밀었는데 지원이는 물고기를 보느라 여념이 없다.
한참을 그렇게 가을 햇살에 몸을 맡기고 노닐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길에서 소변을 한 번 뉘었는데 집에 도착했을 때엔 언제 또 쉬를 했는지 기저귀가 눅눅하다. "지원아, 이제 많이 놀았으니 숫자공부할까?" 숫자카드를 꺼내 이건 뭘까, 저건 뭘까 하며 관심을 유도하는데도 별 재미가 없는 모양이다. "일, 이, 탐, 타, 오, 두, 지, 빠, 구, 영"하고 대답한다. "지원아, 이건 영이 아니고 십이야." "어으응, 녕!" 10을 자꾸 영이라고 우긴다. 영 앞에 있는 1을 무시한다. 그러고보니 방바닥에 까는 자리에 있는 숫자엔 10이 없다. 초두교육의 효과를 실감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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